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내가 때를 잘못 맞춰 온 건가?
영영은 앞장서서 걸으면서도 계속 불평을 늘어놓았다.
“아가씨, 아무리 지금은 예전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이 시간에 오지는 마셨어야죠. 그리고 오실 거면 조용히 오셔야지…….”
육삼과 육사도 뒤를 따르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월 낭자가 기루로 오는 것을 알았더라면 반드시 막았을 것이다.
‘혹시 돌아가면 대장군이 우리를 때려죽이는 건 아니겠지?’
육사와 육사는 다시 한번 마주 보며 동시에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끔찍하군! 첫날부터 이렇게 큰일에 부닥칠 줄이야.’
“암위가 대장군께 소식을 전했습니다. 괜찮을 겁니다.”
육사는 육삼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위로했다.
그러나 육삼의 귀에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도리어 이렇게 말했다.
“넌 몰라. 월 낭자는 다르다. 장군은 분명 매우 화내실 거다. 이제 우리 둘은 끝장났어.”
육사는 기가 막혔다.
‘이래서야 이게 짭짤하게 재미 보는 임무라고 할 수 있겠어?’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월령안과 영영은 먼저 술 저장고로 들어갔다. 육삼과 육사는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고 따라 들어갔다.
술 저장고 안에서는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빈 술 항아리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고주망태가 된 유경장은 바닥에 대자로 쓰러져 있었다. 손에는 술 한 동이를 안고 있었다. 몸에 걸친 옷은 원래의 색깔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정말 후회되는구나……. 후회돼…….”
유경장은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남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한마디 할 때마다 술을 한 모금씩 들이켰다.
“남들 말로는 술이 근심을 덜어준다는데. 나는 왜 점점 더 울적해질까? 왜 술을 마실수록 정신이 더 또렷해질까? 한 번만이라도 취하고 싶어. 한 번만이라도 취하고 싶다고. 취하기만 하면, 꿈속에는 무엇이든 다 있지. 령안, 난 꼭…… 령안을 본 거 같아.”
유경장은 술동이를 안고서 비틀비틀 일어섰다. 그러고는 큰 웃음을 터뜨리며 술동이를 치켜들고 입에다 술을 쏟아부었다.
“역시 내가 취했구나. 드디어 취했어…….”
“유경장, 그만 해요!”
월령안은 앞으로 다가가 유경장을 냅다 걷어찼다.
쨍그랑!
술동이가 날아가 땅바닥에 떨어지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유경장도 땅바닥으로 떠밀렸다. 얼굴이 바닥에 처박히며 거칠게 쓰러졌다.
“아프잖아! 령안…… 또 날 때렸소!”
유경장은 땅바닥에 쓰러진 채 억울한 듯 한껏 웅크렸다. 그 모습은 마치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 같았다.
“유경장, 취한 척하지 말아요. 어서 일어나요.”
월령안은 앞으로 다가가 유경장의 멱살을 잡고 억지로 일으켰다.
“령안, 령안, 당신이 나를 보러 온 거요?”
유경장은 칠 할은 취하고 삼 할은 깨어 있었다. 눈앞의 희미한 모습을 보며 멍청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오 년 전에 말했었잖아요. 술에 취해서 모든 걸 잊으려 하는 건 대장부가 할 짓이 아니라고. 오 년 전에도 그랬는데, 오 년이나 지난 지금도 당신은 여전하군요. 유경장, 당신 너무 실망스럽네요.”
월령안은 갑자기 유경장을 확 밀쳤다.
기댈 곳을 잃은 유경장은 다시 한번 땅바닥에 쓰러지면서 머리를 땅에 쿵, 하고 박았다. 옆에 서서 지켜보던 육삼과 육사가 유경장을 대신해서 아픔을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유경장은 아픔을 느끼지 못한 듯 곧장 바로 앉더니, 월령안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령안, 내게, 내게…… 실망하지 마시오. 나, 난 기운을 차릴 거요. 날 믿어 줘. 날 포기하지 말아 주시오.”
“지금 깬 거예요, 아니면 아직도 취해 있어요?”
월령안은 몸을 돌려 쪼그리고 앉더니 유경장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좀 취했지만, 당신인 줄 안다오. 당신이 날 보러 왔잖소.”
