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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307)화 (307/1,004)

307화 이 자리가 아주 좋습니다

육장봉은 장소산이 놀라 실금할 뻔하게 만든 것도 모자라, 냉랭하게 손을 들었다.

“가서 장 부승상을 불러오너라. 도대체 장씨 가문에서는 어찌 손님을 접대하는지, 내가 장 부승상에게 물어봐야겠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까 장씨 가문을 두려워하는 줄로 아나?’

장소산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육장봉의 말을 듣고는 다리를 떨면서도 이를 악물었다.

“대장군, 이번 일은 저희 장씨 가문에서 결례를 범했습니다.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지금 당장 월…… 월 낭자의 자리를 바꿔 드리고, 다시 월 낭자께 사과하겠습니다.”

육장봉을 동년배로 사귈 수는 없지만, 지금 그는 장씨 가문을 대표하고 있었다. 육장봉이 적어도 장씨 가문의 체면은 봐줄 거라고 생각했다.

“흥!”

육장봉이 가타부타 말하는 대신, 콧방귀를 뀌었다. 체면을 세워 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게 분명했다.

장소산은 달래는 방법이 먹히지 않자, 암암리에 위협하려 했다.

“대장군, 사람 일이란 게 여지를 남겨 두어야 앞으로도 다시 얼굴을 볼 게 아닙니까. 월 낭자도 변경에서 지내셔야 하지 않습니까?”

이 일로 그의 조부를 놀라게 했다가는, 육장봉도 이득을 보지는 못할 것이다.

“그 말은 나도 그대로 돌려주지.”

육장봉은 여전히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장군께서는 기다려 주십시오…….”

육장봉에게는 어떤 방법과 수단도 먹히지 않았다. 장소산은 화가 나서 품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소매를 확 떨치며 훌쩍 나가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육장봉의 기세를 정면으로 받았더니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아, 그런 멋들어진 동작을 할 수가 없었다. 간신히 몸을 가누고 돌아서는 순간 휘청거리는 바람에, 하인의 부축이 없었더라면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할 뻔했다.

장소산이 하인을 데리고 떠나 버리자, 연회청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부인과 낭자들은 육 대장군의 흉포함에 질겁했다. 모두 넋이 나간 채로 앉아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그녀들로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원래 입구에 서 있던 여종이나 나이 많은 하녀 등도 모두 몸을 굳힌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최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병풍을 가져다 가운데에 세워 놓아라.”

‘누군가 사고를 쳤으면 뒷수습이라도 빠르게 해야지. 행동이 느리군.’

“네, 네!”

장씨 가문 하인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병풍을 가지러 갔다. 아무도 이 자리에 남아 있고 싶지 않아 하는 눈치였다.

지켜보는 사람이 없자, 월령안은 그제야 입을 열어 물었다.

“우리 그만 갈까요?”

연회가 이렇게 엉망이 되었으니 더 앉아 있어도 재미가 없었다.

“두려운 게요?”

육장봉은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검은 눈망울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이 그윽했다.

“뭐가 두려워요?”

월령안은 가볍게 웃으며 되물었다.

육장봉이 무엇 때문에 왔든, 지금만큼은 그가 그녀의 편이 되어 주고, 모두의 앞에서 장씨 가문의 체면을 구겨 놓았다.

그녀는 기분이 아주 좋았다.

육장봉이 대답했다.

“장씨 가문에 밉보이는 거 말이오.”

장씨 가문은 소씨 가문과 달랐다. 장씨 가문의 세력은 더욱 크고, 관계도 더욱 복잡했다.

월령안은 또 한 번 웃었다.

“제가 장씨 가문에 밉보이지 않았더라도, 이미 수모를 당하지 않았나요?”

‘두려워한다고 피할 수 있을까?’

장씨 가문에서 딸을 육장봉에게 시집보내려 하자, 육장봉은 월령안을 방패로 삼아 혼사를 거절했다. 육장봉이 장씨 가문의 여인을 맞아들이지 않는 한, 장씨 가문은 월령안을 마냥 혐오할 것이다.

그러나 설령 육장봉이 장씨 가문 여인을 맞아들였다 하더라도, 장씨 가문은 월령안을 더욱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가풍은 막무가내였다.

