327화 낙원을 봉인해라
그는 황제였다. 일을 처리할 때는 법도를 지켜야 하고 제멋대로 해서는 안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신하들이나 종실에서 소란을 피워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영녕후부를 척결하려면 청희 장공주가 내놓은 증거가 필요했다. 또한 그녀가 그들을 지목하게 해야 했다. 그러니 아무리 구역질이 나더라도 지금은 반드시 참아야만 했다.
“그것도 괜찮습니다. 영녕후부를 정리할 때 청희 장공주를 앞세울 수 있잖습니까. 이렇게 되면 영녕후부 편에 선 무장들은 청희 장공주를 원망할 뿐, 폐하를 탓하지 않을 것입니다.”
순식간에 육장봉의 마음속에는 대책이 섰다.
청희 장공주가 입궁한 것은 장단점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장점이 더 많았다. 황궁은 청희 장공주가 자기 안방을 드나들 듯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이왕 들어왔으니 나갈 생각을 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야만 할 것이다. 물론, 바깥사람들과 연락할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짐의 마음도 훨씬 편해지는구나. 그분이 날 구역질 나게 했으니 짐도 그분을 편히 지내게 할 순 없지.”
황제는 자기도 모르게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진 기분이었다.
황제가 막 숨을 돌리자, 육장봉이 다시 말했다.
“폐하, 장 부승상은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장 부승상 그 사람도 참…….”
황제를 고개를 흔들더니 가볍게 탄식했다.
“너나 나나 모두 알고 있잖느냐. 장 부승상은 청희 장공주와 왕래가 없다. 청희 장공주와 야율제의 관계도 알 리가 없어. 게다가 시간으로 보아 청희 장공주가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것이지, 장 부승상이 알려 준 게 아니다. 장 부승상이 이 일에서 저지른 유일한 과오는 손녀딸이 폭행을 저지르게 방임한 것뿐이다. 너도 장 부승상에 대해 알고 있겠지만, 이런 사소한 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대다. 기껏해야…….”
“폐하, 장 부승상이 알현을 청합니다.”
황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이반반이 난각 밖에서 작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봐라. 때도 참 잘 맞춰서 왔잖느냐.”
황제는 냉소했다. 부드럽기만 하던 눈에는 분노의 불길이 일렁이는 듯했다.
장 부승상은 육장봉이 입성하기 전에 이미 북요의 공문서를 받은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여태껏 움직임이 없었다. 그러다가 육장봉이 입성하자, 일을 덮을 수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서둘러 입궁해 죄를 청하려는 것이다.
황제는 심지어 장 부승상이 뭐라고 말할지도 짐작이 갔다.
육장봉은 감정의 기복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에게 예를 올렸다.
“폐하, 장 부승상의 손녀 장소원은 월령안을 해치려다가 결국 자신이 쓴맛을 보게 되었습니다. 장소원은 얼굴을 다치고, 최음제에 취해 낙원에 있습니다. 장 부승상더러 사람을 보내 데려가라고 하십시오.”
사절 하나가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뿐이다. 장 부승상이 곧바로 입궁해 사죄하면, 황제로서도 기껏해야 두어 마디 나무라는 정도밖에 할 수 없었다. 이 일을 빌미로 장 부승상에게 호된 맛을 보여 주기란 아예 불가능했다.
장 부승상에게 정치적인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없다면, 다른 방면에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했다.
“장소원이 최음제에 취했다고?”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마터면 마음속으로 욕을 할 뻔했다.
‘장봉이는 왜 일찍 말하지 않은 거야?’
정성껏 키워 놓은 적장손녀(嫡長孫女)가 사고를 당했는데, 장 부승상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이러면 어쩌란 말인가!’
본래 황제가 우세를 점하고 있었고, 월령안은 피해자였다. 하지만 장소원이 이런 일을 당하자, 되려 장 부승상이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이제는 장 부승상에게 손녀를 잘못 키웠다고 나무랄 수도 없었다. 오히려 장 부승상을 다독여야 했다.
