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월씨 가문 자제들의 숙명
정 낭자의 맥을 짚고 나서 손불사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배 속에서 독을 가지고 나왔군? 월가야, 진짜 내게 골칫거리를 찾아다 주었구나.”
“진료비를 그렇게 많이 드렸는데, 조금 귀찮게 할 수도 있죠.”
정 낭자의 병을 고치기 어렵다는 말을 듣자, 월령안은 대뜸 기뻐했다.
그녀는 속 좁은 사람이라, 손해를 보는 게 싫었다. 그렇게 많은 돈을 써서 진찰했는데 정 낭자의 병이 고치기 쉬운 거였다면, 얼마나 밑지는 장사인가.
“간사한 장사꾼 같으니라고.”
손불사는 언짢아서 월령안을 노려보았다.
“이 병은 태내에서 가지고 나온 병이야. 약만 먹어서는 표면적인 증상만 해결될 뿐, 근본적으로는 치료되지 않아. 태독(胎毒)을 말끔하게 없애야 치료될 거야. 여기에 오래 머물러야 내가 수시로 상세를 보고 처방을 조절할 수 있다.”
정 낭자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건 정씨 가문에 얘기해야 해요. 먼저 정 낭자를 데리고 돌아갔다가 내일 다시 올게요.”
월령안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내일 아침 일찍 오지 않으면 치료해 주지 않을 거야.”
손불사는 흰머리에 흰 수염을 가지고 있어 속세를 초월한 고인(高人)처럼 보였다. 사람을 거절하는 자태는 차갑고 거만하기 그지없었다.
월령안은 손불사와 여러 차례 거래했던 터라, 그의 고약한 성미에는 진작 익숙해져 있었다. 그가 화를 내더라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정 낭자는 손불사가 자신을 치료해 주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월령안의 옷을 잡아당기더니, 자기는 남아 있어도 괜찮다고 속삭였다.
월령안이 위로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손 신의는 약속을 천금같이 여기는 분이세요. 저분이 한 입으로 두말하지는 않으니 내일 다시 와요.”
남의 집의 어린 아가씨를 낯선 곳에 남겨 두고 재우는데, 그 집안 부모의 동의를 거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명성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정 낭자는 그럴 수 없었다.
월령안은 노인과 소육자에게 인사하고는 그날 정 낭자를 데리고 돌아갔다. 그리고 직접 정 낭자를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또한, 손불사의 말을 한 글자도 빠트리지 않고 정 장군과 정 부인에게 전해주었다.
정 부인은 듣자마자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오래되어 마침내…… 드디어 우리 귀염둥이를 치료할 사람이 나타났구나. 손 신의는 역시 신선이시네. 치료해요, 치료해야지요. 내일…… 아니다, 오늘 밤 제가 귀염둥이를 데리고 갈게요. 제가 귀염둥이와 함께 명월산장에 머물면 아무 문제도 없을 거예요.”
“부인, 당신이 명월산장에 가면 난 어떡하란 말이오?”
정 장군은 그 말을 듣자 쩔쩔맸다.
“당연히 당신 할 일을 해야죠. 그렇지 않으면 뭘 어쩌려고 그러세요?”
정 부인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정 장군은 내키지 않았다.
“그럼 나는 휴가를 신청할 거요. 병이 나서 곧 죽을 것 같으니 명월산장에 가서 요양해야겠소. 부인과 귀염둥이가 나를 돌봐 주는 거지. 그래, 이렇게 하는 거로 하자. 너희 둘은 집을 잘 지키도록 해라.”
정씨 가문의 두 공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월령안은 그런 풍경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그날 밤, 정 장군은 권력을 동원해 휴가를 내고자 하는 사리사욕을 채웠다. 정 부인과 정 낭자를 데리고 명월산장에 갔다.
월령안은 원래 손불사가 정 장군을 만나면 체면을 봐주지 않고 당장 내쫓을 줄 알았다. 뜻밖에도 손불사는 평소의 각박함을 벗어버리고, 고인다운 풍격을 보여 주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정 장군이 머무르는 것을 반겼다.
정 장군은 약왕 손불사라는 이 신선 같은 인물이 자신을 이렇게나 자애롭고 친근하게 대하자 감격해 어쩔 줄 몰랐다.
