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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315)화 (315/1,004)

315화 자네가 령안이를 보호하게나

“바보 같긴! 그놈이 아직도 네가 쫓아다니던 그 육장봉이라면 너 자신에게 기회를 주거라. 여생을 회한 속에서 지내지 말고.”

노인은 손을 뻗어 월령안을 껴안았다.

월령안은 대답하지 않고 노인의 팔에 기대 울먹이며 말했다.

“영감님, 저를 좋아하는 사람은 왜 오래도록 제 곁에 있어 주지 못할까요? 왜 다들 도중에 저를 버리는 거죠?”

만약 그녀가 육장봉을 받아들인다면, 그녀와 육장봉에게는 십 년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매우 탐욕스러웠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일생이었고, 평생 함께하기를 원했다.

십 년은 너무 짧은 시간이다. 십 년 뒤에 다시 상처받게 될까 두려웠다.

가슴이 찢기는 듯해 숨조차 쉴 수 없는 아픔, 심지어 울 힘조차 없는 무력한 고통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그나마 예전에는 육장봉이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사랑을 받아 본 적조차 없었는데도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를 가졌다가 다시 잃게 된다면,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까 두려웠다.

노인 말이 맞았다. 그녀는 겁쟁이였다.

“있을 거다. 넌 아직 너와 끝까지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뿐이야.”

노인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씁쓸함과 유감이 어려 있었다.

석양은 한없이 아름답지만, 곧 해가 저물고 어둠이 내릴 것이다.

그의 몸은 그 자신이 잘 알았다. 설령 손불사가 있다 하더라도 그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육장봉은 그가 몇 년 동안 찾아낸 사람 중, 령안에게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다. 노인이 떠나고 나서 그가 령안을 보호할 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했다.

이 점 하나만으로도 육장봉은 승리자였다.

그래서 육장봉이 령안에게 상처를 주었더라도, 그는 여전히 령안이 육장봉을 받아들이기를 바랐다.

육장봉이 함께하고 보호한다면, 앞으로 십 년간 그의 꼬마 령안은 그렇게 고생스럽지도, 고독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령안을 많이 도와줄 수도, 오랫동안 함께해 줄 수도 없었다.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죽기 전, 믿음직한 사람을 찾아 령안을 지키게 하는 것이었다.

월령안은 무척 당혹스러웠지만 애써 침착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운 마음은 오래도록 가라앉지 않았다.

더는 말을 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조용히 노인의 다리에 기대고 앉아 하늘에 걸린 노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초점 없이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월령안은 한참 동안 앉아 있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노인에게 쫓겨나서 식사하러 갔다.

그녀가 떠나기 전, 노인은 참다못해 한마디 해 주었다.

“령안아, 육장봉이 널 좋아하더라도 부담스러워할 거 없다. 네가 기분이 좋으면 좋은 표정을 하고, 기분이 나쁘면 외면하면 된다. 그런 사소한 일로 울적해 하지 마라. 그럴 가치가 없으니까.”

그는 월령안이 그 누구에게도 서러움을 겪지 않기를 바랐다. 설령 그 대상이 자신이 눈여겨봤던 육장봉이라 해도 어림없었다.

월령안이 말했다.

“영감님, 걱정하지 마세요. 전 저를 지킬 수 있어요.”

육장봉의 사랑은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시시각각 자신을 일깨울 것이다.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자애롭게 손을 흔들었다. 눈길은 월령안의 뒤쪽에 있는 가산(假山 – 정원에 돌을 쌓아 만든 작은 산)에 닿았다.

“어서 가라.”

“저 오늘 밤은 명월산장에 머물고, 내일 아침 일찍 갈 거예요. 손불사가 요즘 영감님이 아주 깊이 주무시니 깨우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거든요. 내일 아침에는 보러 오지 않을 거예요.”

월령안은 떠나기 아쉬운 마음에 그의 다리 위에 덮인 얇은 담요를 잘 덮어주었다. 그리고 미련이 남은 듯 노인을 다시 껴안았다.

