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공짜 호위가 없어졌군
그러나 이각도 지나지 않아, 집사는 옷을 들고 돌아왔다.
“장군…….”
“어찌 된 일이냐?”
육장봉은 친위대가 추밀원에서 가져온 문서를 보던 중이었다. 집사가 옷을 들고 돌아오자, 그는 손에 든 서류를 내려놓았다. 차가운 얼굴에 아주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옷은 수선이 끝났느냐?”
“장군, 이 옷은 저택의 침모가 수선할 수 없다고 합니다. 옷감이 너무 귀해서 침모가 감히 손을 댈 엄두를 못 내네요. 또 우리 저택에는 마땅한 천이 없다고 합니다.”
늙은 집사는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얼마나 귀한 것이길래?”
육장봉은 가볍게 탁자를 두드리며 물었다.
“침모 말로는 이 옷감은 은사(銀絲)를 날실로 해서 짠 촉금(蜀錦)으로, 삼 년에서 오 년이 걸려야 겨우 한 필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아마 황궁에도 없을 거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귀한 물건은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 해도, 감히 황궁에 진상하려 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것이었다.
가령 황궁의 어느 분이 마음에 들어 해마다 진상하라고 한다면, 죽어 나가지 않겠는가.
궁중의 귀인들은 상대방이 내놓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상관하지 않았다. 해마다 진상하기로 결정하면, 한 해라도 빠트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귀한 옷감은 대부분 황궁에 보내지 않았다. 생산량을 확보할 수 있는 것만 귀인들 앞에 내놓았다.
“됐다. 놔두어라.”
육장봉이 탁상을 힘차게 두드렸다.
“예, 장군.”
집사는 바삐 옷을 내려놓고는 예를 올리고 곧 물러났다. 한발이라도 늦었다가는 이 골칫거리를 떠안게 될까 봐 두려웠다.
“삼 년에서 오 년이 걸려야 겨우 한 필을 얻을 수 있는 옷감이라. 이런 걸 참 아낌도 없이 썼군.”
육장봉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펼쳐 보았다. 옷소매의 찢긴 부분을 살펴보자, 눈에 웃음기가 더욱 크게 번졌다.
“보아하니 월령안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겠어.”
육장봉은 가볍게 웃으며 옷이 접힌 흔적을 따라 다시 조심스럽게 갰다.
고작 옷을 개는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육장봉은 조금도 빈틈이 없었다. 표정도 자못 엄숙해 마치 무슨 큰일을 치르는 것 같았다.
육장봉은 옷을 비단 상자에 넣어 가볍게 들었다. 그리고는 아무도 거느리지 않고 혼자서 말을 타고 어딘가로 향했다.
반 시진 뒤, 송취 골목에 육장봉이 나타났다.
마침 점심때였다. 송취 골목에 사는 부자와 관리들은 대부분 이 시간에 귀가했다.
그런데 갑자기 혼자 말을 달리는 육장봉이 나타나자, 가마를 메는 가마꾼, 마차를 모는 마부, 길을 가던 행인까지 모두 어리둥절했다.
“무슨 일이냐?”
귀인들은 언짢아서 물었다.
“어르신, 육 대장군이 월씨 저택으로 갔습니다.”
마부들과 가마꾼들도 요즘 주변에서 육 대장군에 대한 소문을 적잖게 들었던 터라, 당연히 그를 알아보았다.
“육 대장군이라고?”
마차며 가마 안에 있던 귀인들은 너도나도 머리를 내밀어 밖을 내다보고는 깜짝 놀라 멍해지고 말았다.
“육 대장군이 이제는 전혀 숨기려 하지도 않는구나? 눈가림할 하인도 거느리지 않는다니?"
“월씨 가문의 그분이 황제의 눈에 들었다 하지 않았었나? 육 대장군은 황제의 여인을 빼앗으려는 건가?”
소식에 밝은 이는 춘일연에서 발생한 사건을 알고 있던 터라, 몰래 중얼거렸다.
“역시 육 대장군은 보통 간이 큰 게 아니야. 참 존경스럽군.”
* * *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떠들어도, 월씨 저택의 대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가는 육 대장군에게는 전혀 영향이 미치지 않았다.
“대장군.”
월씨 가문에 새로 온 하인마저도 육장봉이 와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가 너무 자주 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익숙해져, 유난스러운 일 같지도 않았다.
“너희 아가씨는?”
육장봉은 말을 묻는 사이에 월씨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하인의 안내도 없이 익숙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평소대로라면 지금쯤 아마 식사하실 준비를 하고 계실 겁니다.”