유경장의 얼굴에는 수염이 덥수룩했다. 눈은 빛을 잃은 채 핏발이 가득 서 있었다. 평소의 품위 있던 귀공자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버려진 강아지처럼 불쌍한 눈빛으로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내가 당신의 청혼을 거절했다고 술독에 빠진 거예요?”
유경장은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 것이다. 나중에 술이 깬 다음에도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할 것이다.
유경장은 술을 좋아하는 데다 주량도 좋아서 쉽게 취하지 않았다. 취했다가 깨어나더라도 자신이 술에 취했을 때 벌어진 일을 잊지 않았다.
“아니오.”
유경장은 소리 내어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술에 취해 도피만 하려 했다. 현실, 핍박받는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다.
“청주에서 누군가가 당신을 찾아왔었죠. 그들이 당신을 위협했나요?”
월령안은 육장봉이 말하던 일을 떠올리고 대담하게 추측했다.
유경장은 고통스럽게 눈을 감더니 울먹였다.
“당제(唐齊)와 초성(肖誠) 둘 다 공명(功名 – 과거를 치른 뒤 성적순으로 받은 등급)을 박탈당하고 온 가족이 감옥에 갇혔소. 령안, 괴롭소. 마음이 괴로워서 죽을 것 같다오. ……내가 그들을 해친 거요.”
유경장은 월령안의 옷소매를 놓더니 그녀를 끌어안았다.
“령안, 내…… 마음이 괴롭소. 괴로워 죽을 것 같소. 나는 그들을 구할 수도 없다오. 난 정말 무용지물이오!”
당제와 초성은 유경장의 친구였다. 세 사람은 가진 게 없던 시절 알게 되어 지금까지도 서로 도우면서 함께해 왔다.
유경장과 달리, 당제와 초성은 이미 진사가 되어 관직에 임명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 관문만을 남겨 놓고 있는데, 공명을 박탈당하고 심지어 일가족이 모두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유경장은 그들을 구할 수 없었고, 또 배후의 사람들과 타협할 수도 없었다. 그저 술기운을 빌려 취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괴로운데 술을 마시면 무슨 소용이 있나요? 이렇게 큰일이 생겼으면서 왜 절 찾아올 생각은 안 했어요?”
월령안은 화가 나서 유경장을 밀치려 했으나, 차마 밀어내지 못했다.
“령안, 이건 관료들의 일이오. 내가 당신을 찾아가면 당신도 남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잖소……. 남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을 때는 똑같이 몸을 높일 수 있지만, 도움을 청하려면 똑같이 몸을 낮춰야 하는 법이요. 개처럼 비굴할 정도로 말이오. 령안, 난 당신이 남에게 부탁하는 게 싫소.”
유경장은 월령안을 안고 조용히 흐느꼈다.
그는 이번에 남에게 부탁해 보고 나서야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남에게 부탁하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월령안이 그러한 모욕을 당하는 것이 싫었다.
“내가 남에게 부탁하는 게 싫으면 당신이 노력해야 할 게 아닌가요. 열심히 노력해서 출세하세요. 그럼 저도 앞으로 남에게 부탁하지 않고 당신에게 부탁할게요.”
월령안은 유경장을 밀쳐 낸 다음 양손으로 그의 양어깨를 잡고서 마주 보았다.
지금의 유경장에게는 목표가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끝장날 것이다.
“출세하라고?”
유경장은 멍하니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내게 아직 가능성이 있을까?’
“맞아요. 과거를 보세요! 소 승상은 곧 사직할 거예요. 그자는 이제 당신을 막지 못해요.
당신이 과거에 합격해 벼슬길에 나가게 되면, 저도 당신이 부임하는 곳으로 가서 장사할 거예요. 우리가 관리와 상인으로서 손잡으면 되잖아요. 그렇게 되면 앞으로 저는 당신에게만 부탁하고, 남에게는 부탁하지 않을게요.”
“내가 할 수 있을까?”
유경장은 멍하니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할 수 있어요!”
월령안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확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이곳에 들어선 육장봉은 월령안과 유경장이 무릎을 꿇고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광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월령안의 손은 유경장의 어깨를 잡고 있었고, 유경장은 월령안의 팔을 잡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는 조금도 비집고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웠다. 남녀 사이에서 이 거리는 너무 가까웠다.