명성이 드높은 장씨 가문은 딸을 육장봉의 계실(繼室)로 시집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장씨 가문의 딸을 상인 집안 딸을 같이 놓고 거론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애초에 월령안이 육장봉에게 삼 년 내에 아내를 맞아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요구를 한 게,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육장봉이 다시 귀족 여인을 맞아들일 경우, 그 여인이 이러한 점을 견디지 못하고 전처인 그녀를 눈엣가시처럼 여겨 제거하려 들까 걱정되었다.

삼 년이면 변경 사람들은 그녀를 잊을 것이다. 이 시간이면 그녀가 변경을 멀리 떠나, 다른 곳에서 세력을 키우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세상사는 한 치 앞도 모르는 법. 그녀가 아무리 주도면밀해도, 결국 운명을 이길 수는 없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소씨 가문이 바야흐로 무너져서 복수에 성공한 것도 잠시, 영문도 모른 채 장씨 가문의 비위를 거슬렀다.

‘어차피 피할 수 없으면, 아예 피하지 말자.’

* * *

결국, 장 부승상이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장소산이 간 지 일각도 되지 않아, 장 부승상은 아들 셋과 며느리 셋을 데리고 여인들의 연회청에 나타났다.

장 부승상은 병풍으로 육장봉 일행을 분리한 광경을 보고 얼굴빛이 좀 좋아졌다.

약간 문제가 생기기는 했지만, 그나마 일을 제때 처리해 명문가의 품격은 떨어뜨리지 않았다. 이만하면 웃음거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장 부승상의 며느리 셋은 연회청에 들어서자, 육장봉과 최일은 신경 쓰지 않고 여자 손님들에게 다가가 달랬다.

장 부승상은 아들 셋을 데리고 병풍 뒤의 육장봉, 최일과 월령안 세 사람에게로 걸어갔다.

“육 장군, 내가 실례했네.”

장 부승상은 깡마른 얼굴에 팔자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몸에 걸친 옷의 품이 조금 넉넉했다. 그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자, 옷자락이 휘날리며 신선처럼 초연한 기운을 제법 풍겼다.

“장 부승상, 앉으십시오.”

육장봉은 장소산에 대해서는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그래도 장 부승상은 존중해 주었다. 장 부승상이 들어오자, 아까처럼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몸을 일으켜 맞이했다.

최일과 월령안도 따라 일어서서 인사했다.

“장 부승상.”

“젊은 최 대인, 월 가주……. 이 자리에 참석해 줘서 고맙네. 어머니께서도 조금 전에 말씀하시더군. 월 가주가 아름답고 영리한 것을 보니, 어린 나이에 뛰어난 성취를 이룬 게 당연하다고.”

장 부승상은 조금 전의 비열한 사건 따위는 없었다는 듯이 엄숙하게 칭찬했다.

월령안은 옅게 웃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령안은 노부인의 칭찬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노부인이야말로 진정으로 보살 같은 분이십니다.”

‘아미타불. 보살님을 모독했네요. 보살님, 제발 저를 탓하지 말아 주세요.’

“월 가주, 겸손하구려. 어머님이 월 가주를 예뻐하시니 시간이 되면 자주 와서 어머님께 말벗이나 해 주시게.”

장 부승상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내막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진심인 줄 알 것이다.

“노부인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월령안은 웃으며 응대했지만, 요청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장씨 가문에서 먼저 이야기를 꺼내더라도, 그녀가 대답해서는 안 됐다.

만약 그녀가 승낙하고도 오지 않으면, 남들은 장씨 가문에서 그녀를 난처하게 한 게 아니라 단지 그녀가 예의를 모른다고 말할 것이다.

만약 그녀가 정말로 찾아온다면, 남들은 또 그녀가 뻔뻔스럽게 알랑거리며 아첨한다고 말할 것이다.

다행히 장 부승상도 월령안을 진심으로 초대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녀의 완곡한 거절은 신경 쓰지 않았다.

두어 마디 인사말을 주고받은 뒤, 장 부승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월 가주, 하인이 대접을 소홀히 해서 자네를 서운하게 했네그려. 내가 월 가주에게 다시 자리를 내어 주라고 하겠네.”

이게 장소산과 장 부승상의 차이였다.

장소산은 줄곧 육장봉에게 중점을 두고 있었다. 육장봉이 장씨 가문에 타협하기를 바랐기에, 당근이 먹히지 않자 채찍을 들었다.

