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화 짐은 상을 내려야 한다
본래는 월령안의 복수를 더 하려 했지만 장소원의 얼굴이 저 정도로 망가졌으니, 마지못해 혀를 뽑는 정도로 그냥 넘어가 줄 수 있었다.
“네, 장군.”
육팔과 육구가 앞으로 다가갔다.
견딜 수 없는 통증으로 이성을 잃었던 장소원은 그제야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
그녀는 뜨거운 물에 덴 얼굴을 돌볼 새도 없이, 죽을힘을 다해 육장봉에게 기어갔다.
“육 대장군, 이럴 수 없어요. 당신이 저한테 이러면 안 되죠. 저는 장씨 가문 여식이고, 장 부승상은 저의 할아버지예요. 당신은 저를 건드리지 못해요. 당신이 저를 건드리면…… 제 할아버지가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그녀의 손이 막 육장봉의 신발에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육장봉은 그녀를 발로 걷어찼다.
“상관 없다.”
“앗……!”
장소원은 발에 걷어차여 나가떨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육팔과 육구가 앞으로 나아가 순식간에 그녀를 제압했다.
장소원은 이 두 사람이 혀를 뽑을까 두려워서 미친 듯이 외쳤다.
“월령안, 월령안이 사절을 죽였어요! 당신이 저를 다치게 하면 월령안도 죽을 거예요. 저를 놓아주세요! 놓아주면! 그러면, 제가 월령안을 살릴 수 있어요!”
육팔과 육구는 동작을 멈추고 일제히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마님이 사절을 살해했다고?’
육장봉은 눈을 들어 장소원을 힐끗 보았다.
장소원의 얼굴은 빨갛게 부어오르고 짓물러서 본래 모습을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처참한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육장봉이 자신을 보자 저도 모르게 턱을 쳐들고 귀족 여인다운 거만함을 뽐냈다.
안타깝게도 육장봉은 그녀를 훑어보았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육팔과 육구에게 다시 명령을 내렸다.
“끌고 가라. 확실하게 물어봐.”
장소원이 입을 열지 않았으면 모를까, 기왕 입을 열었으니 하고 싶은 말이든, 하고 싶지 않은 말이든 모두 털어놓아야 할 것이다.
“네, 장군.”
육팔과 육구는 크게 대답하고는 장소원을 끌고 옆방으로 갔다.
“안 돼, 안 돼……. 육 대장군, 당신이 저를 이렇게 대하면 안 되죠! 제 할아버지는 장 부승상이에요. 저의 할아버지는…….”
장소원은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하지만 육 대장군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저 짜증스럽다는 기색을 드러내며 가볍게 탁자를 두드릴 뿐이었다.
옆방에서 육팔과 육구의 심문을 받은 장소원은 향 한 대 태울 시간도 버티지 못했다. 결국 해야 할 말이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이고 전부 털어놓았다.
“장군, 알아냈습니다.”
육팔과 육구가 돌아와서 보고했다.
“월 낭자가 낙원에서 도망치면서 관도에서 말 한 마리를 가로챘는데, 말을 탄 이가 북요의 사절이었습니다. 월 낭자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낙마하여 단지 상처를 입었을 뿐이었습니다. 장씨 가문의 호위가 그 사람이 소문을 낼까 두려워 죽였답니다. 그리고는 월 낭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습니다.
호위는 그 사람의 시신을 수습하다가 북요 조정의 공문서를 찾아냈는데, 공문서의 내용은 야율제를 북요로 불러들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공문서는 장소원이 가지고 있지 않고, 호위가 성안에 보냈다고 합니다. 이변이 없는 한, 지금쯤이면 장 부승상의 손에 들어갔을 겁니다.”
육팔과 육구는 사절이 억울하게 죽은 사연 말고도, 장소원과 월 삼낭이 합심하여 월령안을 해친 일도 알아내었다.
“장소원은 월 낭자를 해코지할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장소를 낙원으로 정하는 것을 포함해 모든 계획은 월 삼낭이 제안한 거라고 합니다. 월 낭자를 그 지경으로 만든 건 돌의자였는데, 그것도 월 삼낭이 구해온 것으로, 장소원은 무슨 물건인지 모른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월 삼낭은 장씨 가문과 무슨 거래를 한 듯합니다. 장 부승상은 월 삼낭을 아주 중시하고 줄곧 귀빈으로 대접했다고 합니다. 장 노부인의 환갑잔치 날, 장씨 가문에서 월 낭자를 모욕했던 사건도 월 삼낭이 적극적으로 협조했다고 합니다. 장소원도 이 정도만 알고 구체적인 내막은 모른다고 합니다.”
