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화 밝은 달이 푸른 봉우리를 비추네
육장봉은 혼잣말하자마자 바로 부정했다.
그가 아는 월령안이라면 절대로 이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 그를 피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런데 조각상을 새겨 달라는 암시를 할 리가 없었다.
그보다는 월령안이 조각도를 보냄으로써 자기에게서 멀어지라고 경고하는 것으로 보는 쪽이 더 타당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번에 이 조각도들로 정리할 것은 나무가 아니라 육장봉 당신이라고 말이다.
육장봉은 여기까지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는 자신이 월령안의 뜻을 알아냈다고 여겼다. 하지만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육장봉이 분부했다.
“호각 하나를 가져오너라.”
육가군(陸家軍 – 육씨 장군이 이끄는 부대, 여기서는 육장봉이 이끄는 부대)의 호각은 딱 한 번만 쓸 수 있었다.
앞서 월령안에게도 하나 선물했지만, 그녀는 아직도 쓰지 않고 있었다.
월령안이 자기가 아끼는 물건을 보내왔으니, 남자로서 반드시 답례해야 했다.
“장군, 호각입니다.”
암위는 곧바로 호각 하나를 가져왔다.
육가군의 호각은 미관보다는 실용성에 더욱 중점을 두었다. 그래서 세공 솜씨는 평범했고, 사실상 정교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지난번 육장봉은 월령안에게 호각을 직접 주었다. 하지만 이번은 다를 것이다.
육장봉은 나무 상자에 가지런하게 들어 있는 조각도를 흘끔 보았다. 눈에 웃음기가 반짝였다.
“그럼 당신의 조각도로 내 마음을 보여 주지.”
육장봉은 눈을 감고 잠깐 명상했다. 그다음 나무 상자에서 조각도 하나를 꺼내더니 호각에 무언가를 새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각도를 쥔 자세가 조금 어설펐다. 새기는 속도도 조금 느렸고, 손가락에도 피멍울이 맺혔다. 조각도를 쓸 줄 모르는 게 여실히 드러났다.
그러나 눈 깜박할 사이에 새기는 속도가 갈수록 빨라졌다. 조각도를 쥔 그의 손도 점점 능숙하게 움직여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더라면, 그가 나무 조각에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조각에 몰두한 육장봉은 오전부터 저녁이 될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았다. 식사는커녕 물 마시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였다.
그는 날이 저물어서야 칼을 거두었다. 호각에 대고 입김을 가볍게 불자, 톱밥이 날아갔다. 그러자 호각 위로 산봉우리 사이의 밝은 달과 수면 위에 우뚝 솟은 푸른 봉우리의 모습이 드러났다.
“밝은 달이 푸른 봉우리를 비추네(明月照靑峰).”
육장봉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손가락이 울퉁불퉁한 무늬를 스치며 호각 위의 거스러미를 세심하게 다듬었다.
“당신이 밝은 달처럼 고결하고, 세상의 고통을 받지 않기를 바라오. 밝은 달처럼 많은 별에 에워싸여 있었으면 좋겠소. 물론, 당신이 푸른 봉우리를 비춰 주기를 바라오…….”
그는 나지막하게 웃었다.
금방 새긴 문양이라 그런지 거칠었다. 육장봉은 사포도 쓰지 않고 손끝으로 호각 위의 새긴 자국을 일일이 다듬었다. 새긴 자국이 반질반질하고 매끈해져서야 호각을 비단 상자에 넣었다. 그리고 암위에게 월령안에게 가져다주라고 명령했다.
생각해 보니, 월령안은 지금 그를 만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도 그녀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암위는 앞으로 나아가 두 손으로 나무 상자를 받아 들었다. 조심조심 공손하기 이를 데 없는 동작이 마치 깨지기 쉬운 보물이라도 들어 있는 듯했다.
사실 암위의 눈에 이 호각은 어떤 보물보다도 더 귀하게 보였다.
그는 평범한 호각이 장군의 손을 거쳐 정교하고 훌륭하게 변하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
장군의 손에는 늘 사람을 죽이는 칼이 들려 있었다.
