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장군께서 왜 저러세요?
말을 마친 그녀는 또 참지 못하고 투덜거렸다.
“잠한성 그 비겁한 자식, 분명 수 오라버니의 성격을 알고 술수를 부린 거예요. 무슨 마지막 유언이랍시고, 죽기 전에 아쉬움을 남겨 두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쳇, 자기에게 친구며 제자가 그렇게 많으면서 왜 하필 친분도 별로 없는 수 오라버니를 찾느냔 말이에요. 수 오라버니를 이용하려는 게 뻔하잖아요!”
“약속을 소중히 여기고 생사는 가볍게 생각하는 대협이로군.”
노인은 그 말을 듣고 감탄했다. 그리고 월령안의 씩씩거리는 모습을 보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넌 처음에 수횡천의 이런 모습을 좋게 보지 않았느냐? 그래서 뻔뻔하게 들러붙어 오라버니로 모시겠다고 했던 거고. 왜, 지금은 또 그자가 너무 의리를 따지니 싫으냐?”
월령안이 대답했다.
“싫지는 않아요. 그저 이 일이 성가시게 돼서 그렇죠. 육장봉 그 인간이 좋은 놈은 아니에요. 하지만 철광산을 물고 늘어지는 것 말고, 다른 일에서는 그나마 공평한 편이거든요. 맞아요, 육장봉은 제 편을 많이 들어줘요. 제게 강조해서 충고한 걸 보니 뭔가를 아는 게 분명해요.”
노인의 말이 맞기는 했지만, 그녀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노인에게 자기를 비웃을 기회를 줄 수는 없었다.
노인도 웃음거리로 삼으려던 생각을 버리고,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령안아, 육장봉의 충고가 맞다. 사사는 보통 사람이 아니야. 사사는 사람을 죽이도록 훈련받았고, 주인에게만 충성하지. 그런 사람은 살려 두어서는 안 된다. 살려 두었다가는 화근이 될 뿐이다. 깨끗하게 제거하지 못하면 조만간 사고가 생길 거다. 게다가 사사들은 훈련도 쉽지 않아. 사사의 훈련 방식은 최고의 세도가들이나 아는 것이야.
잠한성은 일개 강호인이니, 사사를 훈련하는 방법을 알 리가 없어. 내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잠한성이 사사를 훈련한 방법은 청희 장공주가 알려 주었을 거다. 그리고 청희 장공주가 사용한 수법은 황실의 것…….”
노인은 무언가 떠오른 듯했다. 그의 시선이 흔들렸다. 더는 말할 생각이 없는 게 분명했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월령안을 보았다. 혼탁한 눈에는 예리함이 깃들어 있었다.
“잠한성이 훈련한 사사들이 충성하는 대상은 잠한성이 아니다. 바로 청희 장공주야. 그래서 그 사람들을 절대 남겨 둘 수는 없다. 살려 두어서는 절대 안 돼. 그놈들이 살아 있다면 네게도 아주 불리해. 령안아, 알겠느냐?”
노인의 어조는 마지막으로 갈수록 엄격해졌다.
“알겠어요.”
월령안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깜짝 놀랐다. 어쩐지 아주 큰 일을 알게 된 것 같았다.
노인과 황실은 보통 관계가 아닐 것 같았다.
‘영감님이 혹시 황실에서 키운 사사가 아니겠지? 아니, 아니야. 영감님의 분위기를 보면 사사 같지는 않잖아. 오히려 사사를 훈련하는 우두머리 같은걸.’
노인 본인은 알아차리지 못했을지도 몰라도, 가끔 그녀 앞에서는 지배자 같은 위압감을 내뿜고는 했다.
노인은 보통 사람이 아닌 게 분명했다.
“무슨 허튼 생각을 하는 거냐? 너무 심심한 게냐?”
노인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손을 들어 월령안의 머리를 쥐어박으려고 했다.
“꼬맹이는 이런 쓸데없는 생각은 안 해도 된다. 그러다 키 안 큰다.”
월령안은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폴짝 뛰어오르며 노인의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얄밉게 웃으면서 말했다.
“제 생각에는…… 손 신의가 온다면, 치료받느라 바쁘실 텐데. 영감님이 절 혼낼 정신이 있을까요?”
“무슨 헛소리냐. 됐다. 온종일 제대로 자지도 못했을 테니 일찍 돌아가서 쉬어라. 수횡천의 일은 육장봉의 말을 들어라. 절대로 끼어들지 말고.”