육팔과 육구는 말을 마치고는 말없이 한쪽에 서서 최대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
육장봉은 고개를 끄덕이고, 손불사가 준 약 두 병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하얀 약병에 든 것은 먹이고, 다른 한 병의 약은 상처에 부어라. 명심해라. 이 안에 든 약도, 장소원도 건드려서는 안 된다.”
육장봉은 말을 마치자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마침 입구에서 육일을 보자, 잠시 걸음을 멈췄다.
“군사를 이끌고 가서 낙원을 봉쇄해라. 누구도 드나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 알겠느냐?”
“네, 장군.”
육일은 등을 꼿꼿이 펴고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육장봉을 잘 아는 사람들이라면 지금 그의 기분이 대단히 언짢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럴 때 누가 그의 성미를 건드렸다가는, 상대방의 온 집안을 모두 뒤집어 놓을 게 뻔했다.
장소원과 월 삼낭은 끝장난 셈이었다. 이제 장씨 가문에도 불똥이 튈 것이다.
* * *
육장봉은 장소원을 처리한 뒤, 명월산장으로 돌아가는 대신 말을 타고 성으로 돌아갔다.
그는 나는 듯이 달려 저녁노을의 끝자락을 밟고서 성문 입구에 다다랐다.
이날 성문 입구에 있던 백성들은 은빛 옷을 입은 육 대장군이 오색찬란한 노을을 걸치고 신선처럼 성안으로 날아드는 모습을 보았다.
안타깝게도 육 대장군이 말을 달리는 속도가 너무 빠른 데다가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길가의 백성들이 육 대장군의 용맹한 자태를 감상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눈앞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육장봉은 아무도 거느리지 않고 홀로 말을 타고 바로 황궁으로 쳐들어갔다.
“폐하를 뵈어야겠다!”
황궁 입구에 도착하자, 말이 속도를 줄이기도 전에 육장봉이 훌쩍 뛰어내렸다. 황궁 문을 지키던 금군은 그 광경을 보자, 즉시 궁문을 열고 그를 들여보냈다.
육장봉은 빠른 걸음으로 걸어 곧 난각 밖에 이르렀다.
“폐하께서 지금 계신가?”
황제는 줄곧 부지런히 정무를 처리했다. 낮에는 대부분 난각에서 정사를 처리하거나 대신을 만났다. 난각에 와서 황제를 찾으면 허탕 치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문을 지키던 내관이 이렇게 대답했다.
“장군, 폐하께서는 경안궁(慶安宮)에 계십니다.”
“경안궁?”
어째서인지 이 궁전의 이름이 익숙하게 들렸지만, 바로 떠오르지는 않았다.
“청희 장공주 마마께서 시집가기 전에 머물던 궁전입니다.”
내관이 얼른 한마디 덧붙여 설명했다.
육장봉은 눈썹을 찌푸렸다.
“청희 장공주가 황궁으로 돌아왔느냐? 언제 돌아왔느냐?”
청희 장공주가 시집간 뒤, 고종 황제의 뜻에 따라 그녀가 살던 궁전을 봉인해 놓았다. 그녀가 수시로 돌아와 머물 수 있게 하라는 뜻이었다.
“장군, 청희 장공주 마마께서는 한 시진 전에 오셨습니다.”
내관은 숨기지 않고 사실대로 대답했다.
‘한발 늦었군.’
육장봉의 눈에 순간 냉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용건이 있어 뵈러 왔다고 폐하께 아뢰거라.”
“네, 장군.”
내관은 감히 지체할 수 없었다. 허리를 굽혀 물러나 빠른 걸음으로 경안궁으로 갔다.
황제는 육장봉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이각 뒤에 이반반을 거느리고 난각으로 돌아왔다.
그는 육장봉을 보고 매우 기뻐했다.
“장봉아, 마침 잘 왔구나. 안 그래도 짐이 너를 부르려 했다. 청희 장공주가…….”
“폐하, 장씨 가문에서 북요의 공문서를 가로챘습니다.”
