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복과 화가 함께 닥치는구나
육장봉은 두루마기를 갈아입었다. 월령안이 직접 만든, 어젯밤에 찢어진 두루마기는 잘 개켜서 서재 안의 연탑(軟榻 – 누울 수도, 앉을 수도 있는 가구의 일종) 위에 놓아두었다.
“장군, 제가 방금 소식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북요에 보낸 야율제를 질책하고 북요에서 야율제를 서민으로 강등해 달라는 국서는 대황자 야율융진이 가로챘습니다.”
육일이 이토록 빨리 온 이유는 마침 그를 찾으러 가던 암위와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육장봉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야율융진의 짓이었구나.”
어젯밤의 침입자는 십중팔구는 그일 것이다.
육장봉은 예전에 야율융진과 겨룬 적이 있었다. 어젯밤의 침입자는 정체를 감추려고 애썼지만, 공격할 때의 습관은 속일 수가 없었다.
“제 실책입니다. 장군께서 벌하여 주십시오.”
북요 사절단에 야율융진이 숨은 사실을 알아내지 못한 것은 큰 실수였다.
어젯밤에 장군이 갑자기 군영으로 가서 침입자를 찾아내지 못했더라면, 아마 지금까지도 북요의 대황자 야율융진이 사절단에 숨어든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줄곧 엄격하던 육장봉은 육일을 처벌하지 않았다. 대신 굳은 얼굴로 물었다.
“북요로 간 월령안의 사람은 어쩌고 있느냐?”
“제법 성과가 있는 듯합니다. 북요에서 야율제는 생모가 불확실하고, 인성이 오만불손하며, 일 처리도 종잡을 수 없다는고 불만이 있다고 합니다. 북요에서도 그놈을 좋지 않게 보고 끌어내리려는 사람이 적지 않답니다.
야율제에게 이복 아우가 둘 있는데, 그들 어머니의 친정은 북요 귀족이라고 합니다. 먼젓번에 야율제가 전쟁에서 손해를 보자 그 둘은 야율제를 끌어내리려고 했답니다. 그러나 야율제는 여전히 아버지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어서 그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야율제의 두 이복 아우는 서로 믿지 않고 협력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야율제에게 맥을 못추고 당했다는군요.
그런데 월 낭자가 파견한 사람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그 두 사람이 손잡게 했습니다. 또 그 둘에게 거액의 자금을 제공하여, 그들이 북요 귀족과 황후를 매수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북요 황제 앞에서 둘을 칭찬하는 말을 하도록 했습니다. 저희가 북요 궁중에서 얻은 소식에 의하면 북요 황제도 슬슬 야율제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북요 황제가 기회를 봐서 야율제를 남원대왕에서 폐하겠다고까지 말했다 합니다.”
육일은 말을 마치고 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찌 되었건 그들은 북요에서 성과를 거둔 셈이었다. 비록 월 낭자 덕을 보기는 했지만.
“북요에 있는 사람들에게 월령안을 도와주라고 해라. 난 북요 사절단이 변경에 들어서기 전에, 먼저 야율제가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받아야겠다. 절대 그 가짜가 남원대왕의 신분으로 변경에 들어서게 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육장봉은 가짜가 야율제 노릇을 하며 돌아다니는 것은 개의치 않았다.
야율제가 주나라에서 죽었다가는 그들도 난감해졌다. 차라리 가짜가 사람들 앞에 나서 준다면 그들도 일거리를 덜 수 있었다.
그러나 가짜 야율제를 북요 남원대왕으로 둘 수는 없었다.
진짜 야율제는 야심이 가득했다. 그는 청희 장공주가 자신을 위해 힘을 쓰게만 했지, 자기가 청희 장공주의 힘이 되어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짜는 달랐다. 가짜는 잠한성이 훈련한 사람이었다. 가짜의 주인은 청희 장공주였다.
청희 장공주가 북요 남원대왕의 권리를 이용하게 둘 수는 없었다.
북요에 연관된 일이라면 사소한 일은 없었다. 그가 처리할 수 있다 해도, 모두 장악했다 하더라도 황제에게는 보고해서 사전에 대비할 수 있게 해야 했다.
육일의 보고를 들은 육장봉은 목욕하고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말을 타고 입궁하여 황제를 만났다.
