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다
육장봉은 코웃음을 치며 비웃듯이 말했다.
“이번에는 네 체면을 봐서 따지지 않는다고 하자. 그럼 넌 이게 마지막이라고 장담할 수 있겠어?”
한 번 또 한 번, 아무리 깊은 정이라도 소진될 것이다. 게다가 그를 희생하는 게 습관이 되면, 앞으로 황제는 어려운 일만 생기면 그를 주저하지 않고 희생할 것이다.
왜냐하면 매번 사정이 곤란하니까. 황제로서도 어쩔 수 없을 때가 있으니까.
조계안은 잠깐 생각하고 말했다.
“군주가 신하더러 죽으라고 하면, 신하는 죽을 수밖에 없는 법이지. 하지만 황형은 널 위한 게 분명해. 널 형제처럼 생각해서 네 혼사도 신경 써 주는 거잖아.”
황제의 처지에서 보면 잘못한 게 없는 처사였다.
육장봉의 나이라면 확실히 아내를 맞아들일 때였다. 육씨 가문에 나서서 혼사를 준비할 어른들이 없어, 황제가 대신 나서주는 것은 어찌 보면 육장봉에 대한 총애였다.
“폐하가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그랬는지는 너나 나나 다 알고 있는 일이다. 어떤 말은 아예 하지를 말아야 해. 한 번 말을 꺼내면 원래대로 되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말할 필요가 있겠군. 나 육장봉은 주나라의 신하다. 난 그 누구의 개인적인 욕망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지 않을 거다. 나는 오로지 주나라를 위해서만 희생할 거고, 죽을 거다.”
육장봉은 아주 가볍게 말했다.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한마디 한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조계안은 이것야말로 육장봉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말임을 알고 있었다.
“오로지 주나라만을 위해서 희생한다고? 주나라만을 위해 죽겠다?”
조계안은 육장봉을 바라보며 가볍게 되뇌더니, 소리 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육장봉은 주나라의 신하이자, 황제의 신하였다. 군주의 근심을 나누는 것은 신하의 직책이다. 그러니 황제는 잘못이 없었다.
하지만 육장봉은 평범한 신하가 아니었다. 막강한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높은 지위에 권력도 컸으며, 종묘사직을 위한 공도 세웠다. 아무리 황제라 하더라도 그의 의견을 존중해야 했다.
친분과는 상관없이, 육장봉이 수중에 쥔 병권 때문에라도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황제도 그를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없었다. 그러니 육장봉도 틀리지 않았다.
그는 육장봉에게 굽히라고 설득할 수도 없고, 황제에게 양보하라고 할 수도 없었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황제와 육장봉의 입장이 일치하지 않을 때, 어느 한쪽의 손도 들어주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는 여전히 형제인 거 맞지?”
조계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황형과 육장봉의 사이는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와 육장봉은? 돌이킬 수 있을까?’
“물론이지.”
육장봉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좋은 형제로군.”
조계안이 손을 내밀었다. 육장봉은 망설임 없이 손을 내밀어 조계안의 손을 꽉 잡았다.
“좋은 형제로군. 그럼 공평하게 경쟁하는 거야!”
조계안은 육장봉의 손을 꽉 쥐더니, 크게 웃었다. 그리고 육장봉에게 등을 돌리고 손을 내저으며 선뜻 떠나갔다.
“나는 그만 간다. 너와 황형의 일은 군신끼리 알아서 처리하도록 해. 앞으로 둘 중 누구를 도와서 말을 전해 주는 일은 없을 거야. 군신 사이에 끼어드는 일은 더더욱 없을 거고.”
‘군신’이라는 말 한마디가 조계안의 생각을 말해 주었다. 육장봉은 조계안의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조계안은 여전히 조계안이고 변하지 않았다. 사실 황제도 변하지 않았다. 그가 원래 이러한 사람임을 깊이 숨겼던 것뿐이다.
그저 당시 어렸던 그들이 몰랐을 뿐이었다.
조계안이 추밀원을 나오자 어린 내관이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대인, 월 낭자가 만나 뵙기를 청합니다. 언제가 편하신지 여쭈었습니다.”
“월령안이?”
조계안은 발걸음을 잠시 멈춘 채 눈썹을 찌푸리고 물었다.
