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화 밤을 보낸 수고비예요
육장봉이 아무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물었다.
“허!”
노인은 갑자기 꼿꼿이 앉았다. 아까까지의 피로함은 싹 사라진 모습이었다. 눈에는 섬뜩한 살기가 떠올랐다.
그는 음산하게 입을 열었다.
“나를 떠보려고? 간도 크군!”
“제가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육장봉은 포권하여 사과했다.
말은 비록 그렇게 했으나, 표정에는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감히?”
노인은 냉소를 지었다.
“자네가 우리 령안이라도 되는 줄 아나?”
육장봉은 말 한마디 없이 노인을 담담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노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서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순식간에 표정을 싹 바꾸더니, 냉정하게 육장봉을 쫓아냈다.
“됐네. 썩 꺼지게.”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육장봉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자리를 떴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확신이 섰다.
노인은 육장봉이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냉혹한 얼굴이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입가에는 웃음이 걸렸다.
‘이 녀석은 제법 날카롭군. 하지만 하필 내 성미를 건드리다니.’
노인은 슬며시 눈을 감고 바퀴 의자를 움직여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그가 움직이자마자, 회색 옷을 입은 하인이 앞으로 다가와 바퀴 의자를 밀어주었다.
노인은 바퀴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중에 령안이한테 알려 주거라. 육장봉이 밤에 월씨 저택에 머무르고 그 애와 옛정이 불타올랐다는 소문이 갑자기 온 변경에 퍼진 건 육장봉 그놈이 고의로 한 짓이라고. 맞다. 그리고 이것도 잊지 말고 말해라. 육장봉이 이화백을 운송할 사람을 강남으로 보냈다고 말이다. 내일 아침 일찍 말해 주거라. 오늘 밤에는 그 애가 푹 자게.”
“주인님, 저 녀석도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회색 옷을 입은 하인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아직도 현음을 생각하고 있느냐?”
노인이 물었다.
회색 옷차림의 하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넌 진작 자유의 몸이 됐다. 현음을 찾아가거라.”
노인은 탄식하고 말았다.
그는 월령안에게 눈앞의 사람을 소중히 여기라고, 후회하지 말라고 권했다. 왜냐하면 후회하는 사람을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제 목숨은 주인님의 것입니다.”
회색 옷의 하인이 말했다.
노인이 말을 이었다.
“내년. 내년에는 너도 북요로 가거라.”
내년이면 그도 눈을 감을 것이다.
하인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침묵한 채 노인을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 * *
월령안은 북원에서 나가자마자 정 부인의 하녀를 만났다.
하녀는 줄곧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월령안이 나오자, 함께 식사하자는 정 부인의 청을 전했다.
정 부인과 식사할 때도 정 장군은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 식사를 끝내고 나서도, 그를 만나 볼 수 없었다.
월령안은 묵묵히 마음속으로 촛불을 켜 놓고 정 장군을 위해 기도했다.
‘가엾은 정 장군.’
월령안은 명월산장의 주인이었으니 자연스럽게 본채로 들었다.
본채는 이미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방안에는 그녀에게 익숙한 향기가 났다. 방안의 가재도구며 장식물도 그녀의 저택에 있는 것과 비슷해서, 조금도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날 밤, 월령안은 푹 잤다.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열고, 앞다퉈 피어나는 모란과 근처의 하얀 배꽃을 보았더니 기분이 순식간에 좋아졌다.
아쉽게도 그 좋은 기분은 아침 식사를 끝낼 때까지만 유지되었다. 떠나기 전, 명월산장의 집사가 그녀를 찾아와 말했다.
“아가씨, 어제저녁에 육 대장군이 왔었습니다. 하지만 남들에게 알리지 않고 가 버리셨습니다.”
“알았다.”
월령안은 이제 말하기조차 싫어졌다.
육장봉은 무슨 망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라질 줄을 몰랐다. 그녀가 예전에 육장봉을 쫓아다닐 때도 이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그가 지나갈 만한 곳에서 미리 기다렸을 뿐이었다.
그때는 그를 한 번이라도 보려고 하루를 꼬박 기다리고는 했다. 때로는 며칠을 기다려도 볼 수 없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의 그녀는 아무리 보고 싶다고 해도 그를 미행하지는 않았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려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금의 육장봉은 완전히 미친 듯했다.
