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허락하노라!
한때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목표는 조계안이 햇빛 아래를 떳떳하게 걷게 하는 것이었다.
‘언제부터 내가 변했을까?’
아니었다. 달라진 게 아니라, 그 목표를 이루었으니 또 새로운, 더욱 큰 목표가 생겼다고 해야 했다.
“아이에게는 아이의 꿈이 있고, 어른에게는 어른의 꿈이 있는 겁니다. 지금 황형에게 온종일 먹고, 마시고, 놀라고 하면 내키겠어요?”
조계안은 코맹맹이 소리로 대답하며 황제를 피해 몰래 하품을 했다.
‘졸려 죽겠네. 황형은 말을 너무 많이 해. 평소에 얼마나 심심하길래 나를 한 번 잡으면 놓아주지 않는 거야?’
“그렇긴 하지.”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서운한 듯이 탄식했다.
“짐은 오후 내내 생각했지만, 아직도 모르겠구나. 짐은 장봉이더러 아내를 맞아들이라고 했을 뿐인데 걔는 왜 짐이 목숨을 내놓으라고 한 것처럼 군단 말이냐? 만약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정실을 앉혀 놓고 좋아하는 사람을 따로 맞아들이면 될 게 아니냐. 어찌하여 아내를 고르는 것 때문에 짐이 눈치를 보게 만들어. 게다가 짐에게 앞으로 군신 사이만 있고 형제는 없다고 하다니, 이게 무슨 허튼소리냐?”
“황형, 원칙적으로는 황형의 말에 찬성합니다. 하지만 현음 고모를 잊지는 마세요.”
조계안은 무심하게 말했다.
“현음 고모와 장봉의 혼사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상관이 있다고 해도 그건 짐의 일이 아니지.”
황제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조계안은 형의 체면을 전혀 봐주지 않았다.
“현음 고모의 일생이 바로 황형처럼 제멋대로 인연을 맺어주는 황제의 손에 망쳐진 게 아니었나요?”
황제는 노하여 말했다.
“그것은 황조부의 일이다. 짐과 아무 상관도 없어!”
황제가 육장봉에게 골라 준 여인은 변경에서 가장 훌륭한 귀족 아가씨로, 그에게 충분히 어울렸다.
“다 황제가 한 일인데 뭐가 달라요?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장봉이가 원하지를 않는데, 그놈이 좋아할 것 같냐고요?”
조계안은 또다시 하품했다. 며칠 내내 잠을 자지 못한 바람에 그만 인내심을 잃고 말았다.
“황형, 하소연은 이제 끝났나요? 저 졸립니다.”
“그래, 가라, 가. 가서 잠이나 자.”
황제는 화가 나서 조계안을 힘껏 밀어내다가, 하마터면 그를 내동댕이칠 뻔했다.
조계안은 투덜거리며 잉어가 뛰어오르듯이 벌떡 일어섰다.
달빛 아래 조계안의 두 눈은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무척이나 졸리고 지친 모습이었다.
휘영청 밝은 달빛이 조계안의 차가운 눈매를 부드럽게 비춰 주었다.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음침하고 냉담한 기운이 사라지자, 그는 마치 나른한 새끼 고양이처럼 보였다. 겉으로는 쌀쌀맞아 보이면서도 상냥함을 잃지 않은 모습이었다.
조계안은 떠나기 전에 결국 황제를 돌아다보았다. 황제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지만,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자, 가볍게 탄식했다.
“황형, 장봉이의 아버지는 혼사 문제로 크게 곤란을 겪었었잖아요. 그런데 장봉이가 고분고분 황형의 말을 들을 것 같나요? 게다가 장봉이는 줄곧 주견이 뚜렷한 놈이었어요. 자기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또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고요.
장봉이의 말이 맞아요. 황형은 앞으로 그 녀석의 사적인 일에 간섭하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세요. 장봉이가 신하로서의 직책을 다하면 그걸로 충분하잖아요. 다른 건 너무 따지지 마세요.”
황제가 화가 나서 말했다.
“짐도 장봉이에게 신경을 쓰느라 그런 거야. 걔가 혼자서 외롭게 지내게 하지 않으려고 말이다.”
그에게는 그래도 계안이 있지만, 육장봉은 혼자뿐이었다. 그가 집안에서 죽으면 아무도 모를 수 있었다.
