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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312)화 (312/1,004)

312화 마님을 뵙습니다

황궁을 나선 육장봉은 궁문 입구에 서 있는 최씨 가문의 마차를 보았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육일을 불렀다.

“가서 너희 마님께 청희 장공주가 병이 났으니 조심하라고 전해라.”

“마, 마님요? 저희 마님?”

육일은 대답하려다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챘다.

장군의 이 호칭에는 너무 많은 의미가 있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육장봉은 육일을 힐끗 보았다.

이 마차에는 최씨 가문의 표지가 너무 눈에 띄게 붙여져 있었다. 이 마차가 하루에 여러 차례 월씨 저택을 드나들면, 사람들은 월령안과 최일 사이에 무슨 일이 있다고 여길 게 뻔했다.

이것만 아니라면, 육일을 보낼 필요 없이 육장봉 자신이 갔을 것이다.

육일은 흠칫 떨고는 높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바로 마님을 뵈러 가겠습니다.”

“좋다.”

육장봉은 육일을 칭찬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마차로 걸어갔다. 육일은 홀로 황궁 입구에 서서 낙담했다.

‘마님이라고? 그렇게 부를 수야 있지. 문제는 월 낭자가 그 호칭을 받아 줄까?’

* * *

육일이 만나기를 청한다는 집사의 말에, 월령안은 하마터면 폭발할 뻔했다.

‘육장봉은 도대체 뭐 하려는 거야? 조금 전에 헤어졌잖아? 왜 또 호위병을 파견한 거야?

난 지금 그 이름만 들어도 짜증이 나 죽겠는데, 도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인간이야? 자기가 먼저 날 내친 주제에 왜 자꾸 날 건드리는 거야?

그리고…… 꼬마 아가씨라니, 자기가 날 그렇게 부를 자격이 있냔 말이야? 왜 이렇게 자기 주제 파악을 못 하지? 우리처럼 이혼한 부부는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모르나?’

“지겨워 죽겠네!”

육장봉을 떠올리자,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 표현하기 힘든 괴로움과 초조함에 휩싸였다.

괴로움은 조금 전, 그녀가 육장봉 앞에서 너무 실망스럽게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번 그런 상황이 된다면, 그때는 육장봉의 미모에 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초조함은 육장봉이 일이 있든 없든 그녀의 눈앞에 나타나는 데다가, 또한 미모로 그녀를 유혹하기 때문이었다.

‘너무하는 거 아냐!’

이제 그녀는 강하게 의심하기 시작했다. 육십이가 그날 저택 대문을 지키면서 사람들에게 했던 오해를 살 만한 말은 육장봉이 가르쳐 준 것일지도 모른다.

‘육장봉, 정말이지 늑대같이 지독한 놈이야!’

“육장봉, 그 인간 진짜 짜증 나 죽겠네. 지금처럼 그놈이 이렇게 미웠던 적이 없어. 그놈을 건드린 게 이렇게 후회된 적도 없다고.”

월령안은 욕이 절로 나올 만큼 화가 났다.

하지만 불만은 이 정도로 끝내야 했다. 월령안은 육일을 홀대하는 대신 당장 모시라고 분부했다.

어쨌든 육일 역시 조정의 관리였다. 그녀로서는 홀대할 수 없는 상대였다.

“마님을 뵙습니다.”

육일은 오는 내내 장군의 마음이 너무 빨리 변했다고 투덜댔다.

‘얼마나 지났다고 월 낭자가 다시 마님이 돼?’

그래서 월령안을 보자, 육일은 아무 생각 없이 예를 올리며 큰 목소리로 ‘마님’을 외쳤다.

월령안의 입꼬리가 살짝 실룩였다. 그녀는 육일에게 예를 올리려다가 몸을 굳히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육일 장군, 제 성은 월씨입니다. 사람을 잘못 찾으셨네요!”

“큼큼……. 월 낭자, 결례를 범했습니다.”

육일은 그제야 자신이 뭐라고 했는지 깨달았다. 얼굴에 겸연쩍은 기색이 스쳤다. 동시에 마음속으로는 역시나 월 낭자는 그 호칭을 원하지 않음을 확신했다.

‘이 일을 장군께 알려 드려야 하나?’