‘육 대장군은 식사 시간에 딱 맞춰 와 놓고는 우리한테 뭘 또 물으시나? 참 가식적이셔.’
“주방에 요리 두 개를 추가하라고 해라.”
육 대장군은 조금도 내외하지 않고 분부했다.
“예, 대장군.”
월씨 가문의 하인은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주방에 요리를 더하라고 알리는 게 먼저인지, 아니면 아가씨에게 귀띔해 드리는 게 먼저인지 망설이는 동안, 눈앞에 있던 육 대장군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대장군께서도 참 너무 허물없이 구시는 거 아닌가.’
하인은 하는 수 없이 한숨을 내쉬고는 주방에 달려가 요리를 추가하라고 알렸다.
월령안은 다시 한번 식사 시간에 육장봉을 보게 되자, 화를 낼 기운도 사라졌다. 그에게 예를 올리고 하인에게 요리를 더 준비하도록 분부하려던 찰나였다.
그녀가 입을 열자마자, 육장봉이 저지했다.
“필요 없소. 이미 분부했소.”
월령안은 어이가 없어 잠자코 있었다.
‘육장봉은 이제 내 집을 장군부의 별장으로 여기는 건가? 왜 자기 집에서보다 더 마음대로 구는 거지?’
월령안은 몰래 한숨을 쉬며 애써 웃음을 지었다.
“대장군께서 이 시간에 오시다니, 무슨 급한 일이 있는지요?”
‘매번 밥때를 맞춰 오다니, 육장봉도 참 너무하네.’
“밥부터 먹고 나서 말합시다. 난 아직 아침도 못 먹었소.”
육장봉은 손에 들었던 비단 상자를 한쪽에 놓아두었다. 열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월령안은 힐끗 훑어보고 육장봉이 찾아온 이유가 그 상자와 관련 있음을 알아챘다. 아주 조금 호기심이 동했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기다리면 육장봉이 스스로 말할 것이다.
주방에서는 육장봉의 분부에 따라 추가한 요리를 재빨리 내왔다. 두 사람은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육장봉은 정말로 배가 고팠는지 음식 대부분을 먹어 치웠다. 월령안은 얼마 먹지도 못했는데, 탁상 위의 음식이 거의 다 비었다.
월령안은 빈 그릇을 들고 놀란 눈빛으로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이렇게 우아하게 먹으면서 어쩜 한 톨도 안 남기고 싹 비웠지? 장군부에서는 이 사람을 굶기는 건가?’
“먹은 게 얹힌 거요? 나와 같이 좀 걷겠소?”
월령안의 놀란 눈빛에 육장봉은 매우 침착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만 보면 눈 깜짝할 사이에 식탁 위의 모든 음식을 다 먹어버린 사람은 그가 아닌 것 같았다. 심지어 여유롭게 월령안을 놀리기까지 했다.
월령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기 집에 있으면서도 배불리 먹지 못했다.
그녀가 아무리 남의 비위를 잘 맞춰 주더라도, 본심과는 다르게 너무 많이 먹었으니 소화하러 산책해야겠다는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월령안은 그의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다음 화청으로 자리를 옮겨 그가 찾아온 이유를 물으려고 했다.
그러나 말머리를 떼자마자, 육장봉이 말을 끊었다.
“나는 간밤에 눈을 붙이지 못했소.”
‘이건 무슨 뜻이지? 당신이 눈을 붙이지 못한 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고?’
월령안은 육장봉을 힐끗 바라보더니 건성으로 한마디 했다.
“장군께서 수고가 많으셨네요.”
“어젯밤, 북요 사람들이 군영을 습격했소.”
육 대장군은 말솜씨가 능수능란했다. 거짓말은 하지 않되, 진실은 반 정도 숨겨 말해야 한다는 법칙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게 저와 무슨 관계가 있나요?”
월령안은 육장봉에게서 몇 번이나 손해를 보았다. 지금은 요령이 생겨서 의문이 있으면 직접 물었다. 그녀가 아무리 잔꾀가 많더라도, 육장봉에게는 적수가 못 되었다.
“당신이 북요에 보낸 사람들이 소식을 전해오지 않았소?”
육장봉은 찻잔을 들고 되물었다.
“남원대왕을 바꾸는 일 말인가요?”