하지만 특수한 상황이라, 월령안이나 유경장이나 둘 다 이런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영영은 기루 출신이라 남녀 사이에 대해 대범한 편이라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게다가 유경장은 지금 고주망태라, 그녀는 애초에 그가 무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육삼과 육사는 이 행동이 부적절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들은 호위일 뿐이라, 월령안의 행동에 간섭할 권리가 없었다.
그래서 육장봉은 들어서자마자, 그를 몹시 언짢게 하는 이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 순간, 육장봉은 앞으로 다가가 월령안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 싶었다. 그러나 월령안이 자신을 경계한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결국 움직이지 않았다.
탕!
군화가 바닥을 디디자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그는 술 저장고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데 성공했다.
“장군!”
육삼은 육사는 멍하니 있다가, 재빠르게 예를 올렸다.
“대, 대장군!”
영영은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찾아온 사람이 마음속의 대영웅인 것을 보자,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여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러고는 참지 못하고 환호성을 지를까 두려워 급히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대장군?”
월령안과 유경장도 소리를 듣고 동시에 입구를 바라보았다. 육장봉을 보는 순간,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표정과 동작이 모두 똑같았다.
육장봉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표정을 굳힌 채 술 저장고에 걸어 들어오더니 쌀쌀하게 말했다.
“육삼, 육사. 어서 유 공자를 부축해 일으켜라.”
“네, 장군.”
육사는 큰 목소리로 대답하고 유경장에게 걸어갔다.
반면 육삼은 잠자코 있었다. 그는 현재 육장봉의 친위대가 아니라 월령안의 호위로 있는 것이다.
‘육사, 이 멍청이 때문에 곤경에 빠졌잖아!’
육삼은 속으로 넋두리를 하며 월령안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가 반대하지 않자, 비로소 묵묵히 육사의 뒤를 따라갔다.
그는 대장군이 틀림없이 불쾌해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월낭자가 더욱 불쾌하리란 게 중요했다.
월 낭자가 기루에 오자마자 장군이 바로 뒤따라왔다. 월 낭자는 분명 그들이 고자질했다고 생각할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다 암위가 한 짓이고, 그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육삼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육삼은 육사보다 먼저 웃는 낯으로 말했다.
“월 낭자, 저희가…… 낭자 대신 유 공자를 부축할까요?”
“두 장군께서 수고해 주세요.”
월령안은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태도도 아주 좋았다. 하지만 장군이란 호칭이 그녀의 태도를 충분히 보여 주었다.
월령안은 육십이를 부를 때는 그냥 십이라고 부르면서 결코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육삼, 육사는 ‘천만에요’를 연신 되뇌며 유경장을 재빨리 부축해 일으켰다. 특히 육삼은 월령안이 자신을 보지 못하도록, 자신의 몸을 줄이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유경장은 이제 술에서 거의 깬 상태였다. 지금 자신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음을 알고,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육삼과 육사가 부축하는 대로 얌전히 있었다.
“유 공자가 씻도록 데리고 가라.”
육장봉은 또 명령을 내렸다.
“예, 장군.”
육사는 대답하고 나서 바로 유경장을 부축해 떠나려 했다.
그러나 육삼이 육사를 잡아당겼다. 그는 육장봉의 굳어진 얼굴을 관계치 않고 예의를 차리며 물었다.
“월 낭자, 유 공자를 어떻게 할까요?”
육사가 잠깐 굳어지며 움직이지 않았다.
월령안도 사양하지 않고 영영에게 손짓했다.
“영영, 네가 두 분을 모셔다드리렴.”
“아, 네네……. 두 분은 저를 따라오세요.”
육 대장군이 들어서자, 술 저장고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무겁고 이상해졌다.
월령안의 말을 들은 영영은 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한시도 지체하지 않았다. 몸을 돌려 육삼과 육사를 데리고 육장봉을 멀찌감치 피해 술 저장고에서 떠났다.
이제 술 저장고에는 육장봉과 월령안, 두 사람밖에 없었다. 그리고 바닥에 이리저리 널려 있는 빈 술동이와 사라지지 않는 술 냄새뿐이었다. 육장봉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가 때를 잘못 맞춰 온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