육장봉이 몸을 일으키며 황제의 말을 쌀쌀맞게 끊어버렸다.
“장봉아, 그게 무슨 말이냐?”
황제가 멍해지더니 안색이 굳어졌다.
육장봉은 방금 한 말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바로 뒤를 이어 말했다.
“북요의 황제가 야율제를 불러들이는 공문서를 내려보냈습니다. 이변이 없는 한, 야율제는 북요로 돌아가면 좋은 꼴은 못 볼 겁니다. 적어도 남원대왕의 자리는 빼앗길 듯합니다.”
육장봉은 황제가 자기 말을 들었음을 알고 있었다. 황제는 다만 받아들이지 못할 뿐이었다.
“장씨 가문이…… 왜 그랬단 말이냐?”
황제는 확실히 그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장 부승상이 그런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뜻밖의 사고였습니다. 장소원이 사람을 시켜 월령안을 능욕하려 하다가 남에게 들켰습니다. 장씨 가문은 이 사건이 드러나면 장소원의 명성에 영향을 줄까 두려워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자가 죽은 다음에야 북요의 사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육장봉의 표정이 차분했다. 깊은 눈에는 감정의 기복이 전혀 없었다. 방관자처럼 아무 감정도 없이 이야기하니 오히려 더욱 신뢰가 갔다.
“장소원? 미친 게 아니냐?”
황제는 이제 장소원의 이름만 들어도 짜증이 났다. 이 이름만 거론되면, 자신이 육장봉에게 어떤 사람을 짝지어 주려고 했는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육장봉이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장소원에게 희망을 주셨고 신은 그 희망을 끊어버렸습니다. 장소원은 감히 폐하를 원망하지 못하고, 신에게 복수할 능력도 없습니다.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잘못한 것은 오로지 월령안뿐입니다.”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똑같은 일이라도 표현을 조금만 바꾸면 완전히 다른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육장봉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이 말을 들은 황제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감히 짐을 원망한단 말이냐? 장소원이 군주를 속인 죄를 아직 묻지도 않았거늘, 담이 어지간히 크구나! 정절을 잃고서도 감히 짐의 대장군을 넘보다니!”
황제는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장소원만 아니었다면, 장씨 가문만 아니었다면, 장봉이가 나와 충돌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가뜩이나 지금 황제는 장소원에게 불만이 있었다. 만약 여기서 육장봉이 두어 마디 더 하면 황제는 화가 나서 장소원을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육장봉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애초에 장소원이 아니었다.
장소원이 그렇게 거리낌 없이 월령안을 해코지하고, 월령안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은, 그녀에게 장 부승상이라는 든든한 할아버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장소원 할아버지의 벼슬길을 끊어 버리고, 장씨 가문의 미래를 막아 버릴 것이다. 부승상의 손녀라는 신분을 잃은 장소원이 어떻게 살아갈지 두고 볼 셈이었다.
“폐하, 청희 장공주가 영녕후에게 불리한 증거를 내놓았습니까?”
육장봉은 황제에게 에둘러 말하는 대신 직설적으로 물었다.
“네가 어떻게…….”
황제는 깜짝 놀란 표정을 했다. 곧 쓴웃음을 지으며 자조적으로 말했다.
“짐은 청희 장공주가 생각을 바꾼 거라고 여겼다. 이제 보니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게로구나.”
“폐하,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장씨 가문에서 사절을 살해하고 소식을 가로챘다. 그리하여 장 부승상은 황제보다 한발 앞서 북요의 황제가 남원대왕 야율제를 불러들였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장 부승상이 이 소식을 청희 장공주에게 미리 알렸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육장봉은 확신할 수 있었다. 청희 장공주도 황제보다 앞서 이 사실을 알고, 때맞춰 입궁하여 영녕후부에 불리한 증거를 내놓아 자기 몸을 뺀 것이다.
확실히 청희 장공주는 영리하면서도 결단력이 있는 여인이라고 할 만했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에게 유리하게 행동했다.
예전에는 그들이 청희 장공주를 너무 우습게 봤었다.
“청희 장공주에게는 공이 있다. 공이 있으니……. 짐은 상을 내려야 한다.”
황제는 이 말을 하면서 왠지 구역질이 났다. 하지만 아무리 메스껍더라도, 코를 막고서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