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모조리 기억해 두겠어
“그래, 그래, 맞아. 우리 보아(寶兒) 말이 맞고말고.”
장 노부인은 빨간 옷차림의 아가씨를 품에 껴안은 채 환한 웃음을 지으며 월 삼낭에게 말했다.
“영수, 한번 따라 해 보거라. 이 노인네한테 재롱을 보여 준다고 생각하고 말이다.”
‘장씨 가문, 정말 황당하네.’
월령안은 한껏 숨을 들이쉬고 서둘러 입을 열었다.
“노부인, 제가 특별히 생신을 축하드리기 위해 보기 드문 선물을 구해 왔습니다. 부끄럽지만 제가…….”
“깜빡했네. 아직도 외부인이 있었잖아? 월 낭자는 남의 집에 손님으로 갔을 때의 예의를 모르나요? 우리 가족끼리 얘기하는데 어딜 끼어들어요?”
장씨 가문의 마님, 그 강퍅하게 생긴 부인은 거만하게 월령안을 흘겨보더니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예의라고는 하나도 없군. 보아하니 장군부에서 삼 년 동안 헛살았나 보네.”
그러더니 노부인의 발치에 꿇어앉은 월 삼낭에게 말했다.
“영수, 싫으면 물러가라. 노부인의 곁에는 시중을 들 사람이 모자라지 않는다. 그리고 네 생신 선물도 필요 없어.”
“멍! 멍! 멍!”
귓가에 월 삼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월령안은 순간 멍해져 있다가, 확 고개를 돌려 그녀의 옆에 무릎을 꿇고 있는 월 삼낭을 바라보았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그녀를 불렀다.
“셋째 언니…….”
‘셋째 언니가 미친 건가?’
월 삼낭은 월령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짖어 보였다. 그것도 모자라다고 생각했는지, 월령안이 놀란 후에도 두 번 더 짖었다.
“멍! 멍!”
“어머머, 똑 닮았네. 할머니, 진짜 개 짖는 소리 같지 않나요?”
붉은 옷을 입은 아가씨가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우리 보아가 닮았다면 닮은 거지. 여봐라, 상을 내려라.”
장 노부인은 통쾌하게 웃었지만, 월 삼낭을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
그들의 말처럼 월 삼낭은 장 노부인 옆에 있는, 기분 좋을 때 희롱할 수 있는 고양이나 강아지에 불과했다.
월령안은 얼굴에 띤 미소를 더는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월 삼낭을 바라보며 답을 얻으려고 애를 썼다.
‘셋째 언니는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하지만 월 삼낭은 그녀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노부인, 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월 삼낭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감사의 절을 올렸다.
장 노부인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길을 옮겨 월령안을 힐끗 보더니 여전히 자애로운 모습을 하였다.
“이거 보게. 나이가 들긴 들었군. 건망증이 심하다니까. 월 낭자가 아직도 여기 계신 걸 잊었군. 조(曹)씨댁, 손님과 개는 이곳에 두지 마. 어서 빨리 월 낭자를 바깥 자리로 보내게.”
“월 낭자, 이쪽으로 가시죠.”
월령안을 안내했던 여집사가 앞으로 다가오더니 자신을 따라오라고 눈짓했다.
월령안은 그녀를 바로 따라가지는 않았다. 대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장 노부인에게 읍을 했다.
“노부인, 감사합니다. 오늘에야 드디어 대대로 학자 가문인 장씨 가문의 가풍이 얼마나 대단한지 직접 보게 되었군요.”
장씨 가문 사람들은 과연 고단수였지만 더욱 역겨웠다. 막말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오만불손하게 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장씨 가문에서는 그녀가 아픔을 느낄 만큼의 타격을 주었다. 그저 월 삼낭 하나면 충분했다.
월씨 가문의 딸들은 고작 이 정도라, 그들이 희롱하고 싶은 대로 희롱할 수 있다고 소리 없이 알려준 셈이었다.
월령안의 말에 가시가 있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한 척, 장 노부인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모든 직업은 보잘것없고, 글공부해서 벼슬하는 게 최고라고 했네. 월 낭자도 앞으로 아이를 갖게 되면 꼭 글공부를 잘 시키도록 하게. 정정당당하게 과거에서 급제해야 전도가 유망하지, 그 외의 것은 전부 편법이야.”