“영감님, 몸조리 잘하세요. 이제 건강해지면 저희 아버지께서 저를 위해 묻어 두었던 여아홍과 제 손으로 직접 담근 이화백도 드릴게요. 나중에 마음껏 마시세요. 절대 말리지 않을게요.”

노인만 있으면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무섭지 않았다. 그만 있으면 그녀에게는 물러설 곳이 있었다.

‘그러니까 영감님, 꼭 건강하셔야 해요.’

“그래, 너의 술을 기대하고 있으마.”

노인은 월령안의 팔을 다독였다. 눈에는 따뜻한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그럼 이만 갈게요. 제 생각은 하지 마세요.”

월령안은 노인을 껴안은 팔을 풀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노인을 등진 채 손을 흔들었다.

몸을 돌리는 찰나, 월령안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영감님, 많이 여위셨어.’

월령안은 몰랐지만, 노인은 줄곧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에는 떨어지기 아쉬워하는 감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월령안의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묵묵히 눈길을 거두고, 담담하게 한마디 탄식했다.

“아이가 다 컸으니, 이젠 손을 놓고 스스로 헤쳐나가게 해야지.”

잠시 후, 노인은 마음을 다잡았다. 남들 앞에서 보이는 거리감과 냉정함을 회복했다.

“나오게.”

노인은 가산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크지 않은 목소리는 바람이 불자 산산이 흩어졌다.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가산 뒤편에서 검은 그림자가 걸어 나왔다.

그는 키가 크고 당당했으며, 기질이 범상치 않았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세찬 바람이 이는 듯했다.

“다 들었는가?”

아무런 감정이 깃들지 않은 노인의 목소리는 냉담하면서도 거리감이 느껴졌다.

“저를 위해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노인 앞으로 걸어 나가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노인은 자신의 앞에 선, 소나무처럼 꿋꿋이 굽힐 줄 모르는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으로는 조금 감탄했다.

‘육속의 아들은 육속보다 더 결단력이 있고, 또 팔자도 더 좋군. 내가 잘못 보지 않았기를 바랄 수밖에.’

“결정했나?”

노인은 월령안 앞에서 긍정적으로 말해 주기는 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걱정되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변덕스러운 게 사람 마음이다. 사랑할 때는 무엇이든 다 좋다. 하지만 그 사랑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하늘도 모르는 일이었다.

“선배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앞으로 어떻게 되든, 제가 령안이를 보호할 겁니다. 이것만큼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겁니다.”

육장봉은 노인이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았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노인 앞에서 정중하게 약속했다.

“자네의 이 말이 있으니 난 이제 마음이 놓이는구먼.”

노인은 긴 한숨을 내쉬며 보일락 말락 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기 외의 다른 사람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도 나이가 들었다. 자신을 대신하여 월령안을 보호할 사람을 찾아야 했다.

육장봉은 그가 지금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사람이었다.

노인은 눈을 감았다. 눈 속의 복잡한 감정을 숨긴 채 냉담하게 말했다.

“자네도 령안이가 하는 말을 들었지. 령안이는 월씨 가문 출신이지만, 다른 월씨 가문 사람들과는 다르네.”

월령안의 이야기가 나오면, 노인은 저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말투도 조금 더 편해졌다.

“상인 가문은 늘 혈육 간의 정이 없고,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지. 월씨 가문은 특히 그러했다네.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어. 친형제, 친 부자지간에도 서로를 팔아넘길 수 있었지.

하지만 령안이는 다르네. 어릴 때부터 가장 순수하고 가장 진지한 감정을 받고 자랐지. 걔 부모님이나 오라버니, 심지어 나까지도 령안이에게만큼은 아무 이익도, 아무 이해타산도 따지지 않고 사랑을 쏟았네.

우리가 그 애에게 쏟은 사랑 때문에, 그 애는 눈이 너무 높아. 순수하지 않은 사랑은 없느니만 못하다 여기지. 이해타산이 뒤섞인 사랑은 그 애의 눈에 들 수가 없어.

