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화 사랑 놀음이나 하라는 말이에요?
“어린애가 어른 일에 참견하는 거 아니다.”
노인은 월령안의 이마를 콩 쥐어박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쬐끄만 꼬마가 잔머리만 많아가지고. 지금 나를 떠보려는 수작이구나? 다음 생, 다다음 생까지 더 수련하고 오너라.”
“꼬마라고 부르지 마세요. 저는 지금 ‘꼬마’라는 말만 들으면 짜증이 나니까요.”
월령안은 머리를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왜?”
노인이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다 육장봉 때문이에요. 저는 그 인간이 누구한테 저주라도 받은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니까요.”
월령안은 불퉁하게 말했다.
“그 인간이 너를 어쨌는데?”
노인의 눈에는 웃음기가 스쳐 지나갔다. 고소하다는 듯 물었다.
“요즘 계속 기회만 있으면 저에게 접근해요. 마치…… 저를 좋아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감정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지만, 월령안은 전혀 거리끼지 않았다. 노인은 무엇이든 꿰뚫어 보는지라, 어차피 그녀가 말하지 않더라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육장봉이 널 좋아하는 건 정상이 아니냐?”
노인이 대수롭지 않게 되물었다.
월령안이 급히 되물었다.
“정상인가요?”
‘대체 어디가 정상이에요?’
“물론이지.”
노인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이 너하고 이렇게 오래 만났는데 그래도 너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게 비정상이지.”
“영감님,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잖아요. 자기 집 딸이야 다 좋아 보이죠.”
월령안은 노인의 말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집안 식구끼리는 아무리 못나도 좋게 보일 게 뻔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영감님, 왜 육장봉이 철광산 때문에 미인계를 쓰는 거라고 하지 않으세요?”
노인은 실소하고 말았다.
“넌 육장봉이 그런 고생을 자처할 놈으로 보이느냐?”
“아뇨. 그럴 필요도 없고요.”
월령안은 한숨을 쉬더니 풀이 죽어 말했다.
“제 추측이 맞다면, 육장봉은 제게 철광산이 있다는 걸 확신했을 거예요. 그런데 더는 철광산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아요. 오히려 저를 도와 숨겨 주고 있어요.”
육장봉이 고생을 자처하며 미인계를 쓸 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더 짜증스러웠다.
차라리 미인계라면 아주 간단했다. 그걸 역이용해 주면 그만이니까.
“어떤 상황인지 말해 봐…….”
노인은 담담하게 말했다.
사람이 늙으면 겪은 일이 많다 보니, 아무리 큰일이라도 별일 아니게 된다.
월령안의 눈에는 자신을 고민과 걱정에 빠뜨리는 일이 노인의 눈에는 아무 일도 아닌 것만 같았다.
“이 일은 장씨 가문에서 시작되었어요…….”
월령안은 곧바로 최일이 말해 준 일을 노인에게 낱낱이 들려주었다.
봉관 때문에 장씨 가문이 그녀를 원망하게 된 일, 월삼낭의 일까지도 전혀 숨기지 않았다. 심지어 장씨 가문에서 받았던 푸대접도 다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오늘은 장씨 가문 때문에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자신의 체면을 생각하면 남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그저 노인에게 하소연할 수밖에 없었다.
“장씨 가문은 대를 이을수록 점점 더 실망스러워지는구나.”
노인이 실눈을 뜨고 눈 속의 살의를 감췄다.
‘그 장가 놈은 역시 착한 놈이 아니었군.’
“그런 거 같아요. 장 부승상은 대단한 인물이지만, 세 아들은 아주 평범했어요. 다른 손자뻘은 못 보고 적장손이라는 장소산만 봤어요. 장소산 그 사람은 조금 영리하긴 하지만, 그릇이 안 되는 것처럼 보였어요.
후원의 여인들은 더욱 이상했어요. 하나같이 눈이 정수리에 붙어 있는 줄 알았다니까요. 집에 어진 아내가 있으면 삼대가 흥하지만, 그 반대는 집안을 망친다는 말이 딱 맞더라고요. 장씨 가문 여인들의 거만한 모습만 보고도, 그 가문에서 키운 자식들이 별 볼 일 없겠다는 걸 알겠더군요.”
