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화 저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
손불사는 입으로는 늘 자신과 월령안은 거래만 하는 사이고, 그녀의 돈을 버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의술이 있는 한, 그에게 돈이 모자랄 일은 없었다. 월령안을 위해 자신의 원칙을 무시하고 거듭 양보할 필요가 없었다.
월령안에게 약을 팔아 주고, 그녀가 그 약을 육장봉에게 가져다주더라도 눈감아 주고, 가끔은 그녀를 위해 전례를 깨뜨리는 건 전부 그녀가 마음에 들어서였다. 그는 진심으로 월령안을 아꼈다.
가끔은 월령안을 보면서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만약 아들이 살아 있었다면 장가도 들고 아이도 낳았을 텐데. 그러면 손녀도 월령안만큼 컸을 것이다.
그는 줄곧 마음속으로는 월령안을 반쯤 손녀처럼 생각해 왔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남의 계략에 걸려든 것을 보자 조급해졌다.
줄곧 모든 일을 여유롭게 하며, 남들 앞에서는 고수다운 모습을 유지하기를 즐기던 손불사의 평소 모습은 오간 데 없었다. 그는 육장봉을 거느리고 부리나케 명월산장으로 달려갔다. 지긋한 나이에도 육장봉보다 걸음이 느리지 않았다.
“령안이를 내려놓게.”
손불사는 방에 도착하자, 숨도 고를 새 없이 의료함을 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침대 앞을 가로막은 육장봉을 밀쳐 냈다.
“저리 꺼져.”
‘꺼져?’
육장봉은 깜짝 놀랐다.
그가 이 나이를 먹도록, 감히 그에게 꺼지라고 말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침대에 누워 고통스러워하는 월령안을 보자, 묵묵히 뒤로 물러나 자리를 양보했다.
“좀 더 멀리 가. 빛 막지 말고.”
손불사가 또 한마디 꾸짖었다.
육장봉은 다시 뒤로 발걸음을 옮겨 구석까지 물러났다.
“누가 이리 독한 거야. 월경 촉진제에 최음제까지. 이 계집애를 못살게 괴롭혀서 죽일 작정이었군?”
손불사는 월령안의 맥을 짚어 보고, 그녀가 두 가지 약에 당했음을 알았다.
“최음제의 약효는 약해서 원래는 냉수욕만 하면 되었을 텐데 지금은 안 되겠군. 그냥 이 녀석더러 참아내라고 할 수밖에.”
손불사는 욕을 한마디 내뱉고는 의료함에서 알약 하나를 꺼내 월령안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육장봉에게 화를 내며 말했다.
“나무토막처럼 멍청하게 서서 뭐 하는 건가? 어서 물을 데우고 깨끗한 옷을 준비해 오라고 해. 옷은 하녀더러 와서 갈아입히라고 하고.”
손불사는 맥을 짚어 보고 난 뒤에야 월령안이 어쩌다가 피투성이가 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 피를 꺼리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손녀 같은 월령안이니까 참은 것이다. 다른 여인이 이런 상황이었다면 깔끔하게 씻기기 전까지는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다가가지 않았을 것이다.
손불사는 분부하고 나서,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돌아보았다. 육장봉의 온몸이 피투성이인 걸 보고, 그에 대한 혐오감을 감추지 않았다.
“썩 꺼져. 눈에 거슬리지 말고.”
손불사가 월경 촉진제라는 말을 하자, 육장봉도 월령안이 어쩌다 피투성이가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손에 흥건하게 묻은 피를 보는 육장봉의 눈이 살짝 어두워지며 살기가 번뜩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월령안을 해친 사람을 반드시 찾아낼 거다. 백 배로 복수하지 않으면 내 성을 갈겠다. 그리고 월령안은……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왜 내가 준 호각을 불지 않았지?’
“어? 저놈이 이렇게 말을 잘 들었나?”
손불사는 육장봉에게 분부할 때, 목청을 크게 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사실은 몹시 긴장하고 있었다.
비록 육장봉과 거래한 적은 없지만, 육 대장군의 명성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월령안 대신 분풀이를 해 주려는 게 아니었다면, 그도 육장봉에게 절대로…… 아니, 감히 고함을 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손불사 딴에는 고함을 지른 다음에는 육장봉의 발에 걷어차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저 녀석이 너 때문에 이렇게 말을 잘 듣는 거냐?”
