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293)화 (293/1,004)

293화 심민이 사죄하러 왔습니다

육장봉은 일 처리가 빨랐다. 다음날 바로 호위병을 파견했다. 온 사람은 육삼과 육사로, 모두 구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월령안은 두 사람과 한 번 만나 본 다음, 그녀의 협력이 전혀 필요하지 않음을 알고는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육장봉이 육삼과 육사를 호위로 보냈으니, 호위로 쓰기로 했다. 호위의 규칙에 따라 쓸 것이고, 육장봉의 사람이라고 해서 특권을 주지 않았다.

월령안은 며칠간 청희 장공주의 일 때문에 밤낮으로 바쁘게 보냈다. 때때로 귀찮게 구는 육장봉도 상대하다 보니, 해야 할 일들을 하나도 하지 못했다.

육장봉이 겨우 조용해지자, 마침내 급한 일들을 처리할 시간이 생겼다.

집사는 며칠 쉬고 나자 회복했다. 아침 일찍 와서 월령안에게 보고했다.

“아가씨, 황금당의 잔금을 치러야 합니다. 황금당에서 편지를 보내 독촉하고 있습니다.”

월령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문제에는 대답하지 않고 다른 걸 물었다.

“청주의 술을 운반해 올 장군왕부의 사람들은 출발했다더냐?”

“사흘 전에 출발했습니다. 이변이 없는 한, 열흘이면 청주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집사가 대답했다.

“황금당에게 전하게. 열흘 뒤 청주로 가서 잔금을 받으라고 하게.”

소씨 가문의 도박판에서 딴 돈과 술을 판 돈을 합하면 황금 십만 냥밖에 되지 않았다. 황금당의 잔금을 치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사실 이 돈은 계약금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황금당의 사람들은 일에 착수하기 전, 그녀가 낸 황금 천 냥만 받았을 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그녀와의 구두 계약이었다.

물론 황금당에서는 그녀가 이 돈을 내놓을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청주에는 월씨 가문의 전 가주, 월령안의 아버지가 남긴 유산이 있던 것이다.

“아가씨, 수중의 돈을 긁어모으면 황금 십만 냥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어르신께서 주신 돈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집사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권했다.

“술도 다 팔았는데 돈을 남겨 두면 뭐 할 건가? 돈은 돈일 뿐일세. 쓰고 다시 벌면 되지.”

월령안은 손을 내흔들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가씨 말이 맞습니다.”

집사는 가볍게 한숨을 짓고는 더는 설득하지 않았다. 곧 다른 일로 말머리를 돌렸다. 며칠간의 일을 다 말하더니, 또 초청장 하나를 가져와 월령안에게 올렸다.

“아가씨, 여기 연회 초청장 하나가 왔습니다. 소인이 감히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아가씨께서 한번 보십시오.”

“장(張)씨 가문이라고? 어느 장씨 가문이냐?”

월령안은 초청장을 받아들더니, 무척 의아해했다.

“아가씨, 거기는…… 거긴 장 부승상의 가문입니다.”

집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가 장씨 가문과 왕래를 했었나? 지난 춘일연에 장씨 가문의 낭자도 왔었나?”

월령안은 초대장을 펼쳐서 한 번 훑어보았다. 그녀로서는 이해되지 않았다.

‘장 부승상 모친의 생신 잔치에 왜 나를 초대하지?’

그녀가 장군 부인으로 있을 때도 장씨 가문으로부터 초청장을 받은 적은 없었다.

장씨 가문 같은 대사족(大士族 - 정치, 경제 각 방면의 특권을 가진 사대부 가문)은 상인 출신의 장군 부인을 아예 안중에 두지도 않았다. 그래서 매번 장씨 가문의 연회에는 그녀를 초청하지 않았다.

“장씨 가문에는 낭자 두 명이 있는데 지난해 춘일연에 참가했습니다. 올해는 둘 다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출인 공자 한 분만이 참석했습니다.

소인이 알아봤더니 며칠 전 장씨 가문에서는 강남에서 외사촌 아가씨 한 분을 모셔왔다고 하더군요. 장씨 가문은 이번 생신 잔치를 통해 그 외사촌 아가씨를 사람들에게 소개할 생각인 모양입니다.