교외의 군영에서 피땀을 흘리고 있는 육십이를 떠올리자, 육일은 이 생각을 묵묵히 포기했다.

‘육십이처럼 바보짓 때문에 죽을 수는 없지.’

“육일 장군, 아닙니다. 육일 장군께서 무슨 중요한 일로 오셨는지요?”

월령안은 육일과 친분을 쌓을 생각이 없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장군께서 막 황궁에서 나오셨는데, 청희 장공주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장군께서는 청희 장공주의 목표가 월 낭자라고 의심하셨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저를 보내 월 낭자께 미리 준비하라는 말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마님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지만, 육일은 대단히 공손한 말투를 썼다. 완전히 월령안을 주인으로 모시고 공경하는 모습이었다.

월령안은 이제 얼굴의 미소를 거의 유지할 수가 없었다. 육장봉의 부하가 너무 티가 나게 행동하는 바람에,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월 낭자?”

육일은 한참 동안 말했지만, 월령안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그녀는 거의 절망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육일은 잠깐 생각을 가다듬고 말했다.

“월 낭자,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장군께서 계시니 힘든 일을 당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월령안은 더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육일 장군, 오시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저 대신 장군께 감사드린다고 전해 주세요.”

‘그리고 육장봉은 좀 멀리 꺼져 주셨으면 좋겠네요. 다른 일로 육장봉을 번거롭게 하지 않을 테니까요.’

이제는 정말 육장봉이 무서웠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육일은 예를 올리고 공손히 물러갔다.

조정의 품급을 가진 장군이 자기 앞에서 하인처럼 깍듯이 공경하는 모습이라니. 월령안은 그만 이마를 짚고 말았다.

그녀도 더는 자신을 속일 수가 없었다.

육장봉의 행동은 너무 노골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절망적이고 맹목적인 사랑에서 이제 가까스로 빠져나온 참이었다. 그런데 육장봉이 또다시 그녀를 유혹하기 시작했다.

‘저 유혹에 넘어가서, 만약 내가 다시 연정을 품게 되는 날에는 누구를 찾아가 내 마음을 돌려내라고 해야 할까? 우리 둘은 이뤄질 수 없는 사이라는 걸 분명 알면서도 날 건드리다니. 그러고도 사내대장부야?!’

“아아악! 짜증 나 죽겠어!”

월령안은 화가 나서 비명을 질렀다.

“아가씨, 아가씨……. 괜찮으세요?”

문밖에서 명령을 대기하던 하인이 깜짝 놀라 물었다.

“나는, 아주, 멀쩡해!”

월령안은 이를 악물었다. 격렬하게 숨을 두어 번 내뱉고서 말했다.

“마차를 준비해라. 명월산장에 가야겠다.”

지금 너무 혼란스러웠다. 노인과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육일이 말한 일도 손불사에게 미리 귀띔해야 했다.

청희 장공주의 꾀병이 그녀를 노리는 거라면, 문제는 손불사에게 있었다.

그녀는 육장봉이 무슨 꿍꿍이속을 품고 있는지는 신경 쓰지 말자 되뇌었다. 일부러 육일을 보내 귀띔해 준 걸 보면 이유 없는 행동은 아닐 것이다.

* * *

월령안은 그날 오후 마차를 타고 성을 나섰다.

그녀가 성을 나서자, 육장봉, 조계안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장씨 가문에서도 그 소식을 알게 되었다.

장 부승상은 공수하고 서 있는 장소산에게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월령안과 최일이 손을 잡았구나. 그 여인이 설씨 가문을 돕지 못하게 지켜보고 발목을 잡아라. 만일 월령안이 수작을 부렸는데 너희가 막지 못하거든, 내가 직접 만나 이야기하겠다고 전해라.”

“할아버지, 우리 가문에서…… 일개 여자 상인에게 고개를 숙여야 합니까?”

장소산은 그 말을 듣자, 마음이 몹시 불쾌해졌다.

육장봉에게 체면을 구긴 것은 인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월령안이 뭔데, 장씨 가문에서 고개를 숙이라는 말인가.

“너는 아직도 월령안이 평범한 여자 상인이라고만 생각하느냐? 육장봉이 평범한 상인을 대신해 분풀이를 하러 나서겠느냐?”

장 부승상은 실망한 표정으로 장소산을 바라보았다.