그러면서도 월령안에게는 시종일관 신경 쓰지 않았다. 또한, 육장봉의 신분으로는 장씨 가문에 굽히고 들어갈 리가 없다는 사실도 생각하지 못했다.

반면, 장 부승상은 오자마자 곧바로 월령안을 공략했다.

물론 장 부승상이 보기에는 월령안이 세 사람 가운데서 가장 공략하기 편하고, 대처하기 쉬운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기도 했다.

그가 직접 와서 월령안을 만나고, 직접 사람을 시켜 그녀의 자리를 다시 마련해 준다면 그녀의 체면을 제대로 세워 준 셈이었다. 일개 상인인 월령안으로서는 감지덕지하며 고분고분 받아들여야 마땅했다.

그러면 당사자인 월령안이 타협했는데, 육장봉과 최일이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사실 육장봉이 아까 월령안에게 두렵지 않냐고 물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월령안은 당사자이고, 그들 세 명 가운데서 가장 약한 사람이었다.

육장봉은 간사하고 교활한 장 부승상이 반드시 월령안을 노릴 것이라고 확신했다.

만약 월령안이 두려워서 타협하겠다고 하면, 그와 최일은 장 부승상이 내주는 퇴로를 따라 물러서야만 했다. 그러나 월령안이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와 최일은 끝까지 그녀의 편이 되어 줄 것이다.

장 부승상은 일개 상인인 월령안이 자신을 거절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말을 마치자, 또 육장봉과 최일에게 말했다.

“육 장군, 젊은 최 대인……. 우리도 그만 가서 앉지.”

장 부승상이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한 순간이었다. 뜻밖에도 월령안이 그에게 읍을 하며 말했다.

“장 부승상, 천만에요. 귀댁의 접대는 완벽합니다. 이 자리가 아주 좋습니다.”

“월 가주, 이건…… 자리를 옮기지 않겠다는 말이오?”

장 부승상은 순간 멍해졌다. 표정도 순간 굳어 버렸다.

최일은 한쪽에 서서 말없이 웃기만 했다.

‘월 낭자는 과연 월 낭자답군. 한 나라의 부승상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다니. 진정 인물이네.’

그가 품위와 교양을 뒤로하고, 육장봉과 함께 여인들의 연회청 쪽으로 온 보람이 있었다.

“여기가 제 자리가 아닙니까? 또 어디를 가서 앉겠습니까? 연회가 곧 시작될 텐데 지금 자리를 옮기면 귀댁을 번거롭게 하는 것이 아닌지요. 장 부승상,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렇게 따지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 데나 앉아도 괜찮습니다.”

장 부승상의 표정이 얼마나 안 좋던지 간에, 월령안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장씨 가문에서 한 일인데, 남들은 하면 안 되나?’

“음, 여기가 괜찮습니다.”

육장봉도 자리에 앉았다.

“부승상, 바쁘실 텐데 그만 가시지요.”

“부승상, 저희는 따로 접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는 사람은 손님이고, 손님은 주인에 따라야죠. 귀댁에서 자리 배치를 세심하게 잘하셨습니다. 저희는 여기에 앉으면 됩니다.”

최일 역시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기품이 넘치는 그 모습만 보면, 아무 일도 없었던 듯싶었다.

장 부승상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하지만 다음 순간, 장 부승상은 큰 소리로 웃더니 육장봉의 옆에 앉았다.

“나도 여기가 무척 좋아 보이는구나. 여봐라……. 부인들을 온실로 모셔 꽃 구경을 하면서 식사하도록 해라.”

“아버지…….”

장 부승상의 세 아들은 중년이 다 된 나이였다. 살집이 조금 있는 평범한 외모였다. 장 부승상의 말을 듣고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이렇게 번거롭게 하다니. 모두를 피곤하게 만드는군.’

‘일개 여자 상인에게 이렇게 끌려다니다니. 소문이라도 나면 우리 장씨 가문의 체면이 깎이는 게 아닌가.’

“어서 가서 준비하지 못할까!”

장 부승상은 낯빛을 흐리며 호통을 쳤다.

“예, 아버지.”

장씨 가문의 세 아들은 감히 반박하지 못하고 서둘러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육장봉은 손을 들어 세 사람을 저지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생신 선물은 이미 드렸습니다. 승상, 이만 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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