노인은 화도 나고 웃기기도 했다. 그래도 월령안을 아끼는 마음이 컸다. 잠시 멈칫하더니 또 말했다.
“다른 건 내게 맡기거라. 내가 처리하마.”
“아니에요, 영감님, 절대 이 일에 손대시면 안 돼요. 수 오라버니는…….”
월령안은 어두운 곳에 있어, 노인은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녀의 희미한 목소리만 들렸다.
“영감님, 사람 사이의 거리는 각자 다르잖아요. 제 마음속에서 영감님보다 더 중요한 사람은 없어요. 수 오라버니가 제 목숨을 구해 줬다고 해도, 영감님만큼 중요하지는 않아요.”
노인은 멍해졌다. 하지만 그가 감동하하려는 때, 월령안의 심술궂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고 너무 감동하지는 마세요. 전 영감님을 기쁘게 해 주려고 아무 말이나 한 거예요. 절대로 감동했다고 우시면 안 돼요. 영감님은 철면피가 아니니까, 제 앞에서 울지는 못하실 걸 알아요. 전 그만 갈게요. 천천히 감동하시고 천천히 우세요.”
말을 마친 월령안은 즐거운 표정으로 떠나갔다.
“이 망할 계집애가.”
노인은 손을 들어 얼굴을 만져 보았다. 그제야 자신이 눈물을 흘렸음을 깨달았다.
그의 일생을 돌이켜 보면, 출신은 고귀했으나 운명은 기구했다. 평생 외로이 비바람에 휩쓸려 살아야 했다.
이번 생에는 말년을 누리지 못하고, 외롭게 죽어 갈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늘그막에 저렇게나 살뜰한 아이가 그의 곁에 머물 줄 누가 알았겠는가.
* * *
육장봉은 날이 저물기 전에 성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먼저 도착한 친위대와 합류한 뒤, 변경 교외에 있는 군영으로 향했다.
깊은 밤, 육장봉은 군영을 순시하던 중 침입자 한 명을 발견했다. 침입자가 발생한 사건을 다 처리했을 무렵에는 벌써 날이 밝아 있었다.
군영을 떠날 때, 육장봉의 얼굴은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그 살기등등한 모습에 보는 사람이 겁을 먹을 정도였다.
간이 큰 육십이도 멀리서 살기를 내뿜는 육장봉을 보자, 감히 다가서지 못했다. 자신이 언제 돌아갈 수 있는지는 더욱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행히도 육십이는 좋은 소식을 받았다.
육 대장군이 변방의 장군부에 사람을 보내 옷을 가져오기로 했다는 것이다.
육십이는 이 소식을 듣고 기쁜 나머지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조심스럽게 몸에 지니고 다니던 설옥고를 꺼내 어머니한테 보내 달라고 육삼에게 부탁했다.
육십이의 친어머니가 누군지 육장봉의 친위대는 모두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들도 육십이를 이토록 귀여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이처럼 까불게 내버려 두고, 제멋대로 굴게 봐주는 건 어림도 없었다.
“월 낭자는 네게 참 잘해 주는구나.”
육삼은 약을 받아 들었다. 얼마 전, 말 상인이 가져온 말 중 유독 기운이 넘치는 말이 있었다. 바로 월령안이 육십이에게 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을 본 육삼은 슬그머니 부러워졌다.
‘월 낭자는 정말 돈이 많고 통이 커.’
아쉽게도 이렇게 좋은 마님을, 예전의 그들은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인제 와서 잘 보이려고 애써 봤자 소용이 없었다.
“저도 월 낭자한테 잘해 줄 거예요. 전 월 낭자를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어요. 저는 우리 장군님을 빼면, 월 낭자 말만 들어요.”
육십이는 가슴팍을 탕탕 두드리며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육삼은 웃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육십이에게 모든 진심이 다 진심으로 보답받을 수 있다고는 말해 주지 않을 것이다.
육십이가 월 낭자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월 낭자가 인정이 많아서이기도 했고, 육십이가 운이 좋아서이기도 했다.
* * *
육장봉이 장군부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진시(辰時 - 오전 7~ 9시)였다. 그는 아직도 월령안이 삼 년 전에 만든 그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지금의 그에게는 그다지 맞지 않는 두루마기였다.
그런데 옷소매가 날카로운 무기에 스치는 바람에 구멍이 났다. 눈에 잘 띄지는 않았지만, 망가진 셈이라 다시 입을 수는 없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마차에서 내린 육장봉은 서리가 낀 것처럼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온몸에서는 다가갈 수 없는 기운을 풍겼다.
