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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309)화 (309/1,004)

309화 봉관이 불러온 화

최일이 월령안에게 함께 떠나자고 권한 이유는 장씨 가문을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그와 육장봉이 없는 틈을 타 월령안에게 마수를 뻗칠까 걱정되었다.

몰래 그들을 밀행하던 사람이 월 삼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최일은 더 걱정하지 않았다. 그래도 육장봉과 월령안을 다루에 초대했다.

이 다루는 최씨 가문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주변 환경이 조용할 뿐만 아니라 마차가 다루 뒤편의 작은 뜰로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작은 뜰의 문이 닫히면 외부와 격리되어 아무도 방해하지 못했다. 마차에서 누가 내렸는지 외부인은 알 수 없게 한 것이다.

“여기는 정말 좋은 곳이군요. 여백의 미가 아주 아름다워요. 떠들썩한 곳에서 이런 조용한 곳을 찾긴 쉽지 않죠.”

최일이 데리고 오지 않았다면, 월령안도 변경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을 것이다.

월령안은 회랑을 따라 느릿느릿 앞으로 나아갔다. 회랑 밖의 해당화 나무와 해당화 나무 앞의 연못, 그리고 근처에 있는 이 계절에도 여전히 활짝 핀 매화를 보았다. 기분이 한결 상쾌해졌다.

아름다운 사물은 사람의 마음을 느긋하게 만들어 주는 법이다. 미남도, 아름다운 풍경도 마찬가지였다.

“월 낭자가 좋아하시면 나중에…….”

육장봉은 담담하게 최일의 말을 잘랐다.

“땅문서를 장군부에 가져다 놓게. 이곳은 내 마음에 드니까.”

최일은 순간 기가 막혔지만, 곧 웃고 말았다.

“그럼 육 대장군께 감사드립니다. 저의 가문 장사까지 배려해 주시는군요.”

‘집안 말아먹는 방탕한 놈이나 자기 집 재산을 파는 줄 알았는데, 나 최일이 방탕아가 될 줄은 몰랐군.’

“젊은 최 대인, 제법이군. 잔꾀가 적지 않아.”

육장봉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 부승상이 최일을 불렀던 호칭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한마디 비웃었다.

최일도 물러나지 않고 맞받아쳤다.

“육 대장군도 제법이십니다. 씀씀이가 크시군요.”

‘육장봉에게 바가지를 씌우지 못하면 내가 최일이 아니지.’

월령안은 말없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유치하기 짝이 없는 두 남자를 멀리했다.

‘육장봉이 다루를 산다고?’

월령안은 못 들은 척했다.

육장봉이 다루를 사겠다고 하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내가 좋다고 해서 사겠다고 한 건가?’였다.

물론, 이런 생각이 떠오른 순간, 그녀는 바로 그 생각을 멀리 날려 버렸다.

육장봉이 왜 이 다루를 사려고 하는지는 그녀와 상관없었다. 어차피 앞으로 이곳에 다시 오지 않을 테니까.

사람을 데리고 다루에 한 번 왔을 뿐인데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에게 다루를 내놓아야 한다. 이런 일이 생긴다면 대부분은 불쾌해할 것이다.

그러나 최일에게 있어서는 전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의 마음에 드는 곳이긴 했지만, 고작 다루 한 채일 뿐이었다. 최씨 가문은 이런 곳을 적지 않게 가지고 있었다.

최일은 육장봉과 서로 한두 마디 조롱을 주고받은 뒤, 두 사람을 별실로 데리고 갔다.

별실 창밖에는 해당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활짝 피어난 꽃송이가 가지를 방 안까지 뻗고 있어, 아담한 별실에 이채를 더했다.

별실에는 모든 다구가 다 갖추어져 있었다. 최일은 다박사(茶博士 – 찻집의 종업원)를 내보내고 자신이 탁자 앞에 꿇어앉아 두 사람을 위해 직접 차를 우렸다.

검은 옷차림의 최일이 배나무로 된 탁자 앞에 꿇어앉은 모습은 고상하고 우아했다.

최일은 손목을 가볍게 들어 한쪽에 있는 은주전자를 잡고서 물을 은사발에 부어 다구를 뜨거운 물로 헹궜다.

끓는 찻물이 은주전자의 작은 입구에서 흘러나왔다. 아스라한 흰 연기가 최일의 얼굴 앞에 어른거리며 그에게 신비롭고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더해 주었다.