그녀는 어제 이 소식을 받았다. 상천이 긴급으로 전해오기를, 보름 안에 성과가 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일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진짜 야율제가 죽었으므로, 그녀의 위기는 이미 해소되었다. 가짜 야율제가 그녀를 건드리지 않는 한, 그가 남원대왕의 자리에서 언제 쫓겨나든지 상관없었다.
육장봉이 북요의 계획을 지속하라고 하지 않았다면, 그녀도 상천과 추수에게 손을 떼라고 했을 것이다. 북요의 귀족들은 그렇게 쉽사리 만족시킬 수가 없었다. 설령 만족시켰다 해도 그들은 언제 변덕을 부릴지 몰랐다.
북요 귀족들에 대한 투자는 원가가 높지만, 수확이 너무 적어 수지가 맞지 않았다.
“음.”
육장봉은 가볍게 대답했을 뿐, 한마디도 더하지 않았다.
월령안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물었다.
“그게 어젯밤 북요에서 군영을 습격한 것과 무슨 관련이 있나요?”
육장봉이 대답했다.
“북요인들은 곧 변경에 도착할 거요. 그들이 밤에 군영을 습격할 수 있으면 당연히 월씨 저택도 습격할 수 있소. 야율제는 북요 대황자의 사람이오. 북요 대황자 야율융진이 지금 사절단에 있소.”
영리한 월령안에게는 이 정도의 소식만 알려 주면 충분했다. 그다음은 그녀가 덫에 걸려들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월령안은 순간 숨을 한껏 들이켰다. 얼굴의 미소를 거두고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대장군께서는 무슨 뜻이신지요?”
“내 호위병들은 당분간 한가하오.”
육장봉은 의미심장하게 월령안을 한 번 쳐다보았다. 그다음 옆에 놓인 차를 들고 유유히 마시기 시작했다.
월령안이 물었다.
“십이 장군은 언제 시간이 있나요?”
‘지금 나에게 자기 호위병을 고용하라는 건가? 장군부에 돈이 모자라나?’
육장봉은 고래를 저었다.
“그놈은 군영에서 훈련하고 있소. 사절단 사람들이 가지 않는 한, 그놈은 시간이 없소.”
만약 필요하다면, 그는 육십이가 계속 돌아오지 못하게 할 수도 있었다.
“십이 장군이 주나라를 대표해서 북요인들과 겨루는 건가요?”
주나라가 북요와 무예를 겨룬다는 사실을 월령안도 알고 있었다. 다만 육장봉이 자기의 호위병을 보낼 줄은 몰랐다.
육장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의 군마가 가장 훌륭하니, 그중 한 경기에 나갈 수 있소.”
원래는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육십이가 참가해도 될 것 같았다.
“하하……. 그것참 잘됐군요.”
‘그래서, 내가 준 말 때문에 참가시킨다고? 이러면 내 손으로 참가시킨 꼴이네.’
월령안은 울고 싶어졌다.
‘공짜 호위가 없어졌군.’
“월 가주, 내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소.”
육장봉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아무렇게나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재촉했다.
월령안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대장군의 호위병은 모두 관직을 갖고 있는 분들이라, 제가 고용할 엄두가 안 나네요.”
‘육장봉이 지금 자기 호위병을 강매하는 건가? 그것도 거절도 못 하게?’
“괜찮소. 그들은 이름을 숨길 거요.”
부하들이 월령안의 씀씀이가 대범하다고 떠들지 않았던가. 육장봉은 그들에게 돈을 벌 기회를 줄 생각이었다. 그럴 재주가 있으면 마음껏 벌 수 있게 말이다.
월령안이 물었다.
“그럼 제가…….”
“그건 급하지 않소.”
육장봉은 또 한 번 월령안의 말을 가로챘다.
“듣기로는 말 상인에게 준마를 한 필 남기라고 했다던데? 마침 이번 대회에 준마 한 필이 모자라오. 월 가주께서는 아깝겠지만, 내어 줄 수 있겠소?”
‘수횡천, 그 가난뱅이 무림맹주는 계속 두 다리로 뛰어다니라고 해. 말 따위는 꿈도 꾸지 마시지.’
월령안은 이를 악물고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네.”
육장봉은 만족스럽다는 듯 말했다.
“한 가지 더 도와주시오. 그러면 청주에 가기 전까지 변경에서의 안전을 보장해 주겠소.”
육장봉은 월령안이 거절하지 못하도록 한마디 덧붙였다.
“참, 깜빡했군. 청주 쪽에서 변경에 사람을 보냈소. 춘일연이 끝난 뒤에 유경장과 접촉했다더군. 무슨 뜻인지 알고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