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옷을 수선해 달라고요?
월령안은 얼굴빛이 살짝 변했다.
물론 알고 있었다. 청주의 범씨 가문에서는 그녀가 살아서 청주에 도착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규칙을 어겼어요.”
월령안은 눈을 감았다. 눈속에 차오르는 노기를 감췄다.
범씨 가문은 그들 월씨 가문의 모든 가업을 빼앗아 갔다. 월씨 가문 사람인 그녀는 범씨 가문에 어떤 반격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히려 범씨 가문에서 먼저 손을 썼다.
“범씨 가문이 손을 쓴 게 아니오. 청주의 물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소. 폐하…….”
육장봉은 여기까지 말하고 잠깐 멈추었다. 그러나 결국 그 뒷말을 잇지 않았다.
“조계안은 월씨 가문이라는 이름만 사용했을 뿐이오. 어떤 의미에서는 당신의 생사는 중요하지 않소. 주나라에서 당신의 안전을 보장해 줄 사람은 나뿐이오.”
월령안은 짜증이 섞인 말투로 말했다.
“대장군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면 그냥 말씀하세요. 저는 어리석어서 대장군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네요.”
육장봉이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 걸 보면 바라는 게 적지 않은 모양이었다.
월령안은 저도 모르게 등을 곧게 펴고 정신을 가다듬으며 그와 흥정할 준비를 했다.
육장봉은 그런 월령안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표정을 가다듬고 들고 왔던 비단 상자를 꺼냈다.
“그러니 이 옷을 수선해 주시오.”
월령안은 당황했다. 뜻밖에도 육장봉은 수도에서 그녀의 안전을 약속하면서 겨우 옷 한 벌을 수선해 달라고 하는 것이다.
“옷을 수선해 달라고요?”
월령안은 혹시 잘못 들은 게 아닌지, 아니면 지금 눈앞에 있는 육 대장군이 가짜가 아닌지 의심했다.
육장봉이 옷을 수선하고 싶다면, 아무 침모나 찾으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거창한 약속을 해 놓고서는 고작 침모 노릇이나 하라고 하다니.
‘육장봉이 어디가 잘못된 건가?’
“음, 이 옷은 어제저녁에 찢어졌소. 당신이 좀 도와서 수선해 주시오. 그러면 당신이 하늘을 무너트리지 않는 한, 내가 수도에서의 당신의 안전을 책임져 주겠소.”
육장봉은 한쪽에 놓아둔 비단 상자를 월령안에게 건네주었다.
‘어제저녁?’
월령안은 묻지 않고도 어느 옷인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비단 상자를 열고 옷을 꺼냈다.
익숙한 옷을 보아도, 옷에서 나는 은은하고 서늘한 죽향을 맡고 있어도, 더는 설렘도 슬픔도 없었다. 정말 모든 게 지나간 것만 같았다. 이건 정말 좋은 일이었다.
월령안은 가볍게 웃으며 육장봉의 앞에서 옷을 펼쳐 자세히 검사했다. 옷소매 부분에만 찢긴 자국이 조금 있었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수선할 수 있어요.”
월령안은 너무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옷을 보는 눈빛도 너무 담담했다.
육장봉은 치켜 올라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오늘 가져가야겠소.”
그는 이상하게 당황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월령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이 옷감은 마침 집에 있었다. 거기서 실 두어 가닥을 뽑아서 수선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다.
“이 옷은 내가 아끼는 것이오. 월 가주가 수선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소. 월 가주, 괜찮겠소?”
육장봉은 상냥하게 물었다. 그러나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거절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
월령안은 육장봉을 힐끗 바라보고 웃었다.
“괜찮아요.”
‘아끼는 물건? 하! 이렇게까지 열심히, 자기 미모까지 동원하다니, 도대체 무슨 꿍꿍이속이야?’
월령안은 손에 든 옷을 내려다보면서 눈에 어린 경계심을 감추었다. 그녀는 곧바로 육장봉을 수방(繡房 – 옛날 여인들의 거실)으로 안내했다.
얼마 후, 그녀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육장봉이 가져온 옷을 든 채였다. 옆에는 반짇고리가 놓여 있었다.