“무슨 일인지는 이야기하더냐?”
월령안이 자신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쉽사리 그를 찾지는 않을 것이다.
“청주와 관련된 일이라고 했습니다.”
내관은 더없이 공손한 자세로 고개를 푹 숙였다.
“됐어. 알았다.”
조계안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러나 표정은 여전히 거만해서, 내관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떠나갔다.
* * *
조계안은 월령안에게 답신을 보내지 않고 직접 찾아갔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조계안은 정문을 거치지 않고 월령안의 서재에 조용히 나타났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그녀를 불러오게 했다.
월령안은 하인의 보고를 듣고 한순간 할 말이 없었다.
‘육장봉과 조계안, 이 두 사람은 병이 있는 게 아닐까? 어떻게 단 한 번도 정상적으로 방문할 때가 없어?’
월령안은 마음이 답답했다. 하지만 아무 말도 못 하고 잘 접대해야만 했다.
“서재에 다과를 보내라. 조 대인께서는 단 것을 즐겨 드신다.”
월령안이 여러 번 살펴본 결과, 조계안은 어린애 입맛에 가까웠다.
월령안은 조계안을 서둘러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방에 돌아와 손님을 만날 때 입는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바깥 서재로 걸어갔다.
가는 도중 간식을 내가는 하인과 마주쳤다. 그녀는 직접 받아들고는 하인을 보내 버렸다.
서재 안에 있는 조계안은 자신이 손님이라는 자각이 전혀 없었다. 책상 안쪽에 앉아 월령안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서재의 의자는 큰 편이었다. 조계안은 대단히 흐트러진 자세로 앉아 있었다. 의자에 가로로 앉아, 상반신은 한쪽 팔걸이에 기대고 두 발은 반대쪽 팔걸이 위에 걸쳤다. 손에는 월령안이 아직 다 보지 못한 장부를 들고 있었다.
월령안은 간식을 들고 들어오다가 이러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조계안은 그녀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물론이고, 장부를 마구 뒤적거려서 잘 정돈돼 있던 서재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한순간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간식을 조계안의 얼굴에 냅다 집어 던지고픈 생각만 들었다.
‘이 인간이, 정말 너무하네!’
하지만 그녀는 끝끝내 참아 냈다.
그녀는 조 대인은 지위가 높고, 권력이 막강하고, 신분이 평범하지 않으니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끊임없이 되뇌었다.
“대인께서 왕림하셨는데 소녀가 멀리 마중을 나가지 못했습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월령안은 앞으로 나아가 손에 들고 있던 간식과 차를 내려놓았다. 그다음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조계안에게 예를 올렸다.
“웬일이냐?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구나?”
조계안은 줄곧 제멋대로였다. 언제나 자기 방식대로만 했을 뿐, 남의 생각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니 자연히 남의 기분이나 걱정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월령안의 미세한 감정 변화는 금방 알아챘다.
그의 말투는 대수롭지 않았다. 앉은 자세도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몸이 긴장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책상 안쪽은 빛이 어두웠다. 또 조계안은 창문을 열지 않았다.
게다가 책상을 사이에 두고 그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월령안의 시력이 좋은 건 아니었다.
“대인, 농담하지 마세요. 저희 같은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불쾌해하겠나요?”
월령안은 웃음소리를 내더니, 조계안이 말을 하기도 전에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조계안은 금세 언짢아졌다. 두 발을 내려놓고 똑바로 앉더니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두 눈에 위험한 빛이 떠오르더니, 그녀를 다그쳤다.
“나에게 눈치를 주는 거냐? 내가 너를 거슬렀다고?”
월령안은 조계안의 추궁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차 한 잔을 따라 두 손으로 그의 앞에 놓았다.
“대인, 알고 계시는지요……. 장씨 가문의 그 외사촌 아가씨가 월씨 가문의 사람인걸?”
“뭐라고?”
조계안은 월령안이 건네주는 차를 보며 몰래 기뻐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얼굴빛이 확 변했다.
“그 말이…… 확실하냐?”
“저희 가문 집사가 그 아가씨를 보았고, 제 셋째 언니임을 알아보았어요. 다른 증거 같은 건 없습니다.”
십 년이나 지났으니, 조계안에게 증거를 찾아줄 수가 없었다.