장 노부인은 늙은 보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자애로운 웃어른이었다. 하지만 월령안은 그녀의 말에서 조롱과 경고를 읽을 수 있었다.
‘정정당당하게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아가라고? 앞으로 내 아이가 과거에 합격하더라도 장씨 가문에서는 쉽게 밀어낼 수 있다고 알려 주는 건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꼴이었다. 강남의 대사족이라더니 과연 자신감이 넘쳤다.
월령안은 웃음을 터트렸다. 다시 읍을 하고 여유를 부리며 말했다.
“어르신의 말씀 감사합니다.”
그녀는 기억해 두었다. 장 노부인, 장씨 가문을 기억해 둘 것이다.
‘강남 대사족이라고? 승상이 되고 싶다고? 그래, 모조리 기억해 두겠어!’
월령안은 얼굴의 미소를 유지했다. 눈길은 재빠르게 장씨 가문 여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이 얼굴들을 기억할 것이다. 높이 올라앉아 자신을 내려다보던 이들이 자신을 어떻게 욕보였는지 기억해 두리라.
마지막으로 그녀의 눈길은 월 삼낭의 얼굴에 닿았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얼굴을 보자, 월령안의 미소는 더욱 환해졌다.
오늘 그녀를 가장 난처하게 한 것은 장씨 가문의 모욕이 아니라, 그녀의 언니였다.
그녀의 언니는 장씨 가문의 속셈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과 함께 그녀에게 수모를 안겨주었다.
‘그러고도 월씨 가문 삼낭자라고!’
월령안은 가볍게 웃으며 여집사의 독촉이 있기도 전에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걸음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유롭고, 침착했다. 그녀가 걸음을 옮기자 치맛자락 사이에 수놓은 나비들이 날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낯짝이 참 두껍군.”
“역시 상인 가문 출신답네. 정말로 체면도 염치도 없어.”
“만약 나였더라면 그냥 벽에 머리를 박고 죽었을 거야.”
“정말 시시하네. 이런 데도 웃음이 나올까.”
등 뒤에서 장씨 가문 여인들이 분해하며 질책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월령안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점점 더 환해지고 빛났다.
‘저들은 이렇게 하면 내가 못 참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 나는 견딜 수 있어!’
그녀는 능력이 충분할 때면, 망설임 없이 적의 심장에 칼을 찔러 넣을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이 약하거나 반격할 능력이 없을 때면, 상대가 얼굴에 침을 뱉더라도 스스로 닦아낼 수 있었다.
‘나는 할 수 있어.’
월령안은 장 노부인의 처소를 나서며 웃음꽃을 피우려고 애를 썼다. 그녀를 웃음거리로 만들 기회를 절대 주지 않을 것이다.
* * *
월령안은 여집사의 안내를 받으며 연회 대청에 도착했다.
그녀의 자리는 가장 끝자락이었다. 문가와 아주 가까웠으며 주인석과는 가장 멀었다.
이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장씨 가문은 대사족이었고, 또한 장 부승상은 높은 지위에 있었다. 장 노부인의 생신 잔치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보통 신분이 아니었다.
그녀처럼 돈만 있고 신분이 없는 사람이 장씨 가문의 연회석에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장씨 가문에서는 남달리 대접한 것이었다.
“월 낭자, 이 자리입니다.”
여집사는 빈 탁자를 가리키며 그녀에게 앉게 했다.
연회청에는 큰 탁자 스무 개가 놓여 있었다. 월령안은 장 노부인의 처소에서 제법 시간을 지체했다. 그러다 보니 연회청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대부분 사람은 모두 온 뒤였다.
그래서 연회청의 탁자마다 많든 적든 모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단, 이 탁자만은 비어서 한 사람도 없었다.
그녀를 위해 일부러 준비한 것이 틀림없었다.
월령안은 가볍게 웃으며 눈 속의 냉기를 숨겼다. 망설임 없이 자리에 앉았다.
‘장씨 가문도 고작 이 정도군.’
“월 낭자, 편히 즐기십시오. 무슨 일이 있으면 아랫것들을 부르시면 됩니다.”