탁자 앞에 꿇어앉은 그는 진지하게 집중하는 표정이었다. 반면 눈빛은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준수한 얼굴과 손에 든 맑은 하늘색 다구가 조화를 이루어, 동작 하나하나가 그림 같았다.

최일이 차를 우리는 모습은 마음대로 흐르는 물같이 자연스러웠다. 분명 남들과 똑같은 동작이지만, 최일이 하니 더욱 자연스럽고 남다른 운치가 있어 보였다. 누구든 보면 눈을 떼지 못하고 흠뻑 빠져들게 할 만한 자태였다.

최일이 차를 우리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 자체가 눈 호강이었다.

월령안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조용히 아름다운 이 순간을 즐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안은 싱그러운 차향으로 가득 찼다. 조용하고 운치 있는 분위기가 황홀한 느낌을 선사했다.

“마실 만한지, 한번 드셔 보시죠.”

최일은 차를 한 잔씩 따라 두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월령안은 양손으로 찻잔을 받았다. 먼저 수색(水色)을 보고, 향을 맡은 다음, 마지막으로 차를 음미했다.

“훌륭한 차, 훌륭한 물, 훌륭한 솜씨네요.”

월령안과 달리 육장봉은 찻잔을 들고 살짝 식힌 뒤, 단숨에 잔을 비웠다.

“마실 만하군.”

최일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대장군, 적어도 이 다루를 대장군께 파는 걸 후회하지 않게는 해 주셔야지요.”

“용건이 뭔가?”

육장봉은 최일에게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내 시간은 아주 귀하네.”

그는 최일이 월령안 앞에서 재능과 학식, 풍채를 과시하는 걸 보기 위해서 온 게 아니었다.

“네, 좋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죠.”

최일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차만 음미하고 있는 월령안을 흘끔 보았다. 속으로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난 차를 우려준 것뿐인데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육 대장군이 이처럼 신경 쓸 줄 알았더라면, 성 밖의 군영으로 가자고 할 걸 그랬다. 차라리 육 대장군이 무예를 뽐낼 자리를 마련해 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앞일을 알 방법은 천금을 주고도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최일은 이처럼 고상한 장소에 사람을 데려와서 속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우려낸 차가 은근히 아까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육 대장군의 체면을 봐서 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두 분은 장씨 가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월령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아마 아무것도 모를 거예요.”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얘기하게.”

아까까지만 해도 시간이 아깝다던 육 대장군이 이제는 서두르지 말라고 말했다.

최일은 이젠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장씨 가문 여인들이 왜 월 낭자를 싫어하는지부터 말하지요.”

“대장군께서 장 낭자를 맞아들이지 않겠다고, 혼사를 거부했기 때문만이 아닌가요?”

월령안의 눈은 의혹으로 가득 찼다.

육장봉은 눈살을 찌푸리며 아무 말이 없었다.

역시 그날 황제에게 너무 예의를 차리며 말한 모양이다. 아무래도 다시 한번 입궁해야 할 듯했다.

“그건 그 이유 중 하나일 뿐이에요. 가장 큰 원인은 역시 월 낭자가 삼 년 전 혼례 날 쓴 봉관(鳳冠) 때문입니다.”

최일은 여기까지 말하더니, 저도 모르게 동정 어린 눈으로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월령안은 정말 무고했다. 그냥 돈이 많았던 것뿐인데, 남의 눈 밖에 나게 되었다.

“제가 그날 쓴 봉관이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월령안은 의아해서 물었다.

‘봉관이라…….’

육장봉은 눈이 어두워지며 아쉬움이 스쳤다.

그는 월령안이 봉관을 쓰고 혼례복을 입은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말하고 보니 우스운 일이었다. 월령안이 봉관을 쓰고 혼례복을 입은 건 그에게 시집가기 위해서였지만, 정작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육장봉은 스스로 차 한 잔을 따라 묵묵히 마셨다. 차 맛이 씁쓰레했다.

최일은 그 모습을 흘끔 쳐다보았다. 눈에 은근한 웃음기가 스쳐 지나갔다.

‘육 대장군에게도 이런 날이 다 있군.’

육장봉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더니, 최일을 차갑게 쏘아보았다.

최일은 곧바로 단정하게 앉아 엄숙하게 말했다.

“그날 쓴 봉관 위에는 아흔아홉 개의 금빛 남주(南珠 – 해수 진주)가 있었죠? 가운데의 아홉 개는 모두 비둘기알만 한 크기였고요. 맞나요?”