아가씨, 자세히 보십시오. 장씨 가문에서 보낸 청첩장에는 춘일연의 화신이라고 썼지, 아가씨의 이름을 쓰지 않았습니다. 장씨 가문에서는 그 외사촌 아가씨가 아가씨를 발판 삼아, 변경에서 명성을 날리기를 바라는 모양입니다.”

집사는 몸조리하는 동안 결코 한가하게 보낸 것은 아니었다. 적지 않은 일을 해냈다.

월령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럼 가 보도록 하지. 자수 공방에 가서 연회에 참가할 예복을 준비하도록 하게. 너무 화려할 필요 없이, 적당히 경사스러운 분위기만 맞추면 된다고 이르게.”

장씨 가문에서 선전 포고를 보내왔다. 가지 않으면 너무 겁쟁이처럼 보였다.

집사는 장씨 가문의 초청장 이야기를 마치고 물러가려다가, 문득 떠오르는 일이 있어 말했다.

“아가씨, 영영 낭자가 사람을 보내 전했습니다. 유 공자가 춘일연에서 돌아온 뒤, 날마다 술독에 푹 빠져 산답니다. 누구도 그를 불러낼 수가 없다는군요.

영영 낭자는 유 공자가 이렇게 술만 마시다가는 술독에 빠져 죽을까 걱정이랍니다. 도무지 방법이 없어서, 아가씨더러 유 공자를 좀 설득해 달라고 했습니다.”

“유경장이?”

월령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 사람이 뭘 하려는 거지?”

집사는 고개를 숙이고 감히 말하지 못했다.

월령안은 불쾌한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분부했다.

“마차를 준비하게. 행화루에 한번 다녀와야겠네.”

“예, 아가씨.”

집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하고서 준비하러 갔다.

마차가 막 준비되었을 때였다. 하인이 와서 심민, 심 공자가 만나기를 바란다고 보고했다.

“심민? 난 그분이 대장군에게 줄을 댔으니 다시는 날 찾아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월령안은 심민의 이름을 듣고 매우 놀랐다.

육장봉의 개입으로 심씨 가문 사건은 이미 끝난 지 오래였다. 비록 심씨 가문의 재산 대부분이 소 승상에게 넘어갔지만, 육장봉도 심민이 손해 보지 않도록 했다.

심씨 가문의 나머지 재산은 전부 심민이 장악했다. 다만 그 뒤로 그녀는 심민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육장봉도 더는 심민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월령안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애당초 그녀가 심민을 도와준 것도 자신을 위해서였다. 각자 필요한 것을 취했을 뿐이니 일이 끝난 다음에 다시 만나지 않는 것도 정상이었다.

하지만 심민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자, 월령안은 여전히 기뻤다. 심지어 행화루로 가려던 시간마저 바꾸었다.

“들여보내게.”

“월 낭자, 심민이 사죄하러 왔습니다.”

하얗게 바랜 무명 남색 옷에 이리저리 덧대어 기운 헤진 헝겊신. 심민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여전히 가난한 차림새였다.

“심 오라버니, 이게 무슨 일인가요?”

월령안은 심민의 말을 진짜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현재 상황에 관해 관심을 기울였다.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전 괜찮습니다.”

심민은 고개를 저었다. 웃는 얼굴은 해맑고 대범했다. 눈에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대장군에게서 오라버니가 심씨 가문의 나머지 재산을 다 인수했다고 들었어요. 오라버니, 혹시 어려움에 부딪혔나요? 일이 있으면 말씀만 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으면 꼭 도울게요.”

월령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심민은 조금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바로 본론을 이야기했다.

“월 낭자의 밑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봉급은 필요없고, 그저 배만 곯지 않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허락하시겠는지요?”

양손으로 읍하는 심민의 자태는 무척 겸손했다.

월령안은 이해가 되지 않는 듯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심씨 가문의 재산은요?”

심민은 그 육장봉마저 높이 사는 사람이었다. 심씨 가문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데, 어찌 그녀에게 배만 곯지 않게 해달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심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팔았습니다. 돈은 애당초 심씨 가문 때문에 피해를 보았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지금 저는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어 가진 것이라고는 없습니다. 월 낭자께서 저를 받아 주실지 모르겠습니다.”

월령안은 그 말을 듣고 숙연해졌다.

“심 오라버니, 참 훌륭하시네요.”