‘너무 억울한 노릇 아닌가.’
육장봉은 황제가 울적해 하자, 여유롭게 말했다.
“신이 제때에 도착해 사람을 시켜 장소원을 가두었습니다. 그냥 최음제에 취했을 뿐이지 몸을 더럽히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이 일의 주모자는 월 삼낭입니다. 장소원은 돌의자에 앉았다가 최음제에 취했는데, 그 돌의자는 월 삼낭이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 신이 증거물을 성안으로 가져오라고 하겠습니다. 폐하께서는 장 부승상을 만나시거든, 장 부승상에게 이 사건의 원흉인 월 삼낭을 내놓으라고 하십시오.”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했다니 다행이구나.”
황제는 육장봉의 뜻을 금세 알아차렸다. 조금 전의 답답함을 던져 버리고, 얼굴에도 옅은 미소를 떠올렸다.
“알겠다. 짐이 장 부승상에게 일의 자초지종을 제대로 알려 주마. 장 부승상이 ‘남’에게 속지 않게 말이다.”
장 부승상이 불쌍한 사람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육장봉이 제 때 일을 처리하여 장소원이 낙원에서 몸을 더럽히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장씨 가문에서 장소원을 데려간 다음 어떻게 처리할지는 그들과 상관이 없었다.
게다가 이 일을 계기로 장 부승상에게 월 삼낭을 내놓으라고 강요할 수도 있었다. 만약 장 부승상이 월 삼낭을 내놓으면 청주와 사이가 틀어진 것이다. 내놓지 않으면 장씨 가문이 청주 쪽에 서려는 생각을 굳힌 것으로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황제도 장씨 가문을 봐줄 필요가 없었다. 어느 쪽이어도 황제에게 불리한 일은 아니었다.
순식간에 국면이 유리하게 바뀌었다.
‘장봉이가 역시 세심하군.’
황제는 생각할수록 흡족했다.
육장봉이 말했다.
“폐하, 현명하십니다. 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월령안이 사절의 말을 뺏는 바람에 사절이 살해당했다. 황제가 이 일을 더 거론하지 않는 것은 월령안을 추궁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육장봉도 이제 월령안이 이 일에서 빠져나왔으니 다른 건 별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육장봉은 장씨 가문과는 철천지 원수가 되었다. 여기서 뭐가 하나 더 보태진다고 한들 대수로울 게 없었다.
“그래, 가 보거라.”
황제도 일어섰다.
장 부승상은 그래도 원로 대신이라, 잠시 냉대할 수는 있어도 계속 무시할 수는 없었다.
육장봉은 황제에게 읍을 하고 떠나갔다.
황제도 곧이어 난각에서 나오다가 문턱을 넘는 순간 문득 생각났다.
“아차, 청희 장공주의 병은 약왕을 초빙해 치료해야 한다는 말을 잊었구나.”
황제는 고민하다가 혼잣말을 했다.
“됐다. 별일도 아닌데 굳이 장봉이에게 말할 필요는 없겠지. 네가 월씨 저택에 가서 전하거라. 월령안에게 사흘 내에 약왕 손불사를 입궁하게 해 청희 장공주를 치료하게 해라. 시일을 어겼다가는 짐이 월령안의 죄를 다스릴 거라고 전하여라!”
이반반은 입을 벌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기는 했지만, 결국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그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을 뿐이다.
“네, 폐하.”
황제가 약왕 손불사의 규칙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그 규칙을 몰랐더라면, 월령안에게 말을 전하라고 할 것이 아니라 바로 명월산장으로 가서 약왕에게 말을 전하라고 명령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일개 내관과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로서는 황제의 명령에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 * *
육장봉은 황궁을 빠져나오자, 또다시 쉬지 않고 성 밖으로 나갔다.
그는 월령안이 매우 걱정되었다. 그러나 명월산장에 가서 그녀를 만나려고 서두르는 대신, 먼저 낙원으로 가서 그곳의 일부터 처리했다.
