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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320)화 (320/1,004)

320화 천 냥을 가져오너라!

암위는 한가득 준비한 말을 결국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묵묵히 포권했다.

“어…… 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암위가 몸을 돌려 떠나려는 순간, 월령안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월 낭자, 여기 있습니다.”

암위는 몸을 확 돌리더니,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모습은 여전히 험상궂었다. 월령안은 왠지 자신이 웃음을 띤 사나운 개에게 노려지는 뼈다귀가 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육장봉 옆에 있는 사람들은 정말 끔찍해.’

월령안은 가만히 가슴을 쓸어내리더니, 몰래 숨을 고르고 나서야 말했다.

“육일이 나무 상자를 장군께 드리면서 무슨 말을 하지는 않았나요?”

암위는 월령안의 질문을 한참 기다렸지만, 예상외의 질문에 어리둥절했다. 잠깐 멈칫했다가 겨우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저는 모릅니다.”

“모르는 건가요, 아니면 말하지 않는 건가요?”

월령안은 웃는 듯 마는 듯하면서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저는 정말 모릅니다.”

암위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얼굴에는 아무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침묵한 뒤, 한마디 덧붙였다.

“육일은 나무 상자를 내려놓자마자 바로 나왔습니다.”

“그랬군요…….”

‘어쩐지 육장봉이 답례씩이나 할 마음이 있다 했지. 보아하니 육일은 내 말을 전하지 않았군. 그런데 육일이 언제까지 속일 수 있으려나?’

그녀는 그 말을 성문 어귀, 남들이 보는 앞에서 했다. 성문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가는 곳이므로 그 말을 들은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육장봉이 변경에 돌아오기만 하면 당장 알게 될 일이었다.

육일은 간이 작아, 감히 그 사실을 육장봉에게 알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잠시 속일 수는 있어도 평생 속일 수는 없다.

월령안도 인정했다. 어제 성문에서 육일에게 한 그 말은 욱해서 한 게 맞았다. 밤을 보낸 수고비랍시고 준 행동도 확실히 기분 내키는 대로 한 일이었다.

만약 오늘이었다면 이미 냉정함을 되찾았을 테니,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기왕 저지른 이상 후회하고 싶지도 않았다. 게다가 많은 사람 앞에서 한 말이라, 이제 와서 후회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충동적으로 저질러 놓고 화도 풀지 못한다는 건, 그녀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어쨌든 난 당하고 사는 건 싫단 말이야. 어제 잘못 보냈으니까, 그럼 오늘은 제대로 보내야겠네.’

월령안은 눈을 들어 무표정해도 험상궂은 암위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천 냥을 가져오너라! 현금으로 가져와야 한다.”

암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월씨 가문의 하인이 대답하고 명령을 받았다.

육팔과 육구는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월 낭자는 돈으로 뭐 하려는 거지?’

‘월 낭자는 기분이 좋든, 나쁘든 돈을 뿌리는 걸 좋아하나?’

‘그런데 왜 하필 천 냥일까?’

‘어제 우리에게 준 천 냥이 넘는 돈이랑 무슨 관계가 있는 건가?’

육팔과 육구 두 사람은 눈빛으로 의견을 나누다가, 둘 다 고개를 저었다.

‘돈 있는 사람들의 행동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군.’

어쨌든 그들은 천 냥이나 되는 돈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은 천 냥이라는 금액은 적지 않았다. 한 덩어리에 열 냥의 값어치가 나가는 관은(官銀 – 국가에서 화폐로 사용하도록 만든 은덩이)이 도합 백 개였다. 큰 상자에 가득 채웠더니, 하인 네 명을 동원해야 겨우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월령안은 일어나 은을 담은 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제가 당신네 대장군에게 주는 거예요.”

암위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월 낭자, 장군께서 사실 그렇게 가난하지는 않습니다.”