두 사람은 금세 친해졌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눈 뒤 정 장군은 손불사에 대해 더욱 감탄했다. 손불사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여러모로 애를 쓰는 것이, 손불사의 제자보다 더 살뜰했다.
월령안은 손불사가 부드럽게 웃으며 예의도 차리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 떨었다.
순간, 손불사가 최근 새로운 약 하나를 연구하는 중인데 그 약을 시험해 볼 만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런 걸 두고 정 장군이 제 발로 찾아왔다고 해야 하나?’
월령안은 동정 어린 눈으로 정 장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객방으로 돌아가서 쉬었다.
* * *
이튿날 이른 아침, 월령안은 성안으로 돌아갈 채비를 서둘렀다.
정 부인은 일부러 일찍 일어나서 월령안을 배웅했다. 그리고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살며시 그녀를 붙잡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령안, 자네가 우리 귀염둥이와 몇 살 차이가 안 나니, 내가 이모인 셈이잖나. 령안, 사실대로 말해주게. 자네 정 이모부에게 혹시 생명의 위험은 없겠지?”
월령안은 어안이벙벙해졌다.
‘하룻밤 새에 이모뿐만 아니라 이모부까지 생겼네?’
정 부인의 타고난 친화력은 그녀조차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장군 친척이 하나 더 생기는 것쯤은 상관없었다.
그녀는 넉살 좋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정 이모, 걱정하지 마세요. 약왕께서 목숨을 해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정 이모부께서 고생은 좀 하셔야 할 것 같네요.”
정 부인이 이렇게 빨리 문제를 발견한 것은 전혀 놀랍지 않았다.
정 장군은 한눈에 봐도 데면데면해서 잔꾀 같은 건 없는 사람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동안 정씨 가문이 몰락하지 않고 갈수록 가세가 편 것은, 정 부인이 그만큼 정성을 기울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나도 걱정하지 않겠네.”
월령안의 이 말에 정 부인은 더는 정 장군을 신경 쓰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환한 웃음을 지으며 월령안을 배웅해 주었다.
“령안아, 일찍 돌아가거라. 우리 귀염둥이, 네 여동생의 병이 나으면 우리 집에 초청할 테니 며칠 놀러 오고.”
“좋아요. 정 이모.”
월령안은 살갑게 대답했다. 마치 정말로 정 부인을 손윗사람으로 대하는 듯했다.
“자네는 일부러 어리광을 부리지도, 가식적이지도 않아. 그 대범한 모습이 내 마음에 쏙 드네.”
그 모습을 보자, 정 부인은 저도 모르게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웃는 모습은 강남 여인 특유의 부드러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월령안은 이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정 부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정 부인은 처음부터 그녀와 전혀 내외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 앞에서 데면데면하게 진실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정 부인의 이 태도를 보자, 정씨 가문은 사귈 만하다고 생각했다.
* * *
월령안은 집에 돌아오자 또다시 바쁘게 보내기 시작했다. 그래도 심민의 도움이 있어 눈코 뜰 새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심민은 능력이 뛰어나 아무리 복잡한 일이라도 알맞게 처리할 수 있었다. 유일한 결점이라면 자신감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예기치 못한 일에 부닥치면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월령안이 보기에 이건 그리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심민에게 기회와 시간을 주기만 하면 곧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심민이 그녀를 도와 잡무를 처리하게 되자, 그녀는 대부분의 심혈을 장씨 가문을 대처하는 데 기울였다.
장씨 가문은 소씨 가문과 달리, 대사족으로서 집안 단속을 엄하게 했다. 월령안은 많은 힘을 기울였지만, 쓸 만한 정보는 하나도 알아낼 수 없었다.
심지어 장씨 가문에서 육장봉과 혼사를 맺으려 한다는 소식조차도 알아내지 못했다. 정 장군의 됨됨이를 몰랐다면, 그가 자신을 속였다고 의심할 정도였다.
월령안은 정 장군이 이런 일로 자신을 속일 리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저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 장씨 가문의 일을 알아낼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래도 그녀가 포기하지 않고 갖은 노력을 다한 끝에, 생신 잔치 전에 그 신비한 외사촌 아가씨와 관련된 소식을 조금이나마 알아낼 수 있었다.