월령안은 장씨 가문에 대한 불만을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
노인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당부했다.
“황제가 지켜보고 있을 테니 장씨 가문도 잠깐은 큰일을 벌이지 않을 게다. 오히려 네 셋째 언니 말이다. 조심해라. 너를 노리고 온 것 같구나.”
“언니가 무엇을 하려는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하지만 조심할게요.”
월령안은 머리를 끄덕이고는 마찬가지로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노인은 얼굴을 찡그린 월령안을 보았다. 눈에 자애로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다시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럼 다시 육장봉 이야기를 해 볼까?”
육장봉은 그를 실망하게 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월령안의 훌륭함을 알아보았다. 다른 건 몰라도 사람을 보는 안목 하나는 뛰어난 게 틀림없었다.
“육장봉에 관해서 뭐 더 말할 게 있나요? 전 다 얘기했는데요.”
월령안은 노인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보았다. 자신의 고민을 장난처럼 여기는 게 뻔히 보여, 일어서서 가 버리려고 했다.
‘영감님, 이런 건 너무하잖아요.’
노인 앞에서 망신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월령안이 일어나자마자 노인은 한 손으로 눌러 앉혔다.
“말해 봐, 어떻게 할 건데?”
“제가 뭘 더 할 수 있나요? 육장봉이 제 말을 들을 것도 아닌데.”
월령안은 하는 수 없이 제자리에 도로 앉았다.
“그때그때 대처하는 수밖에요.”
노인이 알고 싶어 하는 일이라면, 지금 말하지 않아도 나중에는 반드시 말해야만 했다.
생강은 여문 것일수록 맵다. 그녀는 지금 노인의 상대가 못 되었다. 순순히 그의 말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육장봉이 너를 좋아하잖아.”
노인은 장난기를 거두고 말했다.
“그래서 뭐 어떻게 해요? 영감님, 저는 청주로 가야 하는데요.”
월령안의 미소에는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육장봉이 그녀를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너무 늦었다.
“너 정말로 포기한 거냐?”
노인은 남몰래 탄식했다.
“포기했든, 포기하지 못 했든 무슨 상관이에요? 전 곧 청주로 가야 한다고요, 영감님.”
월령안은 다시 한번 말했다. 노인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대로 운명을 받아들이겠다?”
노인은 진지한 표정으로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월령안은 홀가분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월씨예요. 월씨 가문 사람의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또 어쩌겠어요?”
노인이 말했다.
“네게는 아직 십 년이 남았어.”
십 년이면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 십 년 동안 최선을 다해 후손들에게 좋은 길을 닦아 줄 거예요.”
그녀는 월씨 가문 사람으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녀 자신은 황실을 위해 십 년, 심지어 평생 목숨을 걸 수도 있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그녀의 아이, 손자가 대를 이어 황실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 운명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노인이 말했다.
“육장봉이 도와주면 너의 승산이 더 높아질 거다.”
육씨 가문의 남자들은 대부분 책임감이 강하고, 맡은 일은 끝까지 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깊은 감정은 없다 하더라도, 그래도 자기 여인이라면 평생 보호할 것이다.
노인은 육장봉도 그 방면에서는 그리 뒤처지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월령안은 문득 눈을 커다랗게 뜨고 노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영감님, 지금 육장봉의 감정을 이용하라는 뜻이에요?”
“이용은 무슨? 말도 똑바로 못 하느냐?”
노인은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그녀를 언짢게 노려보았다.
“어렸을 때 내가 그렇게 가르쳤더냐?”
월령안도 퉁명스럽게 말했다.
“다르게 말해도 결국 같은 뜻이잖아요.”
어차피 노인과 그녀 둘이 하는 말인데, 그런 듣기 좋은 표현을 골라 쓸 필요가 없었다.
“어떻게 같은 뜻이야? 육장봉은 너를 좋아하고 네 마음속에도 그놈이 있잖느냐? 너희가 서로 좋아하는데 어떻게 이용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 이런 건 부부가 손을 잡는 거라고 할 수 있지. 강자끼리 협력하는 거야.”
