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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313)화 (313/1,004)

313화 늙으면 어린애가 된다더니

월령안도 손불사를 설득하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다.

육장봉이 여러 가지 구실로 그녀 앞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 싫었지만, 그래도 그에게 감사했다. 육일이 청희 장공주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미리 귀띔해 준 덕에, 사전에 손불사를 설득할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었다.

청희 장공주 쪽에서는 어의가 병을 치료하지 못하니 손불사를 불러 달라고 말썽을 부릴 것이 뻔했다. 황제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분명 청희 장공주를 이기지 못하고, 월령안에게 손불사가 청희 장공주를 치료하도록 할 게 분명했다.

손불사가 관리나 귀족을 치료해 주지 않는다는 규칙 같은 건 아무 소용이 없었다. 황제는 그런 규칙 같은 건 염두에 두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녀가 손불사를 설득할 수 있을지, 말지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황제는 결과만 원할 뿐이다. 그녀가 손불사를 설득하지 못해서 청희 장공주가 황제를 계속 달달 볶는다고 해 보자. 황제는 그 결과를 그녀의 탓으로 돌리며,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고 나무랄 것이다.

“내 원수는 이미 죽었어. 나는 관심이 없거든.”

손불사는 눈꺼풀도 들지 않았다. 월령안의 꼬드김에 넘어갈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원수는 갚았지만, 그 화풀이는 아직 못 했잖아요?”

손불사의 아들은 어느 권력자를 치료해 주다가 무심결에 그 가문의 추문을 폭로했다. 그 권력자는 앙심을 품고 병이 나은 뒤 손불사의 아들에게 누명을 씌워 감옥에 집어넣었다. 손불사의 아들은 감옥에서 괴롭힘 당한 끝에 목숨을 잃었다.

“원수는 모두 죽었다. 내가 누구를 찾아 분풀이하란 말이냐?”

손불사가 월령안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화풀이야 하고 싶다만, 네가 죽은 사람을 되살려낼 거냐?’

월령안은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았다. 방그레 웃으며 제안했다.

“청희 장공주에게 화풀이하세요.”

손불사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내가 왜? 청희 장공주는 나와 원한이 없는데.”

그는 월령안의 꼬임에 넘어갈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청희 장공주는 당신이 권력자들은 치료해 주지 않는다는 걸 뻔히 알고 있어요. 그런데도 기어이 치료하라고 하잖아요. 정말 원한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월령안의 목소리는 잔잔했다. 말하는 속도도 느리고 차분했지만, 사람을 유혹하는 힘이 있었다.

“그때의 원수는 지금 없지만, 권력자의 본성은 변하지 않았어요. 그런 권력자에게 억울함을 당해도 말하지 못하고, 해명할 수도 없는 고통을 맛보게 해줄 생각은 없나요?”

손불사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필요 없어. 난 지금 자유롭거든.”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을 텐데요.”

월령안은 손불사의 마음이 움직였음을 알아차렸다.

“수많은 문무 대신, 천자 앞에서 화풀이할 기회를 드릴게요. 심지어 그 권력자들이 나중에 당신을 감히 건드릴 수도 없게 할 거예요. 어때요?”

손불사는 아들의 복수를 하기는 했지만, 그 한은 풀리지 않았다. 그 한이 풀리지 않으면 집착에서 영영 빠져나올 수 없었다.

이는 그가 여러 해를 보내는 동안 의술이 제자리걸음을 한 원인이기도 했다. 마음의 병은 마음의 약으로 고쳐야 하는 법이다.

“이게…….”

손불사는 마음이 움직였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원수는 아들을 죽인 그 가문뿐만이 아니었다.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악행을 감추기 위해 사람을 죽인 권력자들이기도 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 괘씸한 놈들이었다.

“그럼 하시는 거죠?”

월령안은 눈매를 곱게 휘더니 유난히 밝게 웃었다.

“내가 그래도 동의하지 않겠다면?”

손불사가 이를 갈며 사나운 말투로 말했다. 월령안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월령안과 그렇게 여러 차례 거래했지만, 금전 방면에서만 이득을 보았을 뿐이다. 이를 제외하면 다른 일에서는 한 번이라도 이득을 보기는커녕 줄곧 그녀에게 끌려다녔다. 게다가 돈은 월령안이 가장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었다.