손불사는 고개를 돌려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그리고 여전히 불안해하고 있는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머리를 토닥였다.
“저놈은 척 보기만 해도 만만치 않은 놈이구나. 저놈을 만난 게 네게 복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어.”
월령안이 울먹임이 섞인 고통스러운 신음을 냈다.
* * *
장소원은 악랄한 수를 썼다. 손불사 덕분에 월령안은 생명에 지장이 없게 치료할 수 있었지만, 그 후 몸이 허약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특히 장소원이 월령안에게 쓴 월경 촉진제는 모두 성질이 극히 차갑고 자극적인 약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평생 불임이 될 수도 있었다.
손불사는 월령안이 뒤집어쓴 피가 싫었지만, 하녀가 그녀를 목욕시키고 옷을 갈아입히는 틈을 타 몰래 약방으로 가서 직접 약을 달였다.
그가 손녀처럼 돌보는 아가씨가 열여덟 살에 어머니가 될 권리를 잃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는 여인은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이 불변의 도리라고 여기는 고지식한 서생이 아니었다. 월령안이 아이를 낳을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앞으로 아기를 낳을지 말지에 간섭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낳기 싫은 것과 낳지 못하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월령안이 아이를 갖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머니가 될 권리를 잃을 수는 없었다. 그건 당사자의 의지와 선택의 문제였다. 다른 사람 때문에 그 권리를 잃게 할 수는 없었다.
“네 몸이 견뎌낼 수 있기만을 바란다.”
손불사가 아까 월령안을 진맥할 때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안절부절못했다.
그 월경 촉진제는 어디서 났는지는 몰라도 정말 지독한 약이었다. 사람의 몸은 망가지기는 쉽지만, 제대로 치료하려면 하루 이틀 걸리는 일이 아니다.
손불사는 남들이 떠받드는 신의였지만, 이번 일을 겪은 월령안의 몸에 영향이 남지 않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이런 몹쓸 것을 령안이에게 쓴 게 누군지 내게 걸리기만 해 봐라. 그냥 죽여 버릴 거야!”
손불사가 나지막하게 욕을 한마디 했다. 줄곧 평온하던 눈에 싸늘한 빛이 번뜩였다.
손불사는 월령안에게 약을 먹인 뒤, 하인을 불러서 그녀를 방 안에 가두어 놓았다. 그녀 혼자서 최음제의 약효를 견디게 한 다음, 자신은 뒷짐을 지고 육장봉을 찾아갔다.
“누가 령안이를 해코지한 건지 알아봤는가?”
손불사는 어두운 표정으로 양손을 뒷짐 지고 슬그머니 나타나, 육장봉의 바쁜 걸음을 가로막았다.
“장씨 가문입니다.”
육장봉은 월령안에게는 손불사의 치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서둘러 나가봐야 했지만, 일부러 발걸음을 멈추고 참을성 있게 손불사의 물음에 대답했다.
손불사는 미간을 찌푸리고 다시 물었다.
“주모자는 여자인가, 남자인가?”
‘장씨 가문은 어느 가문이지? 나 같은 일개 강호인이 알게 뭐냐? 요즘 젊은이들은 정말 하나하나가 못났다니까! 모두 령안이보다 훨씬 못하잖아. 만약 령안이었다면 내가 입을 열기 전에 티를 내지 않고 분명하게 말해 주었을 텐데. 이렇게 육 대장군처럼 말을 아끼거나 거만하게 굴지도 않았을 거야.’
손불사는 육장봉을 보더니 하찮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눈빛에는 그를 싫어하는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여인입니다.”
육장봉은 못 본 척했다.
제아무리 악명 높은 육장봉이라도 노인과 실랑이할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이 노인은 월령안을 아끼는 사람이었다.
“이런 식으로 비열한 짓을 하는 걸 보니 계집일 줄 알았지. 됐어, 나도 사람을 마구 해칠 수는 없으니……. 그 계집의 몸을 한 군데 벤 다음, 이 약을 그 자리에 바르게.”
손불사는 준비해 두었던 약병 하나를 꺼내 육장봉에게 넘겨주었다.
“약효는 어떻습니까?”
육장봉이 물었다.
입을 쩍 벌리고 웃는 손불사의 모습은 대단히 악랄해 보였다.
“화류병(花柳病 - 매독) 환자의 몸에 있는 가장 더러운 고름집에서 짜낸 거야!”