월령안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틀림없어요.”

그녀는 그 봉관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모조리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와 육장봉의 혼사는 매우 서둘러 정해졌다. 혼사를 정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바로 혼례 날이 되었다.

그래서 혼례를 준비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혼례복마저도 서둘러 만들었다.

그 봉관은 그 짧은 시간 안에 만들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었다. 일생에 한 번뿐인 혼례인데, 신랑 없이 올리는 식이라도 아쉬움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최일은 그녀의 봉관 때문에 트집이 잡혔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도대체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월령안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장씨 가문 사람 중 혹시 누가 그 구슬을 마음에 들어 했나요? 하지만 저한테 팔라고 찾아온 사람은 없었는데요? 그걸 장씨 가문에 선물하라고 눈치를 준 사람도 없고요.”

장씨 가문에서 사겠다고 했다면 기꺼이 팔았을 것이다. 아니, 그것을 살 의향이 있고, 제시한 가격이 합당하면 누구에게나 팔 수 있었다.

고작 구슬 한 더미인데, 그녀가 그걸 다시 쓸 것도 아니었다. 구석에 처박아 놓고 먼지나 뒤집어쓰게 할 거면 차라리 파는 게 나았다.

월령안이 어이없어하자, 최일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월 낭자의 봉관에 달린 남주 때문에 벌어진 일인 것은 분명하지만, 정작 월 낭자와는 크게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어찌 보면 월 낭자도 애매하게 연루된 거지요.”

최일은 일의 발단을 떠올리자, 마음이 답답하여 쓴웃음을 지었다.

“장씨 가문의 큰 아가씨인 장소원이 그 남주를 마음에 들어 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아가씨 자존심에 어떻게 월 낭자가 쓰던 것을 쓸 수 있겠나요? 반드시 월 낭자보다 더 좋은 걸 써야 하죠."

월령안은 안하무인이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확실히 거만해서 사람에게 눈길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장소원은 설씨 가문의 외아들 설지화(薛之華)와 사통하여 임신까지 했습니다. 설지화는 서둘러 강남으로 가서 예물을 준비해 장소원을 맞아들여야만 했습니다.

장소원은 설지화에게 자기가 시집가는 날 쓸 봉관에는 금색 남주를 박아야 하고, 모든 알이 월 낭자 것보다 더 커야 한다는 요구했습니다.

장소원은 임신한 상태였고, 설지화는 그녀를 깊이 사랑했거든요. 당연히 그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죠. 바로 승낙하고 남주를 사러 남도(南島)로 갔습니다.

그런데 설지화가 남도에 도착한 뒤, 어찌 된 영문인지 남도의 사람들과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남도에 감금당하게 되었고, 설씨 가문에서는 몸값을 내고 설지화를 데려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설씨 가문 사람이 큰돈을 모아서 들고 갔건만, 돌아온 건 시체 한 구뿐이었습니다.

설지화가 비명횡사하고, 설씨 가문과 남도 사람들은 다시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그 결과 설씨 가문에서는 막대한 손실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설씨 가문은 그래도 이성적이었죠. 장소원이 설지화의 핏줄을 임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아무리 화가 나도 장소원과 장씨 가문을 탓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최일은 여기까지 말하고서는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설지화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장소원은 설지화의 핏줄을 재빨리 지워 버렸습니다. 설씨 가문은 삼대독자로, 남은 핏줄이라고는 설지화 하나뿐이었어요. 장소원 배 속의 아이는 설씨 가문의 유일한 희망이었죠. 그런데 장소원은 설씨 가문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 아이를 지운 거예요.

그 소식을 접한 설씨 가문은 장씨 가문을 미워하게 되었고, 두 가문 사이는 틀어졌습니다. 설씨 가문에서는 그 바람에 유일한 아들을 잃었으니 장씨 가문과는 철저하게 원수지간이 될 수밖에요.

장소원은 규수로서의 명예에도 손상이 갔고, 아이를 지우느라 몸도 상했습니다.

장씨 가문의 여인들은 이 모든 게 월 낭자의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 월 낭자의 봉관이 불러온 화라고 생각하는 거죠. 만약 그 봉관이 너무 훌륭하지 않았더라면, 장소원이 삼 년 동안이나 기억하지 않았을 거고, 그 뒤의 사건도 전혀 발생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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