“어제저녁 어르신께서 정보 두 가지를 보내셨습니다. 아가씨, 보십시오.”
집사는 종이 두 장을 전달한 뒤, 묵묵히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어제저녁엔 왜 안 줬지?”
월령안은 종이를 건네받아 한 번 훑어보고 나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 육 대장군, 참 잘 노는군!”
집사는 머리를 더 깊이 숙였다.
주인 아가씨는 웃고 있었지만, 사실 매우 화가 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행히 월령안은 정색하며 화내지는 않았다. 몸을 확 돌려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말을 마차에 메워라. 저택으로 돌아가자.”
월령안은 이른 시간에 출발했기에, 성문 앞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진시(辰時 – 오전 7시~9시) 무렵이었다.
우연인지 아닌지는 몰랐지만, 월령안은 성안에 들어설 때 친위대를 거느리고 성을 나서려는 육일을 만났다.
육일은 월령안을 보자, 먼저 말에서 내려 앞으로 다가와 인사했다.
“월 낭자, 안녕하십니까.”
“당신네 장군은요?”
월령안은 마차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더니,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
“장군은 성 밖의 군영에 계십니다.”
육일은 사실대로 대답했다.
“오늘 돌아오나요?”
월령안이 또 물었다.
“장군께서는 행장을 꾸려 오라고 하셨습니다. 며칠간 돌아오시지 않을 겁니다.”
그 이유는 육일도 몰랐다.
어젯밤 육장봉이 갑자기 전갈을 보냈다. 며칠간 성안으로 돌아가지 않을 테니 갈아입을 옷을 군영으로 보내라고 했다. 어젯밤에 갑작스럽게 내린 결정이 분명했다.
“수고스럽겠지만 대장군께서 돌아오시거든, 육일 장군께서 사람을 보내 알려 주세요. 제가 대장군에게 빚진 돈을 돌려 드려야 하거든요.”
육장봉이 이런 때 군영에 가고, 또 며칠 동안 돌아오지 않는 것은 애초에 유언비어가 파다하게 퍼지고 난 뒤 육십이가 군영으로 가서 단시일 내에 돌아오지 못한 상황과 똑같았다. 이게 우연의 일치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저도 장군이 언제 돌아오는지 알 수 없습니다. 월 낭자께서 급히 돈을 갚아야 하신다면, 은표를 제게 주십시오. 제가 대신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월 낭자가 장군에게 빚질 일이 있나?’
육일은 의아해하면서도 그에 대해 묻지는 못했다.
“기다리세요.”
월령안은 마차 안쪽에서 나무 상자 하나를 꺼내더니, 육일에게 아무렇게나 던져 주었다.
“당신네 장군이 월씨 저택에서 밤을 보내신 데에 대한 수고비예요.”
“네?”
육일은 나무 상자를 받아 들고 월령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방금 내가 환청이라도 들었나?’
“그리고 이 말도 장군께 전하세요. 기술이 아주 엉망이라고요. 사람 시중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춘의루(春意樓) 아가씨들에게 가서 잘 배우라고 하세요!”
월령안은 말을 마치고는 육일 앞에서 쾅, 소리가 나게 마차 문을 닫아 버렸다. 곧바로 마부에게 출발하라고 분부했다.
“내가 방금…… 잘못 들은 게 아니지?”
육일은 나무 상자를 든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손에 애물단지를 쥐고 있는 것 같았다.
‘월 낭자의 저 말이…… 어째 여러 가지 뜻이 있는 거 같은데? 내 생각이 너무 지나쳤나?’
* * *
월령안은 성문 입구에서 육일을 만나 화풀이를 조금이나마 했다. 엉망이었던 기분이 그나마 살짝 좋아졌다.
하지만 집에 돌아왔을 때야 서두르다 상자를 잘못 준 것을 알아차렸다. 다시 우울해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전생에 육장봉에게 정말로 빚졌었나 봐.”
월령안은 손에 든 나무 상자를 바라보다가 다시 묵묵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나무 상자 안에는 작은 액수의 은표가 여러 장 들어 있었다.
그녀는 은표가 아닌 조각용 도구를 담은 상자를 육일에게 던져 주었던 것이다.