장군의 손에 들린 칼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 광경을, 또한 사람을 해치지 않고 도리어 자신이 다치는 광경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리고 칼을 쥐고도 조심스럽게, 부드럽게 행동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이 호각은 암위가 볼 때는 온 세상, 그 무엇보다도 더욱 귀중했다.
암위는 대단히 조심스럽게, 공손하고 경건한 태도로 비단 상자를 받쳐 들고, 성 밖의 군영에서 월씨 저택으로 가져갔다.
서두르다가 비단 상자 안의 호각에게 영향이 갈까 두려워, 감히 말도 타지 못하고 먼 길을 걸어서 갔다.
암위가 월씨 저택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날이 밝았을 때였다. 월령안은 아침 식사를 하려던 참이었다.
“월 낭자, 장군부의 암위가 뵙고 싶어 합니다.”
오늘 당직을 맡은 호위병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육팔과 육구였다. 만약 이 두 사람이 없었다면, 암위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월령안의 앞에만 조용히 나타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두 문신(門神)이 지키고 있었다. 암위는 비단 상자 안의 호각이 들썩일까 봐, 사람을 시켜 알릴 수밖에 없었다.
암위로서는 참 부끄러운 노릇이었다. 무공을 할 줄 모르는 평범한 사람을 만나는데, 정문을 통과해야 할 뿐만 아니라, 사람을 시켜 자신의 도착을 알려야 한다니.
그는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손에 든 비단 상자를 보자, 곧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일만 잘 처리한다면, 다시는 장군에게 재훈련하라는 명령을 받을 일은 없으리라고 믿었다.
월령안은 아침 식사를 하려다 육팔과 육구의 보고를 들었다. 그래도 여유로운 모습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당신네 장군부의 암위가 저를 만나겠다 한다고요? 그것도 당신들보고 알리라고 했다고요? 언제부터 장군부의 사람들이 이렇게 얌전해졌죠?”
육팔과 육구는 난처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예전에 월 낭자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 그들의 탓은 아니었다.
변방에 있는 삼 년 동안, 월 낭자의 사람이나 그녀에 관한 일을 홀대했던 게 한둘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월 낭자의 사람들은 감히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들이 상대방을 얕보고 무시해도 월 낭자의 사람들은 여전히 웃는 낯을 보였다.
그들이 월 낭자의 체면을 짓밟더라도, 월 낭자는 장군에게 물건을 보낼 때면 여전히 그들에게도 한몫을 챙겨 주고는 했다.
시간이 지나자, 월 낭자의 사람들이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데 익숙해졌다. 또한, 그들이 얼마나 지나치게 행동하든지 간에 월 낭자가 감히 화내지 못하는 데 더더욱 익숙해졌다.
왜냐하면 그들은 장군의 곁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월 낭자가 장군의 사랑을 받으려면 그들과는 좋은 관계를 맺어야 했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변경에 온 장군은 월 낭자를 만나자마자 사람이 달라졌다.
월 낭자의 마음속에서 그들의 지위도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졌다.
그들은 높은 곳에서 월 낭자를 내려다보고, 월 낭자가 장군의 비위를 맞추는 것을 조롱의 눈빛으로 보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니 단숨에 태도를 바꾸기는 어려웠다.
천만다행으로, 육십이가 있었다.
육십이는 적응력이 매우 뛰어났다. 육십이를 제외한 나머지는 몇 번이나 손해를 보자, 드디어 상황 파악이 되었다. 더는 월 낭자를 얕잡아 볼 엄두를 못 냈다.
그렇지 않고, 자기들이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월 낭자를 홀대했더라면 얼마나 비참한 최후를 맞아야 했을까. 상상도 하기 싫었다.
육일과 육이가 바로 그 생생한 교훈이었다.
육팔과 육구는 일찌감치 월령안에게 사과하려고 생각했으나, 줄곧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좋은 기회였다. 육팔과 육구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바로 월령안에게 정중하게 읍했다.
“월 낭자, 예전에는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저희가 소홀했으니, 월 낭자께서 저희를 어떻게 벌하셔도 기꺼이 받겠습니다. 다만 월 낭자께서 저희를 한 번만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월령안은 두 사람을 보더니 눈을 감았다. 눈 속의 씁쓸함과 자조를 숨겼다.
