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화 전생에 빚이라도 졌나
황제는 깜짝 놀라 멍해졌다. 심지어 얼굴의 분노를 거두어들일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이때, 황제보다 더욱 놀라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 장씨 가문의 그 여자는 배 속에 남의 씨가 있는 데도 네게 시집가려 했단 말이야?”
뒤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육장봉은 목소리만 듣고도 조계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난각에 들어선 조계안은 고소하다는 듯이 파안대소했다.
“육장봉, 너도 참 운이 좋구나. 어쩜 그런 사람만 골라 만날까.”
그는 말을 마치고 황제에게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황형, 장봉이에게 참 잘해 주십니다. 그런 신붓감을 한 번으로도 모자라 다시 한번 골라주시다니요. 장봉이가 한 번 당한 거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조계안, 입 다물어라!”
황제는 정신이 확 돌아왔다. 부끄러운 나머지 화가 나서 조계안에게 호통쳤다.
조계안은 어깨를 으쓱하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제게 화를 내서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능력이 있으면 장봉이에게 화를 내시지요. 어명을 내려 장봉이에게 장씨 가문의 그분을 맞아들이고 그냥 애 아버지 노릇이나 하라고 하세요.”
황제는 조계안을 사납게 쏘아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얼굴에는 어찌할 바를 몰라 어색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봉아, 장 낭자가 어찌했단 말이냐?”
“폐하께서 들으신 대로, 장 낭자는 외사촌 오라비와 정을 통해 혼례를 치르기도 전에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외사촌 오라비가 죽자, 바로 그 아이를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폐하의 말씀에 따라 저에게 시집오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육장봉은 냉랭한 표정으로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말했다.
황제는 속이 껄끄러워져 육장봉을 보기가 부끄러웠다.
“당당한 명문가의 귀족 여인이 어찌…… 정말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육장봉에게 억지로 장씨 가문 딸을 맞아들이게 할 뻔했던 사실을 떠올리자, 황제의 얼굴에 자책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는 미안해하며 말했다.
“장봉아, 장 낭자의 일을 짐이 전혀 몰랐다. 짐이 알았더라면 절대 그런 여인을 골르지 않았을 것이다.”
“괜찮습니다. 이게 처음도 아니니까요. 신은 익숙해졌습니다.”
육장봉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황제는 아차 싶어 연신 약속했다.
“장봉아, 이 일은 짐의 실수다. 걱정하지 마라. 짐이 너에게 제대로 보상하마. 절대 네가 손해 보게 하지 않으마.”
“황형, 그만 하세요. 장봉이에게는 황형의 보상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앞으로 장봉이 일에 참견하지 마세요. 장봉이에게 어머니가 안 계신 것도 아닌데, 굳이 황형이 장봉이의 종신대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조계안이 황제를 노려보았다.
“입 다물라니까.”
황제도 조계안을 마주 노려봤다.
조계안은 못 본 척했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며 데면데면하게 말했다.
“청희 장공주가 병들었는데 영녕후부의 의원이 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답니다. 감시하는 사람이 자기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며 보고를 올렸습니다. 황형께서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진짜 병든 거냐, 아니면 병든 척하는 거냐?”
황제는 속으로 한시름 놓았다. 장씨 가문 이야기는 전혀 하고 싶지 않던 참이었다. 차라리 극도로 혐오하는 청희 장공주의 이야기를 듣는 게 나았다. 이러면 적어도 화제를 바꿀 수는 있었다.
만약 육장봉이 황제의 강요에 못 이겨 장소원을 맞아들였더라면, 정말이지 육장봉도, 현음 고모도 볼 면목이 없을 뻔했다.
‘장씨 가문에서 감히 나를 농락하다니. 기억해 둘 것이다! 장 부승상! 황제를 속이다니, 두렵지도 않은가?’
황제의 늘 부드럽기만 하던 눈에 음침하고 차가운 살의가 눈 깜짝할 사이에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육장봉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폐하께서 드디어 이빨을 드러내셨군. 살짝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너무 늦지는 않은 셈이야.’
황제는 어디까지나 황제다. 신하로서 불만을 말할 수는 있더라도, 황제의 체면을 짓밟을 수는 없었다.