그리고 막 떠나려는데, 육팔과 육구가 앞으로 나서며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장군, 저기…… 장군께서 명하신대로 하였더니 그 여인이 방 안에서 비명을 질렀습니다. 아주 끔찍합니다.”
둘은 그 소리에 미칠 지경이었지만, 감히 자리를 뜨지도 못했다.
벌써 한 시진 남짓 지났는데도 장소원은 아직도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무슨 약인지는 모르지만, 약효가 어찌나 강한지 장소원이 미치지 않더라도 그들이 곧 미칠 것만 같았다.
육장봉이 말했다.
“몸을 묶고 입을 막은 뒤 장씨 가문에서 데리러 올 때까지 기다려라. 명심해라. 장갑을 끼고 그 여인의 몸에는 손대지 않도록 해라.”
그는 많은 사람 앞에서 장씨 가문을 망신시키지 않은 것만으로도, 동료로서 장 부승상에게 인의를 베풀었다고 생각했다.
장소원이 받고 있는 고통은 자업자득이었다.
“네, 장군.”
육장봉의 명령이 떨어지자, 육팔과 육구는 사정을 봐 주지 않고 곧 장소원을 꽁꽁 묶었다. 그녀는 꼼짝도 못 하고, 소리도 지를 수 없었다. 그저 고통스럽게 끙끙대는 신음만 냈다.
육장봉은 낙원의 일을 다 처리하자, 육일을 불렀다.
“장씨 가문에서 사람을 데려간 다음 낙원을 부숴 버려라. 다시는 낙원을 보고 싶지 않다. 알겠느냐?”
이 정원은 보기만 해도 언짢아졌다.
“장군, 낙원은…… 마님과 연관된 곳입니다.”
육일은 작은 목소리로 일깨워 주었다.
“……뭐라?”
육장봉은 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얼굴로 육일을 바라보았다.
“장군, 낙원은 본래 마님 가문의 것이었습니다. 십 년 전에 마님의 가문이 몰락하면서 그 재산이 범씨 가문 수중에 들어갔고, 이 낙원도 범씨 가문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낙원은 원래 마님의 외가 가문의 옛 정원이었으나, 예전에 나라에 몰수됐던 것입니다. 그랬던 것을 마님의 아버님께서 거금을 주시고 사들여 마님의 어머님께 선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육일은 생각 끝에 자신의 추측을 털어놓았다.
“월 삼낭이 마님을 낙원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짐작건대, 낙원이 마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어 거절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겁니다.”
육장봉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명령을 거두었다.
“낙원을 봉인해라. 범씨 가문에서 찾아와도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범씨 가문의 영리함이라면, 그가 낙원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것이다.
“네, 장군.”
육일은 장군이 명령을 변경했음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어차피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육장봉이 낙원에서 빠져나왔을 무렵, 날은 이미 저물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은 남기고, 육일만 거느리고 명월산장에 갔다.
그가 명월산장에 도착했을 때 마침 황궁의 사람들이 명월산장에서 나오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물어봐라.”
육장봉이 말에서 내려 산장으로 걸어갔다. 한쪽으로 물러서서 예를 올리는 내관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앞뜰에 도착하자마자, 육일이 쫓아왔다.
“장군, 청희 장공주 마마의 병이 엄중해 어의들도 속수무책이라고 합니다. 폐하께서는 마님더러 사흘 내에 손불사를 입궁시켜 청희 장공주 마마를 치료하게 하라고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음.”
육장봉은 청희 장공주가 몸져누운 건 바로 월령안에게 손을 쓰려는 의도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황제가 이 시간에 사람을 보내 전갈한 것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청희 장공주는 방금 큰 공을 세웠다. 정으로 따지나, 이치로 따지나 황제는 청희 장공주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어야 했다.
그때, 산장의 집사가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와 남원(南院) 입구에서 겨우 그를 막았다.
“소인이 대장군을 뵙습니다.”
육 대장군은 자신을 전혀 남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들 같은 하인으로서는 정말 일하기가 힘들었다.
“월령안은 깨어 났느냐?”
육장봉이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