다행히 청희 장공주의 나무 조각상은 마차 안에 두지 않고 서재에 있는 비밀 공간에 담아 두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청희 장공주의 나무 조각상을 육장봉에게 밤샘 수고비로 던져 주고 더욱 난처해질 뻔했다.
‘육장봉도 아마 얼떨떨해할걸.’
“이렇게 무게 차이가 나는데 왜 알아차리지 못했지?”
월령안은 손에 든 나무 상자를 다시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이 비참한 현실을 받아들였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더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두 분에게 선물할게요.”
마음이 울적한 월령안은 마차 양측에서 지키고 있던 육팔과 육구를 보았다. 나무 상자를 그중 한 사람에게 아무렇게나 던져 주었다.
이까짓 자잘한 은표는 갖고 있고 싶지도 않았다. 이 은표만 보면 방금 했던 어리석은 짓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월 낭자, 감사합니다.”
육구가 나무 상자를 받았다.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몰라 잠깐 어리둥절했지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월령안은 손을 내젓고 성큼성큼 떠나갔다.
육팔과 육구는 대단히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했지만, 당장 열어보는 대신 월령안을 배웅했다.
월령안이 쉬려고 방에 들어간 뒤, 두 사람은 월씨 저택을 두 바퀴나 돌면서 살폈다. 아무 위험도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육구는 짬을 내어 상자를 열어보았다.
그리고 상자를 연 순간, 깜짝 놀랐다.
“은…… 은표예요.”
“고작 은표 가지고.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육팔은 담담한 표정으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몇천 냥이나 돼요.”
나무 상자를 든 육구의 손이 마구 떨렸다.
“몇천 냥이라고?”
육팔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더니 곧 정신을 차렸다.
“월 낭자가 혹시 상자를 잘못 준 게 아닐까? 우리가 얼른 돌려드려야겠다. 이렇게 많은 은표를 잃어버렸는데, 월 낭자가 얼마나 속이 타겠어.”
육구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은표를 보고 마음이 동하기는 했지만, 망설임 없이 상자를 닫았다.
“잘못 준 게 분명해. 월 낭자를 만나게 되면 돌려주자.”
육팔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말하지 않았다.
은표가 아무리 좋다지만 이것은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함부로 욕심내서는 안 됐다.
월령안은 처소에 돌아와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장군왕부로 갈 생각에 집사에게 마차를 준비하게 했다.
장군왕 세자는 그녀의 술을 육장봉에게 팔면서도 그녀에게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이런 동업자는 질질 끌 것도 없이, 당장 가서 혼을 내줘야만 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안 그래도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김에 장군왕 세자를 찾아가 단단히 일러둘 셈이었다.
그녀가 술만 제공한다지만, 이 장사는 그들 두 사람이 함께하는 것이었다. 장군왕 세자는 월령안이라는 동업자를 존중해야 하며, 그렇게 큰 주문을 받았으면 동업자인 그녀에게 먼저 물어봤어야 한다고 똑똑히 알려줘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그녀가 모르고 약속한 술을 내놓지 못하게 되면 그 손실은 누가 책임지라는 말인가.
월령안은 살기등등하게 밖으로 나갔다. 육팔과 육구는 그녀를 보자마자 다가가서 나무 상자를 돌려주었다. 그런데 월령안은 그것을 보지도 않고 두 사람을 밀쳐 냈다.
“말했잖아요. 선물하는 거라고요.”
“월 낭자, 이건 너무 귀한 거라 저희는 받을 수 없습니다.”
육구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많다고 생각되면 당신들 열한 명이서 나눠 가지세요. 그래도 많은 것 같으면 그냥 버리세요.”
월령안은 한마디를 던지고 몸을 돌려 마차에 올라탔다. 두 사람과 전혀 실랑이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그 나무 상자만 보아도 기분이 나빴다. 그런데 이 둘은 그녀의 어리석은 짓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려 하고 있었다. 어차피 열한 명이서 나누면 많지도 않은 액수였다.
하지만 육구는 마차 옆으로 쫓아가서 또 물었다.
“월 낭자, 저흰 열둘인데요!”
‘우리 중에서 누가 월 낭자에게 미움을 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