육장봉은 황제가 장 부승상, 장씨 가문에 불만이 생겼음을 알아챘다. 여기서 계속 말하면 황제의 체면이 손상된다. 그뿐만 아니라 황제가 정말로 장씨 가문을 손본다고 하더라도, 일이 다 끝난 다음에는 육장봉의 말 때문에 그랬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신하가 제왕을 조정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안 될 일이었다.
그리고 조계안이 때마침 입궁했다. 그가 서둘러 입궁한 이유가 청희 장공주의 병 때문은 아닐 것이다.
청희 장공주가 하필이면 이때 병이 난 게 확실히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조계안이 그 일 때문에 일부러 황제를 만나러 입궁할 정도는 아니었다.
조계안은 그와 황제를 화해시키러 온 게 분명했다.
육장봉으로서도 조계안의 체면은 봐주어야 했다.
조계안은 황제를 외면한 채 육장봉 쪽을 힐끗 보았다. 남의 불행을 대단히 기뻐하는 눈빛이었다.
“육 대…….”
“계안, 짐이 묻지 않느냐?”
황제는 조계안이 또 장씨 가문에 대한 일을 꺼낼까 두려워 몰래 경고의 눈길을 보냈다. 더는 말썽을 부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황제의 체면이 장씨 가문 때문에 완전히 구겨졌다. 되돌릴 수만 있다면 장씨 가문의 일은 처음부터 없었던 일로 하고 싶을 정도였다.
육장봉을 비웃지 못하게 되자, 조계안은 무척 언짢았다. 어조에도 짜증이 묻어났다.
“물을 게 뭐 있습니까? 그분이 진짜로 앓든, 가짜로 앓든 그게 중요합니까? 하여간 앓아누웠다는데요. 황형이 어의를 보내어 치료하지 않으면, 황제가 윗사람을 안중에 두지 않고 아버지를 잃은 그분을 멸시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질 것입니다.
만약 어의를 보낸다고 하더라도, 그 병은 고치지 못할 겁니다. 그분은 또다시 황형을 괴롭히고, 황형의 한계를 계속 시험할 것입니다.”
황제도 화가 나서 퉁명스럽게 물었다.
“황성사 수습은 다 되어 가느냐?”
‘요즘 왜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지?’
소 승상만이 그의 뜻에 따라 스스로 사직했다. 하지만 소 승상이 사직하고 나자, 일은 되려 더 복잡해졌다.
“그냥 그렇죠, 뭐.”
황제가 말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조계안은 그 말을 듣자 속이 답답해졌다.
‘내가 왜 황성사라는 골칫거리를 맡았을까? 전생에 정말 육장봉에게 빚이라도 졌나.’
조계안은 육장봉을 사납게 흘겨보았다.
육장봉은 조계안에게 냉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얼굴을 보니 ‘유치하다’라고 생각하는 게 뻔했다.
“그냥 그런 게 뭐냐? 이렇게 여러 날을 허비했는데도 전혀 진전이 없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장씨 가문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황제는 이미 언짢은 상태였다. 그런데 청희 장공주 쪽에서도 또 무슨 일이 생겼다가는, 치솟는 화를 주체하지 못할 것 같았다. 일단 사람들부터 죽이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자고 할 지도 몰랐다.
“이십 년 동안 거의 폐지되다시피 했던 황성사를 제가 어떻게 며칠 내에 깨끗하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까? 황형, 전 신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제가 잘 못 하는 것 같으면, 저 대신 유능한 사람을 찾아보시죠.”
조계안은 두 손을 벌려 보이며 건들거렸다.
“너…….”
황제는 화를 참기 힘든 상태였다. 하지만 조계안의 말이 논리적으로 틀리지 않아서, 그저 성난 말투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됐다. 청희 장공주 쪽은 짐이 어의를 보내도록 하겠다. 그분이 너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잘 보살피게 하마.”
“황형께서 그리 말씀하셨으니, 이 아우는 걱정하지 않겠습니다.”
조계안은 긴 다리를 거두고 훌쩍 뛰어 일어났다. 그리고 옷매무새를 가다듬더니 정색하며 말했다.
“이 아우의 보고는 끝났습니다. 황형께서는 또 다른 일이 있습니까? 없으시다면 이 아우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래. 꺼져라, 꺼져!”