여집사는 여전히 웃음을 띠고 있었다. 겉으로는 아무 꼬투리도 잡을 수가 없었다.
철없는 사람이라면, 장씨 가문에서 그녀를 제대로 대접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월령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딱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여기 오기 전부터 이 연회가 즐거운 자리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미 냉대를 받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다.
장씨 가문 여인들이 역겹기는 했지만, 솔직히 이 정도는 작은 소란이었다. 고작 말로 모욕을 주었을 뿐이니까.
오히려 장 부승상처럼. 단숨에 당제, 초성의 일생을 망치는 거야말로 진정 두려운 공격이었다.
월령안은 여기까지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장씨 가문은 너무 오랫동안 높은 곳에 있다 보니,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사람을 희롱하기 시작하면 아예 개나 고양이로 취급했다.
* * *
장 노부인의 생신 잔치에는 줄곧 문관들만 참가했다. 간혹 무장도 있기는 했지만, 역시 오래된 공신이나 귀족 가문일 뿐 결코 무장들을 따로 초청하지 않았다.
장씨 가문은 무장을 무시하는 태도를 숨긴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장 노부인의 생신 잔치에 육 대장군을 초대하자, 사람들은 모두 의아해했다. 나중에 장씨 가문에서 육 대장군과 혼약을 맺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서야 그를 초청한 이유를 깨달았다.
육 대장군은 비록 무장이지만, 무장 특유의 거친 기운이 없었다. 그 기백과 풍채만 놓고 보면, 변경의 우아하고 세련된 귀족 자제들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사람들도 장씨 가문이 육 대장군을 점찍었다는 것을 의외라고 여기지 않았다.
온 변경의 백성이 다 아는 삼 년 약속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고작 삼 년이 아닌가. 대가문끼리 혼사가 이뤄지려면 절차에만 일 년이 넘게 걸렸다. 먼저 혼사를 정하고, 결혼 날짜는 천천히 선택하면 그만이었다.
장씨 가문에서는 육장봉을 중시했지만, 정작 육장봉은 그들의 체면을 세워 주지 않았다. 그는 연회가 시작되는 시간에 맞춰 장씨 가문에 도착했다.
장씨 가문 집사는 그를 복수원에 데리고 가서, 장 노부인에게 생신 축하 인사를 하도록 했다.
육장봉은 복수원에 들어가서 한 바퀴 돈 뒤, 인사말 한마디만 남기고는 장 노부인이 어찌하기도 전에 냉정하게 빠져나갔다. 장씨 가문 여인들과 도련님들은 어리둥절해 서로 바라보기만 했다.
‘말도 제대로 못 했는데 가 버리다니. 육장봉, 저 사람은 남의 체면이라곤 전혀 봐주지를 않네!’
장씨 가문 사람들은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랐다. 하나같이 얼굴의 미소를 더는 유지하지 못했다.
그래도 장 노부인은 침착했다.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저 젊은이는 과연 인재군. 우리 원아(元兒)하고 딱 어울리네.”
“언니, 봤죠……. 육 대장군은 대영웅인데다가 얼굴까지 잘생겼어요.”
병풍 뒤에서, 보아라고 불리던 붉은 옷차림의 아가씨가 옆에 있는 보라색 옷을 입은 아가씨를 툭툭 밀쳤다.
그 보라색 옷을 입은 아가씨는 입꼬리를 올리며 살짝 웃었다. 아름다운 눈은 육장봉이 떠나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 속에는 그를 얻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번쩍였다.
안타깝게도 육장봉은 고개조차 한 번도 돌리지 않았다. 여유롭게 처소를 나와 연회 대청으로 갔다.
육장봉은 월령안과 마찬가지로 장씨 가문의 연회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기품 있고 고결한 척하는 문관 무리 속에 서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호랑이가 양 떼에 들어선 듯했다. 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옆 사람들을 압도해 그들의 존재감을 지워 버렸다.
그의 옆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예의를 차려 앞으로 다가가 인사했다.
“대장군!”
“대장군, 오셨소이까.”
그러고는 모두 흩어져 버렸다. 오래지 않아 육장봉의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그를 따돌리려는 의도는 없었다. 하지만 육장봉에게는 남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