월령안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하기 싫으면 하지 마세요. 세상에 돈이 있으면 못 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만약 동의하지 않으면 제가 손불사를 만들어 내면 되죠. 어차피 진짜 손불사인지 아닌지도 모를 텐데, 치료해서 죽이지만 않으면…… 아니지, 사람을 죽여도 상관없겠네요? 덤터기를 쓸 건 진짜 손불사인데 저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월령안은 교활한 표정으로 웃었다.

“아, 어쩌면 제가 손불사의 이름을 빌려 권력자들에게서 큰돈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다만 손 신의께서는 억울함을 조금 견디셔야겠네요. 수고스럽게 쌓아 올린 명성을 손쉽게 날려 버릴 테니까요. 나중에 당신이 직접 나선다 해도 누구도 약왕 손불사를 믿지 않을 거예요.”

월령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일부러 아쉬운 척했다.

“강호를 떠도는 사람들은 원래 가난하죠. 손 어르신께서는 명성도, 신분도 없으니 앞으로 누가 큰돈을 주고 찾아가 진찰을 받고 약을 사겠어요? 아무도 진찰을 받지 않고, 약이 팔리지 않으면 돈이 없을 거잖아요. 그러면 새로운 약도 연구하지 못할 거고요. 너무 안타깝네요.”

손불사는 화가 나서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어쩌다…… 너같이 맹랑한 꼬마와 만났을꼬!”

월령안은 급히 손을 들어 손불사의 얼굴을 가렸다.

“그 말…… 그 말은…… 제발 날 꼬마라고 부르지 마세요. 지금 그 말만 들어도 토할 것 같으니까요.”

이 말에 손불사는 기뻐서 야단이었다.

“꼬마, 꼬마, 꼬마. 쬐끄만 꼬마, 못된 꼬마, 망할 꼬마……!”

“왜 이렇게 유치하게 구세요? 시시하지도 않아요?”

이번에는 월령안이 화가 나서 얼굴빛이 변했다.

“요 꼬마 계집애가 감히 나한테 덤벼? 네가 열불 나서 죽게 할 거다.”

손불사가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월령안은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이렇게 연세도 많은 어르신이 저처럼 어린 아가씨를 입씨름으로 이기고서는 뭐가 그렇게 의기양양해요?”

“내 마음이야. 풋내기 꼬마가.”

손불사는 눈을 치뜨더니 심술궂고 제멋대로인 표정을 지었다.

월령안은 얼굴을 가리고 말았다. 나이도 지긋한 어르신이 안하무인인 부잣집 도련님 흉내를 내는 꼴은 도저히 봐 줄 수가 없었다.

“꼬마 계집애.”

월령안이 풀이 죽자, 손불사는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득의양양해서 떠나갔다.

손불사가 멀리 가 버리고 나서야 월령안은 손을 내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늙으면 어린애가 된다더니, 정말 틀린 말이 아니었다. 다행히도 이 늙은 어린애는 사람이 좋은 편이었다. 잘 달래기만 하면 바로 그녀의 말을 따라 주었다.

그렇지 않고 정말로 가짜 손불사를 만드는 상황이 된다면, 그때는 손불사와 원수가 될 각오를 해야 했다. 신의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목숨을 구할 수 있다. 정말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라면 손불사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손불사를 잘 구슬리고 나니, 월령안도 기분이 많이 좋아졌다. 노인은 아직 약욕을 하는 중이라, 그녀는 정 장군 부부를 찾아갔다.

처소에는 정 부인과 정 낭자만 있었다. 월령안은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 장군이 여기 온 첫날부터 손불사는 그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동안 손불사가 정 장군을 온갖 방식으로 괴롭혔을 게 뻔했다.

손불사는 성격이 괴팍하고 상대하기가 어렵지만, 의술은 정말 뛰어났다. 그리고 그의 눈에 들기만 하면, 좋은 약재를 아낌없이 썼다.

며칠 만에 정 부인과 정 낭자를 다시 만난 월령안은 하마터면 그 둘을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정 낭자는 살이 쏙 빠져 반쪽이 되었다. 그 모습이 생기가 넘쳐 보이는 데다가 얼굴 윤곽도 점점 뚜렷해지는 중인 것 같았다. 조금 드러난 이목구비만으로도 타고난 미인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정 부인은 더욱 큰 효과를 보았다. 뺨은 발그스레하게 혈색이 좋았다. 피부는 희고 윤기가 났다. 사람이 열 살 가까이 젊어 보여 마치 어린 소녀 같았다.