황제는 여기까지 듣자 조계안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조계안이 서둘러 입궁한 것은 청희 장공주의 일을 보고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황제가 육장봉을 불러들였다는 소식을 듣자, 둘이 다툴까 봐 걱정한 것이다.
비록 조계안의 건들거리는 모습에 심란해지기는 했지만, 황제는 그래도 기분이 좋아졌다. 얼굴에 저도 모르게 웃음기가 떠올랐다.
조계안은 황제를 외면하고 고개를 돌렸다. 육장봉에게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같이 갈까?”
육장봉은 일어나서 황제에게 인사를 올렸다.
“폐하, 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조계안은 황제를 최대한 배려해 준 셈이었다.
황제는 조계안이 입궁한 것은 자신을 곤경에서 구해 주기 위해서라고 여겼다.
하지만 육장봉은 조계안의 진짜 의도를 알고 있었다. 조계안은 이러다가 육장봉이 황제에게서 마음이 떠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황제는 조계안의 마음을 모를 것이고,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다.
높은 곳에 군림하는 천자는 아랫사람들이 감히 자신에게 불만을 가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법이다.
육장봉과 조계안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황궁 밖으로 함께 걸어 나갔다. 대전을 나서자마자, 조계안은 제멋대로 구는 도련님 같은 모습을 거두어들이고 엄숙하게 말했다.
“황형은 장소원의 일에 대해서는 정말 몰라. 아니, 나도 몰랐어. 그러니 황형을 탓하지 마.”
“응.”
육장봉은 외마디로 대답했다.
“장 부승상의 배후에는 너무 큰 세력이 얽혀 있어. 그래서 황형은 승상 자리를 내주지 않으려는 거야. 하지만 강남 사건은 장 부승상이 한몫했음이 분명한데도, 황형은 아랫사람들을 냉대할 수가 없어. 봐. 황형이 장 부승상을 잠시 냉대한 사이에, 그자는 청주와 관련이 있는 월 삼낭을 집으로 끌어들였잖아. 황형도 부담이 클 거야.”
조계안은 황제가 이번에는 정말로 육장봉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것은 어렵지만, 아프게 하는 것은 한순간이다.
“응.”
육장봉은 대답 한마디로 자신이 듣고 있음을 증명했다. 그러나 더는 별다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조계안은 당근도 채찍도 통하지 않는 육장봉의 모습에 화가 치밀었다.
“됐다. 됐어. 나도 말하기 귀찮다. 아무튼, 사실은 이런 상황이었어. 나도 둘의 일에 더는 상관하지 않을 거야. 당사자들이 좋으면 그만이지.”
조계안은 고개를 돌리고 가 버리려고 했다. 겨우 두 걸음을 내디뎠을까. 육장봉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청희 장공주의 병은 아마 월령안이 목적일 거다.”
조계안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말했다.
“손불사?”
“응.”
청희 장공주는 이미 한 번 큰 좌절을 겪었다. 그러니 또 경거망동하다가 자신의 야심을 들킬까 봐 황제나 그들에게는 손을 댈 엄두를 못 냈다.
하지만 월령안에게 골칫거리를 만들어 주는 것쯤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되는 일이었다.
조계안은 육장봉을 흘겨보았다.
“넌 ‘응’ 말고, 다른 말은 할 줄 몰라?”
육장봉은 조계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얇은 입술을 살짝 벌리더니 싸늘하게 한마디 내뱉었다.
“꺼져!”
조계안은 울화통을 터뜨렸다.
“육장봉, 내게 부탁하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게 좋을 거다. 네가 나를 필요로 할 때가 오면 나는 멀리멀리 꺼진 다음 절대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응.”
육장봉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직 멀리 꺼지지 전이니까, 폐하께 가서 전해라.”
육장봉은 말을 마치자 고개도 돌리지 않고 긴 다리를 놀려 성큼성큼 떠나갔다. 조계안에게는 위풍당당하고 용맹스러운 뒷모습만 남겨 주었을 뿐이다.
“내가 전생에 정말로 너에게 빚을 졌나 보다.”
조계안은 이를 갈았다. 씩씩거리며 몸을 돌리더니 다시 난각에 있는 황제를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