“아가씨, 장씨 가문의 그 외사촌 아가씨는 셋째 아가씨일 겁니다!”
집사기 어두운 표정으로 월령안에게 보고했다.
“뭐라고?”
월령안은 벌떡 일어나 바로 앉으며 눈썹을 찌푸리고 물었다.
“셋째 아가씨? 어느 가문의?”
“저희 월씨 가문의 셋째 아가씨입니다.”
집사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확실한가?”
월령안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빛은 눈에 띄게 예리해졌다.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소인도 전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손을 써서 멀찍이서 그 외사촌 아가씨를 보고서야, 그 정보가 틀림없음을 확인했습니다.”
“셋째 언니, 언니는…… 죽지 않았느냐?”
집사는 월씨 가문에서 오래 일한 사람이었다. 월씨 가문의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지켜봤다고 할 수 있었다. 월령안은 집사가 이런 일을 착각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특히 그녀의 셋째 언니는 알아보기도 쉬웠다.
“당시 가주, 아가씨의 부친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 여러 도련님과 아가씨의 사망 소식이 잇따라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당시 가문 전체가 아수라장이라, 사실을 철저하게 확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셋째 아가씨의 시신은 그때 찾지 못했습니다.”
집사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십 년 전, 그 재앙이 덮치는 순간 월씨 가문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당시 월씨 가문의 가주 쟁탈전에 참여했던 도련님과 아가씨들은 모두 밖에서 장사하면서, 새 가주 자리를 다투고 있었다.
그런데 노가주의 시신이 돌아오자, 밖에 있던 도련님과 아가씨들의 사망 소식도 잇달아 전해졌다.
그 사망 소식이 사실인지, 가짜인지를 분간하기란 어려웠다. 그들은 당시 정신을 차릴 새가 없었다. 그 소식을 하나하나 검증할 시간과 힘이 없었다.
당시 월씨 가문은 난장판이 되어, 주인으로 내세울 만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월씨 가문의 모든 가산을 내놓고야 겨우 월령안 하나를 보호할 수 있었다. 그때는 정말로 밖에 나가 사람을 찾을 만한 능력도 없었다.
“셋째 언니가 살아 있다니. 그럼 방법을 생각해서…….”
월령안은 여기까지 말하고 갑자기 말을 끊었다. 그리고 조금 나른한 말투로 말했다.
“아니다. 연락할 필요 없어. 셋째 언니가 나를 만나 보고 싶어 하고, 만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진작에 왔을 거야.”
“아가씨…….”
집사는 가슴이 아파 그녀를 불렀다.
월령안은 힘없이 웃음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아. 월씨 가문의 아이들에게는 원래 자매간의 정 같은 건 없었어. 우리 오라버니가 특별한 경우였지. 나도 알고 있어.”
모두 알고 있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괴로웠다.
혼자 외롭게 ‘월’이라는 성씨를 떠받치게 된 지 십 년 만에 어렵게 찾아낸 혈육이 적수로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월씨 가문의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서로가 적수였다.
월씨 가문의 아이들은 새끼 늑대였고, 월씨 가문의 가주 자리는 곧 늑대 왕의 자리였다. 늑대 왕이 늙고, 새끼 늑대들이 성인이 되면 새로운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월씨 가문 자제들의 숙명이었다.
집사의 얼굴빛도 더욱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는 본분을 지키며 계속 보고했다.
“셋째, 아니. 삼낭자는 변경에 도착한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춘일연 날에 비밀리에 유 공자를 만나서, 자신을 맞아들이고 청주의 사람들을 위해 일하며 함께 아가씨를 대적하자고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유 공자에게 거절당한 다음에는 장씨 가문으로 찾아갔습니다.”
이 일은 이미 유경장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월령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 아마 셋째 언니의 생모가 장씨였지?”
“예, 양계(梁溪) 장씨로 장 부승상과 동성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고작 방계의 방계에 불과합니다. 장 부승상 일맥과는 진작에 남이 되어, 혈족으로서의 정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장씨도 월씨 가문에 첩으로 보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