‘월 낭자도 이렇게 고지식하게 구시면 안 되지. 걸핏하면 돈을 주니, 모르는 사람들은 장군이 기둥서방 노릇이나 하는 줄 알잖아. 이러다 소문이라도 나게 되면 대장군이 얼굴이나 들고 다닐 수 있겠어?’

“싫어요?”

월령안이 고개를 돌리며 되물었다.

암위는 장군이 온종일 시간을 들여 월 낭자에게 줄 호각에 명월청봉도(明月靑峰圖)를 새긴 것을 떠올리고, 떠보듯이 제안했다.

“월 낭자, 답례하시려면 예전처럼 직접 만든 옷이나 아니면…….”

“하!”

월령안은 피식 비웃더니 고개를 돌려 월씨 가문 하인에게 일렀다.

“동전으로 바꿔서 내다 뿌려라. 그리고 대장군께서는 월령안이 준 돈이 적다고 받지 않으시겠다고 했다는 말도 퍼뜨려라!”

‘인제 와서 내가 직접 지은 옷을 달라고? 육장봉, 그럼 어디 한번 기다려 보시지!’

암위는 깜짝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려 거듭 말했다.

“아니, 아니, 아닙니다……. 가져가겠습니다. 가져야죠. 제가 지금 당장 가져가겠습니다.”

월 낭자가 왜 장군에게 돈을 주는지 모르지만, 감히 장군을 대신해서 월 낭자의 선물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죽고 싶지 않았다.

“늦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래도…… 진짜로 늦은 건 아니네요. 썩 가져가요!”

월령안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는 암위가 거절하기를 바랐다. 그러면 그걸 구실로 돈을 동전으로 바꿔다가 온 변경에 뿌려, 모든 백성에게 육장봉의 몸값을 알게 해 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에게는 배짱이 모자랐다. 아직 퇴로가 있는 상황에서는 육장봉과 완전히 척지고 싶지 않았다.

만일 그녀와 육장봉의 신분이 뒤바뀐다면, 장담컨대 육장봉이 얼굴도 들고 다니지 못하게 해 주었을 것이다.

암위는 두말하지 않고 돈을 지고 갔다. 월령안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안타깝군!”

그녀의 신분이 조금이라도 높았다면, 황제가 조금만이라도 그녀를 중시하고 사람 취급을 해 주었더라면, 그녀는 육장봉과 정면으로 맞섰을 것이다.

‘하필…….’

월령안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빠르게 이 일을 내려놓았다.

황제가 그녀를 대하는 태도는 그녀의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황제가 자신을 잘 대해 주기를 바라느니, 스스로 강해지는 편이 더 나았다. 황제가 그녀를 고깝게 여기더라도, 그녀를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야 했다.

월령안은 웃으며 말했다.

“그만 생각하자. 일단 밥부터 먹어야지.”

어제 다 못 했던 화풀이를 오늘 모조리 한 셈이다. 기분이 풀리자 바로 식욕이 돌았다. 식탁 위의 아침 식사를 말끔하게 먹어 치웠다.

방심한 탓에 체할 정도로 먹어 버려서, 하인에게 산사차를 내오라고 하려던 참이었다. 집사가 어두운 표정으로 걸어 들어왔다.

“아가씨, 셋째 아가씨께서…… 한번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

“월영수가?”

월령안은 셋째 언니라 부르지 않고, 비웃듯이 말했다.

“자기 신분을 인정하더냐?”

‘그러고 보면 자기 얼굴을 전혀 숨기지 않았지. 월영수는 한 번도 숨길 생각을 하지 않은 거겠지? 자기의 그 얼굴을 보고, 월씨 가문 사람들이 알아보기를 원한 거겠지?’

“네, 셋째 아가씨께서…… 아가씨를 사적으로 만나 뵙고 싶다고 했습니다.”

집사는 난처해하며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월령안은 집사를 보면서 눈 속의 웃음기를 깔끔하게 거두었다.

“내가 가서 만났으면 좋겠는가?”