황제는 오늘도 여전히 조회에 나가는 대신 난각에서 공무를 처리하는 중이었다. 내관의 보고를 듣자 깜짝 놀랐다.
‘장봉이가 지금 입궁했다니, 분명 중요한 일이 있는 모양이군.’
황제를 바로 육장봉을 들여보내라고 명령했다.
육장봉의 눈 밑이 거무스름한 것을 보자, 황제는 살갑게 물었다.
“장봉아, 어젯밤에 군영에 가지 않았느냐? 그런데 오늘 이렇게 일찍 입궁하다니. 온종일 잠을 못 잔 것이냐?”
“군중에 일이 좀 생겼습니다.”
육장봉은 이틀 동안이나 잠을 자지 못했다. 그러나 여전히 비범하고 출중해 보였으며, 고귀한 기운을 풍겼다. 눈에 살짝 핏발인 선 것 말고는 전혀 피곤한 기색을 찾을 수 없었다. 단지 목소리가 약간 갈라졌을 뿐이다.
“무슨 일이냐? 심각한 일이냐?”
황제는 다급히 물었다.
두 나라의 비무 대회가 코앞이었다. 육장봉의 부하들은 주나라의 희망이었다. 지금 사고가 벌어져서는 안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주나라의 남아들이 전장에서 목숨을 바쳐 얻어낸 모든 것을 국가 협상에서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어젯밤, 신이 군영에서 침입자를 한 명 발견했습니다. 겨루어 보았는데, 그자는 북요의 황태자 야율융진으로 추정됩니다.”
육장봉이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야율융진이 사절단에 숨어 있었다고? 지금까지 전혀 몰랐느냐?”
황제도 무거운 얼굴을 했다.
“그렇습니다.”
육장봉이 가볍게 대답했다.
“잡아들이지는 못했느냐?”
황제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육장봉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저 덤덤하게 고개를 저었다.
“잡지 못했습니다.”
“그 많은 사람이…….”
황제의 기분이 언짢은 게 확실했다. 질책하는 기색이 드러났지만, 말을 맺기 전에 갑자기 멈췄다.
“짐이 어리석었구나. 북요의 황태자가 감히 군영에 잠입할 정도라면, 분명 성공할 거라는 보장이 있어서 그랬겠지. 만약 네가 어젯밤 군영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놈의 존재조차 발견하지 못했겠구나.”
육장봉은 해명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적은 어두운 곳에, 그는 밝은 곳에 있었다. 이런 때 벌어지는 육탄전이라면 대부분 어두운 곳에 있는 사람이 더 유리했다.
이 일이 확실히 그의 실책임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황제가 그를 탓하는 것도 당연했다.
“폐하, 북요에 보내신 국서가 언제 도착합니까? 북요에서 야율제를 폐한다고 했습니까? 새로운 남원대왕을 임명한다고 했는지요?”
육장봉은 야율융진이 국서를 가로챈 일을 말하지 않았다.
황제가 직접 조사해야만 하는 일도 있었다. 황제는 결국 황제이니, 그는 신하로서 황제의 체면을 살펴야 했다.
그가 먼저 말한다면 황제가 난감해질 것이다.
“북요 쪽에서는 아직 소식이 없다. 짐이 사람을 보내 재촉을 하마.”
황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일이 잘못됐다는 느낌이 어렴풋이 들었다.
그들이 북요에 보낸 국서는 가장 빠른 속도로 보냈다. 이변이 생기지 않는 이상, 사흘이면 충분히 북요에서 받을 수 있었다.
원래대로면, 북요에서 소식을 보내왔어야 할 시기였다. 하지만 벌써 여러 날이 지났는데도 북요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국서의 행방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육장봉은 잠시 멈칫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가짜 야율제는 청희 장공주의 사람입니다.”
“짐도 알고 있다.”
황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퉁명스럽게 육장봉을 노려보았다.
“네가 한 짓을 좀 봐라.”
육장봉이 말했다.
“진짜 야율제가 죽지 않았다면 청희 장공주는 계속 숨어 있었을 겁니다. 나중에 그 정체가 드러나면 위험이 더욱 컸을 겁니다.”
그가 야율제를 죽인 것은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상황을 장악할 수 있었다. 더욱 악화되지는 않도록 할 것이다.
“복과 화가 함께 닥치는구나.”