“내가 일찍 너희에게 말했잖느냐. 지금 이 시기에는 월령안을 건드리지 말라고 말이다. 그런데 너는 어떻게 했느냐? 정말 실망스럽구나.”

“할아버지…….”

장소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서둘러 할아버지에게 해명하려고 했으나, 할 말이 없었다.

“네 증조모나 원아 같은 아이들이야 여인이라서 바깥일도 모르고, 우리 가문의 어려움도 모른다고 치자. 그런데 어찌 너마저 그러느냐.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느냐.”

장 부승상은 먹구름이 낀 얼굴로 유난히 엄숙하게 말했다.

“지금 우리 장씨 가문은 모든 일에 자세를 낮춰야 한단 말이다. 알겠느냐?”

장소산은 감히 변명하지 못하고 털썩 무릎을 꿇었다.

“할아버님, 벌을 내려 주십시오.”

“조상님의 위패 앞에서 무릎을 꿇어라. 무얼 잘못했는지 깨달을 때까지는 일어나지 마라.”

장 부승상은 눈을 감고 무표정하게 말했다.

“예, 할아버지.”

장소산은 참담한 표정으로 밖으로 물러갔다.

그가 떠나간 뒤, 장 부승상은 천천히 눈을 뜨고 탄식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서재에 대고 말했다.

“다섯째, 그놈은 아직도 말썽이냐?”

“승상 나리, 오공자는 부인과 함께 계십니다.”

회색 옷을 입은 늙은 하인이 어두운 곳에서 걸어 나와 한담하듯 말했다.

“어휴, 다섯째 그 애는……. 언제쯤이면 생각이 트일지 모르겠구나.”

장 부승상은 눈꺼풀을 내렸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정정함이 한순간에 절반이 넘게 꺾였다.

남들이 보기에 장씨 가문은 하늘 높이 떠 있는 해처럼 명성이 대단했다. 하지만 장 부승상은 그의 가문이 이미 내리막길에 들어섰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내리막길은 남의 핍박 때문이 아니었다. 장씨 가문 자체의 문제 때문이었다.

장씨 가문에는 뒤를 이을 만한 인재가 없었다.

아들들은 그만한 그릇이 안 되어 손자를 키우려 했다. 하지만 그중에서 쓸 만한 놈은 장 부승상과 뜻이 달랐다.

쓸 만한 후손이 없다 보니, 아무리 명성이 대단해도 소용이 없었다.

“오공자께서도 조만간 철이 드시겠지요.”

회색 옷차림의 늙은 하인은 망설임 없이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장 부승상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총명한 사람일수록 생각이 외길로 빠지기 쉽고, 그 생각에서 쉽게 빠져나오지도 못한다.

이 점에 대해 장 부승상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모든 자손 중에서 그를 가장 많이 닮은 이는 다섯째 손자였기 때문이다.

“내가 떠난 뒤에 그 아이가 장씨 가문을 맡아 주면 좋으련만.”

장 부승상은 깊게 탄식했다.

한동안 서재 안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 * *

월령안은 때를 맞추지 못했다. 그녀가 명월산장에 도착했을 때, 노인은 약욕(藥浴)을 하는 중이라 만날 수가 없었다.

당장 노인에게 쏟아 놓고 싶은 말이 태산 같았지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월령안은 하는 수 없이 약왕 손불사를 먼저 찾아갔다. 청희 장공주가 앓아누웠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말해 주었다.

손불사는 듣자마자 냉소를 지었다.

“나와 무슨 상관이냐? 나는 고관대작은 치료하지 않거든. 나한테 그런 말은 하지도 마라. 듣기도 싫으니까.”

“청희 장공주는 당신이 치료하지 않는 거를 알고 기어코 당신더러 치료하라고 하는 거예요. 아니면 왜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하필 이때 앓아누웠겠느냐고요?”

명월산장으로 오는 동안, 그녀도 생각 끝에 청희 장공주의 의도를 깨달았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나와 무슨 상관이냐?”

손불사가 험상궂은 얼굴로 월령안을 흘겨보았다.

“당연히 제가 알아서 할 일인 거는 알죠. 그냥 혹시나 해서 묻는 거예요. 복수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세요? 그 고관대작을 한번 혼내 줄 생각은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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