“아가씨, 셋째 아가씨도 어쨌든 어르신의 핏줄입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집사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만 쉬었다.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나처럼 월씨 가문의 오랜 하인들도 셋째 아가씨를 조금도 지켜주지 못했다. 셋째 아가씨도 여자 혼자서 지내는 게 쉽지 않았겠지.’

“오랜 세월 동안 빚진 거 같은 느낌인가?”

월령안은 비웃으며 말했다.

집사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월령안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게 한숨을 쉬었다.

월씨 가문의 오래된 하인들이 지금은 그녀에게 충성하고 있지만, 영원히 그녀에게만 충성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똑같은 월씨 가문의 핏줄이고, 능력이 그녀보다 나은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 사람에게 의탁할 사람이 적지 않았다. 설령 그 사람에게 의탁하지 않더라도, 그쪽의 체면을 삼 할 정도는 봐줄 것이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그 사람이 월씨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그녀에게 충성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월씨 가문의 핏줄이라고는 월령안 하나만 남았을 때, 그녀가 겨우 여덟 살이고 아직 재능을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월씨 가문의 하인들은 그녀를 극진히 보좌했다. 그들의 이익은 월씨 가문과 한데 묶인 것이지, 그녀와 한데 묶인 것이 아니었다.

물론 월령안은 집사가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녀도 지난 십 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십 년이라는 시간은 그녀가 몇몇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온전히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집사가 그녀에게 충실하지 않았더라면 곁에 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월령안은 못마땅하기는 했지만, 집사에게 화풀이하지는 않았다.

월령안은 크게 숨을 내쉬고 물었다.

“어디에서 만나자고 하더냐?”

집사는 잠시 주저하다가 말했다.

“낙원(洛園)입니다.”

“낙원이라고?”

월령안은 비웃었다.

“그것참……. 장소를 제대로 정했네.”

낙원은 원래 월령안 외가의 정원이었다. 훗날 외가에서 잘못을 저지르자, 낙원을 나라에 바치게 되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거금을 들여 낙원을 도로 사들였다. 다시 수리한 다음에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선물했다.

낙원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준 선물이었다. 그러다 보니 대외적으로는 개방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벌써 십 년 전의 일이었다.

십 년 전, 월씨 가문은 몰락했다. 월씨 가문의 모든 사업이 범씨 가문의 수중에 넘어갔다. 물론 낙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낙원은 범씨 가문의 개인 정원이 되었다. 이제는 그녀도 들어갈 수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로 그녀이기 때문에 범씨 가문에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월 삼낭이 낙원에서 만나자고 한 것은 그녀가 거절하지 않을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월령안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냐?”

“오늘 오시(午時 – 오전 11시~오후 1시)입니다.”

집사도 역시 참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마차를 준비해라.”

낙원은 성 밖에 있다 보니, 가는 데만도 한 시진 이상이 걸렸다.

집사는 입술을 달싹였다. 무언가 권유하고 싶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힘없이 대답했다.

“네, 아가씨!”

반 시진 뒤, 월령안은 새로 단장하고 호신용 암기를 충분히 준비했다. 그런 다음에야 마차에 올라 육팔과 육구를 데리고 성 밖의 낙원으로 갔다.

월령안은 집사처럼 순진하지 않았다. 월 삼낭이 자기와 같은 피가 흐른다고 해서, 그녀를 자매로 여길 거로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지금 월씨 가문에 그들 두 자매만 남았으니, 자매간의 정이 깊어져서 둘이 손잡고 운명을 같이하며 월씨 가문의 영광을 다시 찾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월씨 가문 사람들이 집안싸움의 고수라는 사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월 삼낭은 그녀에게 절대 자매간의 정을 품었을 리가 없었다. 물론, 그녀 또한 월 삼낭에게 아무 감정도 없었다. 그러니 월 삼낭이 옛정을 되새기려고 만나자고 한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녀는 가는 길 내내 줄곧 월 삼낭의 목적을 추측해 보았다.

하지만 이때의 월령안은 월 삼낭이 그녀의 예상보다도 훨씬 악독하게 나올 줄은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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