“허!”
조계안은 퉁명스럽게 콧방귀를 뀌었다.
“황형,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마십시오. 황조부처럼 어리석은 짓만 골라 해서 미움받지는 마시라고요.”
황제는 순간 기가 막혔다.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손에 잡히는 도구를 찾지 못하자, 허리춤의 옥패를 끌러서 조계안에게 냅다 던졌다.
“간덩이가 부은 게로구나! 짐이 황조부처럼 어리석다고 말하다니.”
“황제로서 어찌 도량이 그것밖에 안 됩니까?”
조계안은 훌쩍 뛰어 황제의 공격을 피했다. 황제를 등지고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자신의 궁전으로 돌아갔다.
황제는 혼자 그 자리에 앉아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에라, 모르겠다. 장봉이 싫다면 싫은 거지. 월령안을 다시 맞아들이는 것만 아니라면 누구를 맞아들여도 상관없겠지.’
* * *
하룻밤을 꼬박 새운 황제는 이튿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조회에 참석했다. 오늘 조회에 소 승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사람을 시켜 사직을 청하는 상주서를 올렸다. 몸이 불편하고, 힘이 부족해 중임을 맡을 수 없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하는 내용이었다.
황제는 줄곧 신하를 우대해 주었다. 소 승상이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설령 잘못을 범했다고 해도 원로 대신으로서의 체면을 세워줄 법했다. 두 번을 거절하고, 세 번째로 상주서를 올릴 때야 마지못해 동의하는 척해야 했다.
소 승상은 상주서를 올리기는 했지만, 지금이라면 황제가 반드시 허락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면 한동안 기다렸다가 다시 한번 사직을 청하는 상주서를 올리려 했다.
이렇게 하면 황제의 불만을 사지 않을 뿐더러, 북요의 사절단이 경성에 올 때까지 시간을 끌 수도 있었다. 그때는 많은 일을 조작할 수 있을 것이다.
뜻밖에도 황제는 소 승상의 사직을 청하는 상주서를 보자마자 대신들에게 의논할 기회조차도 주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그 귀한 입을 열어 확정을 지어버렸다.
“허락하노라!”
허락한다는 말 한마디로, 황제는 소 승상의 사직을 받아들였다.
단 한 번만에 떨어진 허락이었다. 만류하는 말 한마디도 없었다. 불허 따위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황제의 말을 듣자 모든 대신은 말을 잃었다.
그들은 내막에 대해 일반인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다. 춘일연 당일부터 소 승상이 조만간 사직을 청하리란 것은 알고 있었다. 장 부승상 같은 이는 바로 그때부터 앞다퉈 승상의 자리를 탐했다.
하지만 황제가 소 승상의 체면을 이토록 세워 주지 않을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소 승상은 여러 해 동안 황제를 극진히 보좌했다. 황제가 육부를 개혁하려 했을 때도 소 승상이 가장 먼저 나서서 지지했다. 이를 위해 적지 않은 세력도 희생했다.
소 승상이 승상의 위치에 있었던 지난 십여 년 동안, 비록 과실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공로가 더 많았다. 그런데 사직을 청할 때가 되자 황제는 체면을 전혀 살려주지 않았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단지 춘일연에 벌어진 일 때문일까?’
대전을 가득 메운 대신들은 불안해서 서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감히 입을 열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전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평소에 조그마한 일만 있어도 탁상공론을 늘어놓으며 아귀다툼하던 모습과는 선명한 대비를 보였다.
옥좌에 높이 앉아 있던 황제는 아래쪽에 메추리처럼 옹기종기 모여 조용한 대신들을 내려다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이들은 국정을 주관하는 듬직하고 노련한 인물들이었다. 모든 일을 손아귀에서 쥐락펴락했고, 황제에 대해서도 왈가왈부할 정도였다.
그가 무슨 일을 하든지 상관없었다. 아무리 잘하더라도 이들은 꼬투리를 잡아낼 수 있었다. 이건 잘 처리하지 못했네, 저건 잘못 처리했네 떠들어댔다. 심지어 강압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모두 앞에서 그를 비난했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이런 날이 올 줄 누가 알았으랴.