그녀는 심민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육장봉마저 이 사람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의 품성은 정말 훌륭했다.

“원래 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모은 돈이었습니다. 제가 쓴다고 해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겁니다.”

심민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특별히 잘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심씨 가문 사람이다. 심씨 가문의 재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가 묻어 있는지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한 돈은 부끄러워서 쓸 수가 없었다.

월령안이 말했다.

“심 오라버니께서 여기가 누추하다 생각하지 않으신다면, 저희 월씨 가문의 대문은 항상 열려 있어요.”

이렇게 능력도 있고 인성도 좋은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둔다면 그녀가 손해였다.

하지만 월령안은 심민이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일까 봐 걱정되었다. 혹시라도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른다 생각해서, 그에게 여지를 남겨 두었다.

“심 오라버니, 많이 지쳐 보이세요. 아마 오랫동안 피로가 쌓여서 그런 듯하군요. 일단 오라버니가 씻고 쉬시게 안내해 드릴게요. 기운을 차린 다음 다시 이야기해 봐요. 괜찮죠?”

심민은 바삐 오느라 많이 지쳤던 터라 거절하지 않았다. 게다가 월령안이 외출용 가죽신으로 바꾸어 신은 것을 보고, 그녀가 나가려던 참이라고 짐작했다. 당연히 그녀를 잡지 않았다.

심민은 승낙하고, 하인을 따라 객원(客院)으로 쉬러 갔다.

* * *

월령안은 심민을 잘 챙겨준 다음, 원래 계획대로 술에 취해 깰 줄 모르는 유경장을 만나러 행화루로 갔다.

육삼과 육사는 명령을 받고 월령안을 보호했지만, 그녀의 사적인 일에는 간섭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마차 양옆을 지키며 말없이 따라갔다.

마차가 행화루에 들어섰을 때야, 육삼과 육사는 월령안의 목적지가 바로 기루였음을 알게 되었다.

“이건…….”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고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이걸 대장군께 말씀드려야 하나?’

기루는 언제나 밤이면 떠들썩하고 낮에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월령안의 마차가 행화루에 들어섰을 때, 행화루 아가씨들은 모두 자고 있었다. 월령안이 들어서자, 기루의 아가씨들이 모두 놀라 깨어났다.

영영은 행화루의 간판으로서, 월령안이 마차를 타고 행화루에 바로 들이닥쳤다는 소식을 듣자 놀라 달려왔다. 급하게 나오느라 겉옷조차 걸치지 못하고, 잠옷 차림새에 맨발 바람이었다.

“아가씨……. 여기 옷, 신발, 버선 좀…….”

하녀가 옷과 신, 신발, 버선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쫓아 나왔다.

월령안의 뒤를 따르던 육삼과 육사는 거의 헐벗은 모습의 영영을 보고 순간 얼굴이 확 붉어졌다. 하나는 왼쪽, 하나는 오른쪽을 바라보며, 감히 그녀를 쳐다보지 못했다.

하지만 영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앞으로 다가오더니, 다급히 월령안을 밀어냈다.

“아가씨, 왜 벌건 대낮에 왔어요? 변장이라도 좀 하셨어야죠. 빨리, 어서 빨리 가세요……. 여기는 아가씨가 마음대로 들락거릴 곳이 아니에요.”

“영영아, 난 이제 장군 부인이 아니다. 내가 어딜 가든지 모두 내 맘이야. 누구도 나한테 뭐라고 하지 못해.”

월령안은 영영을 피해 앞으로 나아갔다. 하녀의 손에서 겉옷을 건네받아 영영의 몸에 걸쳐 주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옷부터 입어라. 감기에 걸리지 말고.”

“아가씨께 말을 전한 게 정말 후회되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전 아예 말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깟 못난이 따위는 그냥 술에 절어 죽게 놔둘 걸 그랬어요.”

영영은 눈시울을 붉힌 채 울먹거렸다. 눈은 후회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은 예전과는 달라. 괜찮아.”

월령안은 영영의 어깨를 다독이고는 그녀의 옷깃을 여며 주었다. 또 하녀더러 앞으로 가서 영영에게 꽃신을 신기라고 눈치를 주었다.

영영이 옷매무시를 수습하고 나서야, 월령안이 말했다.

“가자. 유경장을 만나러 가자꾸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