육장봉은 귀비의(貴妃椅 - 부녀자들의 휴식용으로 만들어진 앉거나 누울 수 있는 긴 의자)에 반쯤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는 얼굴을 옆으로 돌려, 창가에 앉아 그의 옷을 수선하고 있는 월령안을 열심히 바라보았다. 냉담하던 눈에 차츰 다정함이 쌓여 갔다.
묶어서 등 뒤로 늘어뜨린 긴 머리채에서 한 가닥이 앞으로 흘러나와 그의 냉담한 눈매를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다. 입가에 떠도는 옅은 웃음기가 온몸에서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누그러트렸다.
한 명은 앉아 있었고, 한 명은 누워 있었다. 한 사람은 손에 든 옷에 집중하고, 다른 한 사람은 집중하는 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소리 없는 고요함 속에서는 암묵적인 호흡과 따뜻한 분위기가 엿보였다.
창문 사이로 햇빛이 들어와 두 사람을 비추었다. 한가로운 일상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겉모습일 뿐이었다.
사실 월령안은 화가 나 폭발할 지경이었다.
육장봉은 그녀의 안전을 보장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그녀에게 옷 한 벌을 수선해 달라고 한 데다가, 수선하는 것을 지켜보겠다고까지 했다.
월령안은 육장봉의 요구가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에게 보호를 받아야 하니 할 수 없지. 어쩌겠어?’
그러나 그녀가 승낙한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육장봉을 수방에 데려갔더니, 수방에서 냄새가 나니 장소를 바꾸자고 했다.
할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다른 방으로 옮겼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 방은 빛이 잘 들지 않는군. 다른 데는 없소?”
“이 방은 탁자와 의자가 거슬리게 놓여 있군. 다른 데는 없소?”
“이 방에는 왜탑이 없군. 다른 데는 없소?”
“이 방은 주방에서 너무 가깝소. 다른 데는 없소?”
연이어 수십 군데의 방을 돌아다녀도 육장봉은 여전히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트집을 잡았다. 게다가 매번 그 이유도 달랐다.
월령안은 그와 함께 돌아다니느라 너무 애먹은 나머지, 이젠 화도 나지 않았다.
“대장군, 아예 화원의 정자로 갈까요?”
얼굴에 띤 미소를 더는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이미 육장봉과 함께 그녀의 집을 한 바퀴 다 돌았다. 그녀와 노인이 머무는 건물에만 가지 않았다.
노인의 처소에는 육장봉을 데리고 갈 수가 없었다. 그를 데리고 가더라도 약 냄새가 난다고 트집을 잡을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녀의 처소에는 더더욱 육장봉을 데리고 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육장봉은 그리 쉽게 내쫓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월령안의 제안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먼저 제안했다.
“당신 서재로, 안 서재로 가지.”
안 서재와 그녀의 침실 사이에는 자그마한 화원 하나가 있었다. 월령안은 잠깐 생각하더니 승낙했다.
하도 육장봉에게 시달렸더니 화를 낼 기운조차 없었다. 지금 그가 입을 열었고, 말을 꺼낸 곳도 마침 그녀의 한계선 안에 있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안 서재로 갔다.
월령안이 평소 손님을 만나는 곳은 모두 바깥 서재였다. 안 서재는 그녀가 책을 보거나 장부를 계산하는 곳이었다. 비록 깔끔하게 정리되었지만, 바깥 서재처럼 공식적인 공간은 아니었다.
안 서재에는 그녀가 힘들면 휴식할 수 있도록, 왜탑(矮榻 – 눕거나 앉을 수 있는 나지막한 평상)뿐만 아니라 귀비의도 놓여 있었다.
육장봉은 안 서재에 들어서자, 월령안의 접대도 필요 없다는 듯 귀비의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창가의 왜탑은 그녀에게 남겨 주었다.
월령안은 힐끗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까짓 거 의자 하나. 나중에 부엌으로 보내 땔감으로 태워 버리라고 해야겠다.’
월령안은 무표정하게 왜탑에 앉았다. 그리고 반짇고리를 꺼내더니 똑같은 옷감에서 여러 개의 실을 뽑았다. 그다음 육장봉의 옷을 수선하기 시작했다.
월령안의 바느질 솜씨는 훌륭하다고 할 만한 수준은 아니라서, 꽃 같은 건 수놓을 줄 몰랐다. 그래도 옷 수선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녀의 바느질 솜씨는 침모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수선한 흔적이 좀 남을 수밖에 없지만, 육장봉도 별로 개의치 않으리라 생각했다.