그녀는 원래부터 관리를 잘한 편이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은 정 낭자와 같이 서 있으니 모녀가 아니라 자매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자칫하면 부인을 알아보지 못할 뻔했어요.”

월령안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보자 정말로 멍해지고 말았다.

정 부인은 기쁜 나머지 월령안의 손을 잡고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

“이건 다 령안의 공로야. 만약 령안이가 손불사를 설득해 우리 귀염둥이의 병을 봐 주지 않았다면 나한테도 어찌 이런 좋은 기회가 있었겠어.”

정 부인은 뜨거운 눈빛으로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자기 친딸을 대할 때보다 더 살갑게 구는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월령안이 마음에 쏙 든 듯했다.

정 낭자는 한쪽에 서 있었지만, 전혀 질투하지 않았다. 월령안을 보는 그녀의 눈빛도 뜨거웠다.

평생 뚱뚱한 채로 살 줄 알았다. 그런데 령안 언니를 만나 이렇게 변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령안 언니는 정말 내 은인이야.’

그녀는 마음속으로 앞으로 령안 언니는 자신의 친언니이고, 어머니보다 더 가까운 언니로 여기겠다고 다짐했다.

“분명 부인께서 인품이 좋으셔서 그럴 거예요. 손 신의는 모든 일을 자기 마음에 들어야만 하거든요. 저도 억지로 시킬 수는 없어요.”

월령안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손불사에게 얼마나 시달리고 있을지 모를 정 장군을 떠올리자 제 발이 저려서 말했다.

“다만 정 장군께서 힘드시겠네요.”

화사한 정 부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우리 바깥양반이야 다부지고 튼튼하잖나. 별일 없을 거야.”

‘그이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화사함이 있을 수 없지. 날 위해서 그이를 좀 희생시킬 수밖에.’

정 부인의 말을 듣자, 월령안도 금세 마음이 놓였다. 그래서 손불사를 찾아가 정 장군을 적당히 괴롭히라고 말리려던 생각을 접었다.

‘정 부인도 신경 쓰지 않는데, 뭘.’

월령안은 정 부인이 있는 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이각이 지나기도 전에 하인이 와서 노인이 나왔다고 보고했다.

노인은 명월산장의 북원(北院)에 머물렀다.

북원은 산장에서 가장 큰 처소는 아니었지만, 가장 잘 가꾸어진 곳이었다.

월령안은 예전에는 북원에 와 보지 못했다. 이번에서야 처음 북원에 들어서자 이곳의 꽃, 나무, 풀, 돌 하나하나가 모두 범상치 않음을 알게 되었다.

걸어오는 내내 놀랍기만 했다. 꽃밭 앞에 앉아 있는 노인을 보자, 그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영락보주(瓔珞寶珠), 갈건자(葛巾紫), 남전옥(藍田玉), 비연홍장(飛燕紅裝), 은홍교대(銀紅巧對)……. 영감님, 이 뜰은 정말 정교하게 꾸며졌네요. 모란만 해도 수십 종이나 있어요.”

그녀는 명월산장에 이토록 많은 모란이 있는지 몰랐다. 줄곧 명월산장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그 배나무 숲이라고 생각했었다.

노인은 한동안 요양한 덕에 혈색이 많이 좋아졌다.

그는 바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는 얇은 담요를 덮고 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거무칙칙한 누런 빛을 띠고 있었지만, 살이 오르고 눈에도 정기가 도는 것이 확연했다.

월령안의 말을 들은 노인은 저도 모르게 자랑스러운 기색을 떠올렸다.

“고작 모란 몇 송이 가지고 호들갑이냐. 이까짓 게 뭐라고. 그 뭣이냐…….”

노인은 문득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를 깨달았다. 곧 웃음을 거두며 월령안을 노려보았다.

“이 시간에 여긴 왜 왔느냐? 이 늙은이 보러 일부러 온 거라고는 말하지 마라.”

노인의 바퀴 의자 옆에는 조그마한 대나무 걸상이 놓여 있었다. 영락없이 월령안을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그녀는 사양하지 않고 노인 옆에 앉았다. 그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영감님, 그 뭣이냐, 가 뭔데요? 뭔가 비밀이 있죠? 명월산장과 관련된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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