육장봉은 손에 들고 있던 병을 한 번 보고는, 잠시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손불사는 육장봉이 흔쾌히 승낙하자, 또 약 두 병을 꺼내 육장봉에게 건넸다.
“그리고 이 약도 그 계집에게 먹이게.”
“이건?”
육장봉은 받지 않았다.
손불사는 얼굴빛을 흐리고서 말했다.
“아주 강한 최음제야. 그냥 손 가는 대로 만든 거지. 아쉽게도 달거리를 촉진하는 한랭한 약재는 마침 없군. 있었으면 내가 그년을 죽여 버렸을 텐데.”
“알겠습니다.”
육장봉은 약병을 건네받았다. 그는 손불사의 잔인함을 높이 샀다.
사실 손불사가 이 두 가지 약을 주지 않았더라도, 그는 똑같은 방법으로 장소원과 월 삼낭에게 복수하려고 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장소원과 월 삼낭에게 자신들이 짠 계략을 직접 체험해 보게 해 주는 게 그녀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육장봉은 손불사가 준 약을 가지고 최대한 빨리 낙원으로 되돌아갔다.
* * *
육팔과 육구는 이각이 지나도록 월령안이 나오지 않자, 안으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낙원을 샅샅이 뒤져도 월령안의 모습을 찾아내지 못했다.
당황한 둘은 나가서 찾아보려다가, 육일이 보내온 소식을 받았다. 월령안이 장소원과 월 삼낭의 계략에 걸려들어 군영으로 대장군을 찾아갔다는 내용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두 사람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한편, 불안하기도 했다.
월령안이 무사한 것은 다행이었지만, 그들이 월 낭자를 잘 보호하지 못했으니 불안했다. 대장군은 그들을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했다.
둘은 걱정하던 끝에 공을 세워서 죄를 줄여보려고 했다. 다시 낙원으로 쳐들어가 낙원에 있던 사람들을 전부 쓰러뜨렸다. 또 얼굴을 다친 채 도망치려는 장소원을 꽁꽁 묶어 두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월 삼낭은 도망치고 없었다.
육장봉이 달려왔을 때, 육팔과 육구는 이미 낙원을 접수했다. 두 사람은 육장봉을 보자마자 생각할 새도 없이 무릎을 꿇고 죄를 청했다.
“소인들이 소홀했습니다. 대장군께서 벌을 내려주십시오!”
“장소원과 월 삼낭은 어디에 있느냐?”
두 사람 앞에 서 있는 육장봉은 싸늘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온몸에서는 사람을 짓누르는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장군께 보고 드립니다. 장소원은 나뭇간에 있고, 월 삼낭은…… 달아나 버렸습니다.”
육팔과 육구는 고개를 숙이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육장봉은 그들을 꾸짖지 않고,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장소원을 데려오너라.”
“네, 대장군!”
육장봉은 욕도 하지 않고, 벌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육팔과 육구는 되려 더욱 공포에 떨었다.
육장봉은 참으려 들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폭풍 전의 고요함 같은 것이었다.
지금 그들을 벌하지 않는다고 해서 결코 그들을 용서해 준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들의 모든 과실을 낱낱이 계산한 다음, 엄하게 벌하려는 것이었다.
육팔과 육구는 부모를 여읜 것처럼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래도 감히 꾸물거리지 못하고, 당장 장소원을 끌고 왔다.
월령안이 가진 빙침의 위력은 사람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는 정도였다. 이 무렵의 장소원은 힘을 회복했고, 말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월령안 때문에 얼굴에는 화상을 입은 데다가, 육팔과 육구에게 죄인 취급을 받아 갇혀 있다 보니 옷과 머리 장식도 망가져서 볼썽사나웠다. 특히 그 얼굴은 악귀처럼 추했다.
육팔과 육구는 여인이라고 봐주는 법이 없었다. 장소원을 들고 와서는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장소원은 오는 내내 울부짖다가 육팔과 육구가 내동댕이치는 바람에 얼굴이 땅바닥에 닿았다. 얼굴에 난 물집이 전부 터지자, 그녀는 고통스럽게 땅바닥에 뒹굴며 얼굴을 감싸고 울부짖었다.
“내 얼굴, 내 얼굴…….”
육장봉은 역시 여인이라고 해서 봐주지 않았다. 육팔과 육구에게 명령을 내렸다.
“혀를 뽑아라. 저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