자네도 이젠 령안이와 제법 여러 번 만났으니, 그 애가 자기 사람은 얼마나 감싸 주는지, 얼마나 과감하게 베푸는지는 알고 있겠지. 그런 과감함은 재물뿐만 아니라 감정에서도 마찬가지네. 그 애는 감정에 인색한 사람에게 자신의 사랑을 쏟지 않을 거네.”

노인은 여기까지 얘기하고 은은하게 자랑을 내비쳤다.

“그 애가 말로는 낸 만큼 받겠다고 하지만, 감정에서만큼은 득실을 따지는 법이 없네. 그 애의 감정은 가장 순수하고 진지하다는 말이네. 그 애가 자네를 어떻게 대했는지는 자네가 더 잘 알 거야.”

육장봉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월령안이 얼마나 훌륭한지, 그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월령안의 감정은 단순하면서도 직접적이었다. 좋아하기만 하면 원망도 후회도 없었다. 그녀의 헌신에 보답하지 않더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 이해타산도 없이, 오직 가장 단순하고 진지한 감정만 있을 뿐이었다.

바로 이 순수함에 그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는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노인은 육장봉이 그의 앞에서 예전의 서슬 퍼런 기세와 오만함을 거둔 것을 보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만족했다.

그는 육장봉의 진심을 볼 수 있었다.

노인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말했다.

“청주의 일은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거네. 이것이 바로 령안이가 자네를 받아들일 수 없는 원인이기도 하지. 청주 범씨 가문과의 십 년 싸움에 령안이는 필사의 각오로 뛰어드는 거네. 요행히 싸워서 이긴다고 하더라도, 황실의 견제를 벗어나기는 어렵다네.

만약 그 애가 좋아하는 사람이 자네가 아니라면 그나마 괜찮지. 그때가 되면 령안이는 좋아하는 사람을 데리고 주나라를 벗어나 멀리 떠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 애가 좋아하는 사람이 하필이면 자네가 아닌가. 자네는 주나라의 장군이고, 전신(戰神)이지. 그러면 그 애는 또 자네의 처지를 생각하겠지. 알겠는가?”

육장봉은 추호도 주저함이 없었다. 자신감이 넘치면서도 확신하듯 말했다.

“어르신이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여인조차 지키지 못한다면, 저 육장봉 역시 주나라의 장군이 될 자격이 없는 겁니다.”

‘월령안이 나를 위해 자유를 희생한다면, 내가 무슨 자격으로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믿어도 되겠는가?”

노인은 육장봉을 관찰하듯 주시했다. 혼탁한 눈에서 순간적으로 예리한 빛이 반짝였다.

육장봉은 본능적으로 경계심이 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모든 방어를 거두었다. 고개를 들어 노인을 태연스럽게 바라보았다. 노인이 그를 마음대로 주시하게 내버려 두었다.

이것은 노인의 시험이었다. 그는 마땅히 받아들여야 했다.

노인은 서슬 퍼런 눈빛으로 육장봉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마치 사람을 산 채로 삼킬 듯 사나웠다.

육장봉이었으니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노인의 눈빛 아래에서 절대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일각이 지났지만, 육장봉에게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여전히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노인을 당당하게 마주 보았다.

‘천하에 대를 이어 인재가 나왔구나.’

노인은 칭찬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 눈길을 거두었다.

“자네 제법이구먼.”

노인은 칭찬에 인색하지 않았다. 그리고 육장봉 앞에서 자신의 상태를 숨기지 않았다. 피곤한 듯 의자에 기댄 채, 허약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 아직 사람들이 있네. 령안이 옆에는 황제의 사람들이 감시하고 있어서 그 애에게는 그들을 넘겨줄 수가 없어. 때가 되면…… 그 사람들을 자네 손에 넘기겠네. 자네가 그들을 잘 이용해 령안이를 보호하게나.”

“선배님…….”

육장봉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이전부터 노인의 신분에 대해 어렴풋하게 추측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어느 정도 확신이 갔다. 황제에게 들켜서 안 될 사람이라면, 황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노인은 손을 들어 육장봉의 말을 끊어 버렸다.

“자네에게 주거든 그냥 받아 두게. 다른 건 더 묻지 말게.”

“선배님, 조계안을 만나 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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