노인은 괘씸하다는 생각에 월령안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이 답답한 계집애 같으니라고.’
“아, 네네, 맞아요. 영감님의 말씀이 다 맞네요.”
월령안은 머리를 감싸고서 재빨리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월령안은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노인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그것을 이용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고집불통아…….”
노인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 이런 아이가 태어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월씨 가문의 장사 재간은 온전히 물려받았고, 월씨 가문의 영리함도 어지간히 물려받았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하필이면 월씨 가문의 가식은 하나도 배우지를 못했다.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령안아, 일을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 만약 육장봉이 아무것도 모르는데, 네가 육장봉의 감정을 이용해 너를 위해 일하게 한다면 그건 이용이 맞다.
하지만 그가 네 처지를 알고, 너를 사모해서 자신의 능력 범위 내에서 너를 돕는 건 이용이 아니야. 예전에 네가 육장봉을 위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때 너는 진심으로 원해서 한 거잖아. 지금 육장봉도 마찬가지야. 알겠느냐?”
월령안은 생각도 거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
하지만 입을 열자마자 노인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알긴 뭐 알아? 말로만 알아서는 안 돼. 마음으로 알아야지!”
월령안은 더는 무성의하게 대답하지 못하고, 씁쓸하게 말했다.
“영감님, 그건 달라요. 전에 저와 육장봉에게는 가능성이 있었어요. 그때는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육장봉과 백년해로할 기회를 얻으려고 했어요. 손톱만큼의 승산이 있어도 저는 걸어 보고 싶었다고요.
하지만 이제 저와 육장봉에게는 미래가 없어요. 현실이 눈앞에 있는데, 감정만 가지고는 안 되잖아요. 지금 깊게 빠져들수록 나중에 더 번거로워져요. 전 번거로운 게 딱 싫거든요.”
“령안아, 일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구나.”
노인은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다독였다. 하늘 끝에 걸린 노을을 바라보면서 추억에 잠긴 미소를 떠올렸다.
“인생은 단지 수십 년밖에 안 된다. 그러니 매 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단다.
하지만 사람의 평생은 길기도 하지. 하도 길다 보니 네가 평생 함께할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도, 사실 네 인생에서는 고작 스쳐 지나가는 손님이 될 수도 있단다.”
“영감님 그…… 그게 무슨 뜻이에요?”
월령안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건가? 육장봉과 내가?’
“네가 생각한 대로야. 바로 지금을 즐겨라. 육장봉의 헌신을 즐기면 되는 거야. 어린아이만이 감정이 순수한지, 아닌지를 따진단다. 령안아, 너는 이젠 어른이다. 어른들의 감정은 그렇게 순수할 필요가 없어. 이익이 섞여 있으면 오히려 더 가까워지고, 더 멀리 갈 수 있단다.”
노인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월령안의 예쁜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러더니 깜짝 놀라 소리 질렀다.
“영감님, 저더러 육장봉과 사랑 놀음이나 하라는 말이에요? 육장봉의 감정을 기만하면서요?”
“무슨 사랑 놀음이고, 무슨 기만이냐? 얘는 어렸을 때 선생의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은 게야?”
노인은 월령안을 흘겨보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련이 남지 않게, 눈앞의 사람을 소중히 여기란 말이야.”
“육장봉이 무슨 눈앞의 사람이에요?”
월령안은 가볍게 피식 웃었다.
노인은 월령안의 체면을 전혀 봐주지 않고 빈정거렸다.
“그럼 넌 왜 그놈 때문에 고민하느냐? 그놈이 널 좋아하는 건 그놈 혼자 일인데, 너하고 무슨 상관이야?”
월령안은 단박에 대답했다.
“그 사람이 육장봉이니까요.”
그녀의 감정은 그 누구도 아닌, 오직 육장봉에게만 좌지우지되었다.
육장봉이 그녀를 좋아하면, 그녀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월령안은 눈을 감아, 눈 속의 씁쓸함을 감추었다.
이제 거의 육장봉을 내려놓으려고 했다. 바야흐로 성공하려는 순간이었는데, 육장봉이 쫓아오더니 다시 그녀를 자극했다.
정말로 불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