“그놈들이 월씨 가문 사람 하나를 빼돌려 두었다니. 대단한 능력이야!”
조계안은 벌떡 일어서더니 날카롭게 말했다.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끼어들지 마라. 명심해라. 그 여자의 성씨가 월씨라 해도, 너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알겠느냐?”
“대인, 걱정하지 마세요. 알고 있습니다.”
월령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계안이 급히 자리를 뜨는 것을 보자, 다급하게 물었다.
“조 대인, 장씨 가문과 청주가 관련이 있나요? 그들이 유경장의 친구에게 손을 쓴 것은 청주 사람들을 위해서인가요?”
“무슨 생각이냐? 장씨 가문은 대사족으로, 그들의 터전은 강남에 있고 세력도 아주 크다. 청주의 그들은 장씨 가문을 움직일 만한 자격이 없다. 너를 노렸다고? 그건 너무 나갔구나. 너는…….”
조계안은 월령안을 흘겨보고는 거만하게 말했다.
“너는 아직 장씨 가문의 눈에 들 자격이 없다. 장씨 가문에서 그 두 사람에게 손을 쓰고, 무슨 뚱딴지같은 외사촌 아가씨를 받아 준 건 그냥 불만을 표시하는 것뿐이야. 너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
이것은 장씨 가문과 황제의 겨룸이었다. 그 두 사람이든, 외사촌 아가씨든 전부 황제에게 보내는 암시일 뿐이었다.
“그러면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진 건가요?”
월령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말해도 뭐 문제는 없지.”
조계안은 거드름을 피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두 사람은…….”
월령안이 떠보듯이 물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계안은 그녀의 말을 끊어 버렸다.
“생각도 하지 마. 그 두 사람은 구할 수 없다. 구할 사람도 없다. 증거가 확실할 뿐만 아니라 뒤집을 수 없는 사건이야.
사건을 뒤집을 수 있다고 해도, 다시 재판하려 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장 부승상이 처리한 사건을 뒤집으면 장 부승상의 체면이 어떻게 되겠느냐?”
“장 부승상의 체면이요……. 알겠어요.”
월령안은 눈을 감고 거듭 머리를 끄덕였다.
장 부승상의 체면은 두 서생의 목숨보다, 평범한 두 가족의 미래보다 훨씬 중요했다.
이게 바로 현실이었다. 누가 옳은지,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 * *
조계안이 떠난 다음, 육장봉은 원래 계획대로 월씨 저택에 가지 않았다. 자택에 돌아와 목욕하고 관복을 갈아입은 다음, 황제를 만나러 황궁에 들어갔다.
그가 황제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난각에서 막 나온 육장봉은 온몸에서 소름 끼치는 한기를 내뿜었다. 아무도 감히 접근할 수가 없었다.
황제는 줄곧 난각에 틀어박혀 있었다. 한밤중이 되어 조계안이 그를 찾아와서야 비로소 어둠 속에서 빠져나왔다.
난각에서 나온 황제는 축 처져 있었다.
황제는 침궁으로 돌아갔지만 쉬지도 않고, 곁에 있는 궁인을 내보냈다. 그리고 조계안을 끌고 어릴 적처럼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갔다. 형제 둘은 기대어 앉아 넓디넓은 하늘을 보며 어린 시절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타깝게도 조계안이나 황제나 어린 시절의 이야깃거리는 몇 가지밖에 없었다.
그중 오늘 밤의 분위기에 가장 알맞은 이야기는, 어린 시절 깊은 밤이 되면 황제가 하인을 피해 깜깜한 밀실에서 조계안을 데리고 나온 다음, 아무도 없는 구석을 찾아 어두운 등불 아래서 낮에 배운 것을 하나씩 가르쳐 주었던 추억이었다.
그들이 어렸을 때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기는 했지만, 가장 따듯했던 순간이기도 했다.
빈약한 어린 시절 추억과 몇 가지 이야깃거리를 이래저래 나누다 보니 곧 화제가 떨어졌다.
황제는 그의 다리를 베고 누운 조계안을 다독였다. 그러면서 하늘의 별과 달을 바라보더니, 고독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람이 성장한 다음에는 그 어린 시절로는 돌아갈 수는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