육장봉이 옷을 수선해 달라고 부탁한 데에는 분명 다른 속셈이 있었다. 그녀가 바보도 아니고. 육장봉이 진짜 이 옷을 아낀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찢어진 데는 한 군데뿐이었다. 월령안은 반 시진을 들여 수선을 끝냈다.
일어나서 수선한 옷을 육장봉에게 보여주려던 찰나였다. 그가 귀비의에서 잠들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서재의 귀비의는 월녕안의 키에 맞춰 만든 것이었다.
월령안은 누우면 딱 맞았지만, 육장봉이 눕기에는 꽤 불편했을 것이다. 몸을 뒤척이기도 힘들었으리라. 특히 그의 두 다리는 모두 의자 밖으로 나와 있었다.
‘이래도 잠이 들 수 있다고?’
월령안은 옷을 손에 든 채 육장봉 앞에 서서 화가 나서 웃고 말았다.
전장에서 생사를 넘나들고도 살아 돌아온 육 대장군이, 낯선 곳에서 이렇게 깊이 잠들 수는 없었다. 그녀가 앞에 서 있는데도 모를 리가 없었다.
육장봉은 자는 척하는 게 분명했다.
자는 척하는 사람은 절대 깨울 수가 없다.
“쉬고 싶으면 쉬세요.”
월령안은 잠깐 망설이다가 몸을 돌렸다. 옷은 잘 개켜 비단 상자에 도로 담고, 왜탑 위에 놓아두었다. 그다음 귀비의에 누워 있는 육장봉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몸을 돌려 서재를 빠져나갔다. 그가 계속 자는 척하게 내버려 두었다.
월령안의 생각대로 육장봉은 잠들지 않았었다. 그녀가 가 버리자 그는 금세 눈을 떴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에는 담담한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곧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는 이번에야말로 진짜로 잠들었다가 어둠이 깃든 다음에야 깨어났다.
몸을 일으켜 창밖의 황혼을 바라보던 그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이렇게 깊게 잠든 건 꽤 오래간만이었다.
월씨 저택에서 반나절 잠을 잔 육 대장군은 기운을 한껏 차렸다. 그리고 월령안이 수선한 옷을 가지고 가 버렸다.
월령안에게 작별인사를 하지도, 남아서 저녁 식사를 하지도 않았다.
월령안은 이 소식을 듣고 나서 그저 알았다고만 대답했다. 어차피 그녀는 육장봉과 단지 거래를 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육 대장군이 남아서 식사를 하지 않으니, 더 상대하기 힘든 사람이 밥때에 딱 맞춰서 찾아왔다.
“육장봉은?”
조계안은 정문을 거치지도 않고, 누구의 통보도 없이 식당 안에 소리소문없이 나타났다. 한창 식사를 하던 월령안은 깜짝 놀라 손에 든 그릇을 깨뜨릴 뻔했다.
“조 대인?”
월령안은 숨을 고르고서 그릇을 내려놓았다. 얼굴빛이 조금 침울해졌다.
‘조 대인이 사람을 놀라게 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좀 알아야 하는데.’
조계안은 차가운 눈길로 한 번 쓱 훑어보고는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왜 혼자 있느냐? 육장봉이 이틀 동안 줄곧 네 집에서 밥을 먹었다고 하던데? 오늘도 오후 내내 네 집에서 머물렀다면서?”
“대장군은 일이 있어서 왔었습니다. 일이 끝나고 돌아갔고요.”
월령안의 표정은 다소 난감해 보였다.
다사다망한 조 대인마저도 육장봉이 이틀 동안 날마다 그녀의 집으로 찾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 나와 육장봉에 관한 소문은 더욱 과장해서 퍼지지 않았을까? 이거 해명할 수나 있을지 모르겠네.’
“빨리도 내뺐군.”
조 대인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더니 전혀 내외하지 않고 월령안의 맞은편에 앉으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난 아직 식사 전이다. 령안, 한 끼 좀 얻어먹어도 괜찮겠지?”
월령안은 속이 더욱 답답해졌다.
“저는…… 괜찮아요.”
‘자리에 다 앉아 놓고. 괜찮지 않으면 어쩌려고? 하나같이 도대체 뭐 하는 짓들이람? 철광산 때문이라면 빨리 단념하시지. 난 어떻게 해도 입을 열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