보아하니 이제 새로운 신하들을 기용할 때가 된 듯싶었다. 생각건대, 원로 대신들도 더는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는 갓 등극했을 때의 아무것도 모르던 소년이 아니었다.
조계안이 말했듯, 사람은 성장하면 추구하는 바가 달라진다.
한때 그의 눈에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던 큰 인물들도 이제는 약해져 힘이 없었다.
황제가 가볍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옆에 있던 이반반이 곧장 한 걸음 나아가 높은 목소리로 ‘퇴청하시오’라고 외쳤다.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위쪽에 서서 문무백관의 예를 받았다. 그리고 자리를 뜨지 않고 여러 원로 대신들 사이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최일을 바라보았다.
“최일은 남아라.”
최일은 황제가 많은 사람 앞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자 깜짝 놀랐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공손하게 옥좌를 향해 읍을 했다. 그리고 여러 원로 대신의 가늠하고 캐묻는 시선을 받아내며 담담하게 그들 사이를 지나쳐, 황제를 만나러 난각으로 갔다.
원로 대신들은 또다시 어리둥절해졌다.
황제가 이런 때, 모든 원로 대신을 제치고 단독으로 최일을 만나는 건 무슨 생각일까.
황제가 최일을 대단히 눈여겨보고 있는 것은 원로 대신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랬기에, 황제는 평소 최일이 원로 대신들을 뛰어넘지 못하게 했다. 최일이 화살받이가 될까 봐, 남들 앞에서 최일에 대한 깊은 신임을 보이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런데 지금, 모두가 보는 앞에서 최일을 지명하며, 그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는 것은 무슨 의도일까.
원로 대신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자리를 뜨지도 못했다. 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마침내 장 부승상이 먼저 대전을 나서자 그제야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하늘이 곧 변할 모양이구나.”
어느 원로 대신은 계단에 서더니, 얼마 전 소 승상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사건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감개무량하여 한마디 했다.
원로 대신에 대한 황제의 태도가 달라졌다. 소 승상의 일만 보아도, 황제는 그들을 예전처럼 존중하지 않았다.
그의 옆에 있던 대신들은 그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오히려 무장 몇 명이 그들 옆을 지나가다가 그의 한탄을 듣고 조소를 금치 못했다.
“어리다고 만만하게 여기지 말았어야지요. 그게 다…… 자초한 거 아닙니까.”
무장들이 감히 이런 말을 했을 때, 예전이었다면 문관들이 무장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가 침묵했다.
* * *
조회가 끝나자마자, 소 승상이 사직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렸고 황제가 허락했다는 소식이 순식간에 퍼졌다.
소 승상은 황제가 그의 체면을 전혀 봐 주지 않고, 만류하는 말 한마디도 없이 대전에서 그의 사직을 단박에 허락했다는 내관의 말을 듣자, 깜짝 놀라 기절할 뻔했다.
하지만 기절하지도 못했다. 감히 기절할 수도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며, 황제의 이해심에 감사해야 했다.
질책이든 포상이든 모두 군주의 은혜. 황제가 사직을 허락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황제가 독약 한 병을 보내오더라도 황제의 은혜에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하며 기쁘게 마셔야 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뒤에는 소씨 가문 전체가 있기 때문이었다.
자기 개인의 원한 때문에 가족 전체를 해칠 수는 없었다.
소 승상은 황궁에서 전해 온 소식을 듣고, 힘없는 미소를 억지로 유지했다. 황제의 은혜에 큰절로 감사했다.
“소공(蘇公), 아직도 앞날이 창창하고 미래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인연이 닿으면 다시 뵙지요.”
말을 전하러 온 내관은 상냥하게 위로 한마디를 남겼다.
이 변경에서 흥망성쇠가 거듭되는 것을 한두 번 봐 온 게 아니었다. 젊다고 만만하게 여기지 말아야 하거니와 나이가 들었다고 함부로 모욕해서도 안 되었다.
더구나 소 승상 뒤에는 소씨 가문이 있고, 조야에 문하생과 제자들이 널리 퍼져 있었다.
“공공, 고맙소.”
소 승상은 우는 것보다 더 보기 힘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오기로 버티며 내관을 배웅했다. 그러나 내관이 떠난 뒤, 끝내 더는 버티지 못하고 두 눈을 뒤집으며 기절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