“됐어요. 지나간 건 지나간 거죠.”
사람이 자중할 줄 알아야 남에게 존중을 받는다. 그녀가 예전에 육장봉 곁의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한 것도, 그녀 자신이 남에게 짓밟힐 정도로 너무 자세를 낮췄던 탓도 있었다. 탓하려면 우선 자신부터 탓해야 했다.
그녀 스스로 자중하지 않은 탓이었다. 남자 하나 때문에 긍지와 자존심까지 남의 발바닥 밑에 내어 주며 짓밟게 했으니 말이다.
앞으로 다시는 그럴 일이 없을 것이다.
“암위에게 들어오라고 하세요.”
육장봉의 암위가 예의를 지켰으니, 월령안도 그의 체면을 봐주었다. 암위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고 바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암위가 걸어 들어와 월령안에게 예를 올렸다. 그러고는 허리를 굽혀 수중의 비단 상자를 높이 받쳐 들고 그녀의 앞에 올렸다.
“월 낭자, 장군께서 준비하신 답례입니다.”
월령안의 입꼬리가 살짝 실룩였다.
‘동작이 너무 거창하잖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암위가 황제에게 선물을 바치는 줄 알 것 같았다.
“열어 봐도 될까요?”
비단 상자를 받아든 월령안이 물었다.
“월 낭자의 것입니다. 당연히 됩니다.”
늘 무표정하던 암위가 애써 입을 벌리더니, 극도로 험상궂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월령안은 지금까지 이렇게 흉하고 무섭게 웃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하마터면 실수로 비단 상자를 떨어뜨릴 뻔했다.
‘육장봉 곁에 있는 놈들도 정말 그놈과 똑같이 험상궂네.’
월령안은 잠자코 외면하고 비단 상자를 열어 보았다. 상자 안의 호각을 보자, 저도 모르게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육장봉의 암위는 고작 이 호각을 주려고 이렇게 엄숙하고 진지하게 군 건가?’
“이건 육가군의 호각인가요?”
월령안은 호각을 꺼내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무늬가 새겨진 것 외에는 별다른 점이 보이지 않았다.
육장봉이 예전에 하나 준 적이 있지만, 아직 사용한 일이 없었다.
‘또 호각을 보내다니, 이게 무슨 뜻이지? 육가군의 호각이 이렇게 값어치 없는 물건이었나?’
“맞습니다.”
암위는 장군을 위해 조금이나마 좋은 말을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늘 엄숙한 태도를 유지하고, 말도 별반 하지 않던 그로서는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몰랐다. 월령안이 물으면 대답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 암위는 호각을 전달한 뒤에도 물러가지 않았다. 월령안 앞에 묵묵히 서 있으면서 그녀가 질문하기만을 기다렸다.
예전에 그는 명령을 받고 변경에 돌아왔다가 마침 전선으로 물자를 가지고 갔던 월씨 가문 하인이 돌아와 월 낭자에게 보고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월 낭자는 하인들에게 거듭 물었었다. 장군의 상황에 관한 것이라면, 표정과 눈빛 하나하나까지도 반복적으로 확인했다. 변방에서 떠도는 장군의 소문조차도 지나치지 않고 다시 한번 말하게 했다.
암위는 월 낭자가 장군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의 월 낭자는 장군에게 일편단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장군이 왜 하필 호각을 선물하는지는 묻겠지? 호각 위의 무늬는 무슨 의미인지 궁금하겠지?’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암위는 오는 내내 오랫동안 고심하며 말을 반복해서 다듬었다. 월 낭자가 물어보면 될 수 있는 대로 자연스럽게 대답해, 장군이 이 호각에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티 나지 않게 말해 주려고 했다.
암위는 만반의 준비를 했다. 심지어 이 순간에도 머릿속으로 문장을 다듬으며, 월령안이 묻기만을 기다렸다.
유감스럽게도 월령안은 호각을 비단 상자 속에 던지더니 바로 닫아 버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암위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보자, 예쁜 눈썹을 찌푸렸다.
“다른 용건이 또 있나요?”
눈빛으로는 ‘왜 아직도 있어요?’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