황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봉아, 만약 짐이 영녕후에게 청희 장공주를 죽이라고 눈치를 준다면 어떨 것 같으냐? 소용이 있겠느냐?”
육장봉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 청희 장공주는 그렇게 쉬운 사람이 아닙니다. 영녕후가 손을 쓴다면 오히려 영녕후가 죽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리고 우리가 청희 장공주의 음모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청희 장공주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크게 소란을 피울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내전을 치러야 할지도 모릅니다.”
‘폐하도 참, 순진하시군.’
황제는 얼굴의 웃음을 거두고 불쾌하다는 듯이 말했다.
“청희 장공주한테 병력이 없을 수도 있어. 영녕후 그 늙은 여우도 만만치 않아. 청희 장공주가 자기 병권을 주무르게 두지는 않을 거다.”
“청희 장공주는 세자비입니다. 영녕후는 청희 장공주를 경계할 수는 있어도, 자기 아들을 경계하지는 않을 겁니다. 영녕후가 그 세자에게 일을 맡기지 않는다고 해도, 세자라는 신분 자체가 일종의 허가입니다. 때에 따라서는 아주 쓸모가 있을 겁니다. 특히 영녕후가 죽은 다음, 영녕후부를 대표하는 사람은 세자입니다.”
황제는 역시 청희 장공주를 얕보고 있었다. 아니, 청희 장공주의 위장이 너무 성공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황제는 그녀의 위험성을 자꾸 잊어버리고 있었다.
육장봉은 재차 황제를 일깨워 줄 수밖에 없었다.
“폐하, 잊지 마십시오. 북요의 남원대왕에게는 병권이 있습니다. 청희 장공주의 날개를 꺾기 전까지는, 저희가 손을 쓰기 힘듭니다. 청희 장공주가 저희를 끌어들여 함께 죽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짐이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구나.”
황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기색이 조금 우울해 보였다.
이를 본 육장봉이 위로를 건넸다.
“폐하, 이 일은 서두르시면 안 됩니다. 지금 우리가 영녕후부를 포위했으니, 청희 장공주는 아직 자기가 표적임을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충분한 시간이 있습니다.”
황제는 그나마 좋은 황제였다. 적어도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렇겠구나. 청희 장공주는 아직 자기가 드러난 줄 모르니 섣불리 일을 벌이지는 못할 것이다. 지금의 상황은 우리에게 더 유리한 게 맞다.”
황제는 자세히 생각한 끝에 다시 사기가 오른 듯 보였다.
육장봉은 그를 보더니 한마디를 더 했다.
“폐하, 북요의 황제가 새로운 남원대왕을 임명하려면, 국서만 가지고 압력을 넣는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우리도 몰래 작전을 짜야 합니다.”
월령안의 청주행은 바뀔 수 없는 일이었다. 황제가 월령안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바꿀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가 월령안에게 한 가지 요소를 더해 주면 되었다. 황제가 월령안의 능력과 실력을 직면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월령안을 아무리 싫어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계속 쓰게 하면 된다.
결국, 황제도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특히 황제는 명군이 되고 싶은 사람이니 더더욱 고집을 부리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종묘사직을 위한 일이라면, 아무리 내키지 않아도 할 것이다. 종묘사직에 유리한 사람이라면, 아무리 싫어해도 중용할 것이다.
“북요의 일은 네가 더 잘 알지. 어떠한 방법이 있느냐?”
황제는 함부로 이래라저래라하는 대신, 육장봉의 의견을 물었다.
육장봉이 대답했다.
“월령안의 사람이 북요에 있는 야율제의 두 이복 아우에게 자금을 대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거금을 들여 북요 귀족과 황후를 매수했지요. 그들이 북요 황제 앞에서 야율제에게 불리한 말을 하라고 했답니다. 지금은 제법 성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많은 일을 벌일 필요는 없습니다. 몰래 월령안에게 힘을 보태기만 하면 됩니다.”
이 일은 황제가 사람을 시켜 조사하면 금방 알게 될 일이었다. 비밀리에 진행되는 일이지만, 제왕에게는 비밀이 아니었다.
황제는 차갑게 코웃음을 치더니 언짢은 얼굴로 말했다.
“월령안이 도대체 뭘 할 거란 말이냐? 미리 새 남원대왕을 매수하기라도 했단 말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