집사가 다가가려 하다가, 그가 내뿜는 한기에 놀라 한 발 뒷걸음치고 말았다.
집사는 눈빛으로 육장봉의 뒤에 있는 육삼에게 물었다.
‘장군께서 왜 저러세요?’
육삼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하지 않았다.
대장군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런 때에 잘못 건드렸다가는 반드시 봉변을 당할 것이다.
집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몰래 내빼려고 했다. 하지만 육장봉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주변을 훑어보다가 집사에게 시선을 주었다.
“무슨 일이냐? 말해라.”
“장군…….”
집사는 쭈뼛거리며 다가갔다. 속으로는 일찍 내빼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 비우 도련님이 여러 번 찾아오셨습니다. 장군을 뵈, 뵙고 싶다면서요. 소씨 가문과의 혼사를 상의하고 싶으시답니다.”
집사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불벼락이 떨어질까 두려웠다.
“상의한다고?”
육장봉은 차가운 눈길로 집사를 훑어보았다.
“돈을 빌리겠다는 소리지?”
“네, 네.”
집사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삼천 냥을 빌려줘라. 그리고 차용증을 쓰게 해.”
어쨌든 혼사는 치러야 했다. 그로서도 육비우가 예물을 보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 혼사를 망치게 할 수는 없었다.
“장군, 비우 도련님이 혼사를 주관해 줄 어른이 없다며, 장군께서 좀 도와 달라고 하셨습니다.”
집사는 난감한 얼굴을 했다. 말을 마칠 때까지도 육장봉을 감히 바라보지 못했다.
“그런 말을 할 용기는 있나 보군.”
육장봉은 냉소를 지으며 성큼성큼 서재로 들어갔다.
“그더러 어머니를 데려와서 혼례를 준비하라고 해라. 내가…… 동의했다고 하고.”
“네, 장군. 장군, 비우 도련님이 또 큰아가씨의 나이가 찼으니 우리 쪽에서 적당한 상대를 찾아 달라고 하셨습니다.”
집사는 육장봉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속으로는 육비우를 한바탕 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온 집안 식구가 쓸데없는 일에까지 전부 우리 장군님을 찾네. 아주 내가 자기네 집 집사인 줄 아는 건가.’
“성품은 어떠하냐?”
육장봉이 물었다.
집사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큰아가씨의 성격은 좀 괴팍합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요. 평소에도 사람과 교류가 없이 혼자서 자기 처소에만 계십니다.”
“둘째 숙모께 보내서 당분간 가르쳐 달라고 해라. 그리고 적당한 집안을 찾아 시집보내라.”
이 말을 할 때쯤 육장봉의 목소리는 더욱 차가워져 있었고, 귀찮음마저 묻어났다.
“알겠습니다.”
집사는 다급히 대답했다. 육장봉의 안색이 어두운 것을 보자, 다른 용건은 모조리 덮어두고 더는 물을 엄두도 못 냈다.
장군은 오늘따라 너무 무서웠다. 설령 자기에게 화풀이하지 않더라도, 그의 옆에 오래 서 있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집사는 부랴부랴 물러갔다.
육장봉은 발걸음을 빨리했다. 서재에 도착한 육장봉은 시위가 문을 열기도 전에 거칠게 문을 밀쳤다.
쾅!
“나와라!”
육장봉은 자리에 앉지도 않고 암위를 불렀다.
“네, 장군.”
암위는 빠른 속도로 나타나 한쪽 무릎을 꿇었다.
문밖에 있던 시위는 상황을 보고, 재빨리 방문을 닫았다.
“가서…… 북요의 대황자 야율융진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라.”
어젯밤, 육장봉은 변경 교외의 군영에 누군가가 침입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침입자와 겨루다가 옷소매가 찢어졌다.
물론, 상대방의 상황도 좋지 못했다. 육장봉에게 칼을 쥔 팔을 찔렸다.
“네, 장군.”
암위는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의 눈이 커졌지만, 곧바로 고개를 푹 숙여 보이지 않았다.
“육일을 불러와라!”
육장봉은 책상 앞에 앉아 굳은 얼굴로 명령을 내렸다.
“예, 장군.”
암위는 명령을 받고 물러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육일이 나타났다.
“장군.”
“야율제를 질책하는 국서가 왜 아직까지도 북요에 도착하지 않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