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영웅 노릇은 힘들다
월령안은 육장봉의 시선을 느끼고 저도 모르게 배에 힘을 줬다. 불현듯 몸에 걸친 옷이 아주 넉넉한 것을 깨달았다. 육장봉이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것 같자, 또 힘을 풀었다.
월령안은 복수라도 하듯 육장봉의 몸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많은 음식을 먹고도 여전히 배가 납작했다. 몸에 달라붙는 옷을 입고 있었지만, 배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부럽잖아.’
월령안은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어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금만 많이 먹어도 배가 볼록 튀어나와 전혀 예뻐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눈빛으로만 이야기했다. 그러나 육장봉과 월령안 모두 상대방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다행히 식당에서 화청까지의 거리는 짧았다. 그래서 두 사람이 눈빛으로 나눈 대화도 금방 끝났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둘은 각자 주인석, 객석으로 나누어 앉았다.
육장봉이 주인석에 앉았다. 하인이 그에게 차를 올렸다.
월령안은 자기 몫의 산사차를 마시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바로 온 터라 터라 육장봉은 서둘러 차를 마시지 않았다. 두 손으로 찻잔을 들고 달콤한 웃음을 짓고 있는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런 모습의 월령안이 참 좋았다.
단 한 번만 보았을 뿐인데도, 육장봉의 차가운 얼굴이 저도 모르게 부드러워졌다. 마치 월령안을 놀라게 할까 걱정하듯, 입에서 나온 목소리도 꽤 부드러워졌다.
“소씨 가문의 사람이 다녀갔소?”
“소여방의 첩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러 왔어요. 소씨 가문에서 소여방의 혼사를 준비하려나 봐요.”
월령안은 더욱 환하게 웃었다.
소 승상이 소여방을 위해 이리저리 음모를 꾸미고 다녔는데, 결국 소여방은 바깥에 두었던 첩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다.
그 생각만으로도 입맛이 돌아, 밥 두 공기쯤은 뚝딱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신은 지금 소씨 가문을 건드리면 안 되오.”
육장봉은 월령안이 의기양양한 나머지 자신의 처지를 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는 말을 돌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머지않아 소 승상은 몸이 편치 않다는 이유로 벼슬을 사양할 것이고, 폐하는 소 승상이 떠나게 내버려 둘 거요. 그 후에 폐하는 고양 소씨의 대 유학자를 불러들일 것이오. 그리고 그자에게 승상의 자리를 맡기실 거요.”
말을 마친 육장봉은 자신의 어조가 지나치게 엄격했던 것 같아, 또 목소리를 낮추었다.
“소 승상이 세력을 잃었지만, 소씨 가문은 아직 건재하오. 또 소 승상은 벼슬자리에서 수십 년 동안 흥망성쇠를 겪다가 승상(首相)의 자리에 앉았소. 그리고 삼 대에 걸쳐 제왕의 신임을 얻은 신하이기도 하오.. 그자는 당신의 생각보다 비범한 인물이오. 사람을 보내 당신에게 부탁한 것만 해도 그렇소. 일부러 약한 척을 해 당신이 손을 쓰도록 유인하는 것일 수도 있소.”
월령안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군,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이런 시기에는 소씨 가문에게 손을 쓰지 않을 거예요.”
육장봉의 생각이 지나쳤다. 그녀는 비록 ‘군자가 원수를 갚는 데에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라는 말을 신봉하지는 않았지만, 인내심이 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당장 할 수 있는 복수는 바로 그 자리에서 했다. 당장 할 수 없는 복수라면 전부 기억해 두었다가 조용히 시기를 기다렸다.
장사를 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시기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시기만 잘 잡으면 바보라도 큰돈을 벌 수 있다.
소 승상이 황제의 신임을 잃고 벼슬길이 막힌 것처럼 보였지만, 소씨 가문의 뿌리는 그대로 있었다. 지금은 소씨 가문을 공격하기에 좋은 시기가 아니었다.
게다가 소씨 가문에서 이 시기에 갑자기 막료를 보내 그녀에게 사정했다. 온갖 약한 소리를 하면서 사정하는데, 그녀가 경계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육장봉이 일부러 찾아와서 그녀에게 충고하자, 월령안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에게 진심이 어린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육장봉은 찻잔을 들고 차를 마시려던 중이었다. 그런데 월령안이 갑자기 환하고 아름다운 웃음을 짓자, 무언가 심장에 적중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아찔해져, 하마터면 손에 든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정신을 차린 뒤, 육장봉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저었다.
‘내가 언제 이렇게 정신을 놓은 적이 있었던가?’
그는 잘못 말했다. 월령안은 양심 없는 아가씨일 뿐만 아니라 사람을 괴롭히는 꼬마 요괴였다.
곧 자기 마음을 억제하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억지로 막고 싶지는 않았다.
육장봉은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차를 마시는 동작으로 당황스러움을 감췄다.
차를 반 잔 마시고 나자, 마음이 어느 정도 평온을 되찾았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고 느긋하게 말했다.
“알면 됐소. 폐하께서 처음 등극했을 무렵, 소 승상이 폐하께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소. 폐하께서는 옛정을 잊지 않는 분이오. 늘 소 승상에게 신세 진 것을 기억하고 계시지.”
육장봉은 월령안이 아주 영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그녀가 아직 어린 여자애로 보이기도 했다. 신경이 쓰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육장봉은 사람들 앞에서 보이던 차갑고 오만한 모습은 거두었다. 대신 인내심을 갖고 알기 쉽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폐하께서는 소여방의 일이 어찌 된 영문인지 아신 뒤, 소 승상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소. 청희 장공주의 일만 아니었으면 폐하께서는 소 승상을 잠시 냉대했다가 다시 다른 은혜를 베풀었을 것이오. 소 승상이 이렇게 낙향하게 하지는 않았겠지.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폐하께서도 다시는 소 승상을 쓰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그 둘은 군신 관계로 오랜 세월을 함께했소. 소 승상은 폐하를 잘 알고 있소. 언젠가 다시 폐하의 신임을 얻을 수도 있는 일이오.
또한, 폐하는 정을 중히 여기는 분이오. 그래서 이익을 중요히, 의리를 가벼이 여기는 사람을 싫어하시오. 소 승상이 아무리 잘못했더라도, 폐하의 중용을 받는 신하요. 폐하는 소 승상을 내버려 둘 수도, 처리할 수도 있소. 그러나 절대로 당신이 소씨 가문과 예전에 부렸던 신하를 모욕하게 두지는 않을 것이오. 소 승상은 야율제가 아니오. 개를 때릴 때도 주인을 봐가면서 해야 하오. 알겠소?”
말을 마친 육장봉은 그제야 말을 많이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건 평소 그의 일 처리 방식과 너무 달랐다.
하지만 월령안의 아리땁고 가냘픈 얼굴을 보자, 또 몇 마디 더 당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기가 미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대장군께서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로 소 승상이 틈을 노리지 못하도록, 소씨 가문에는 손을 쓰지 않을게요.”
월령안은 진지한 얼굴로 일어나 육장봉에게 읍했다.
그녀는 육장봉이 무슨 심산으로 특별히 찾아와 일깨워 주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그녀를 생각해서 하는 말임은 확실했다. 굳이 그가 일깨워 주지 않더라도, 소 승상에게는 쉽게 손을 대지 않았을 거지만 말이다.
육장봉은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일어나 말했다.
“됐소, 시간이 늦었으니 당신도 일찍 쉬시오.”
‘내가 진심으로 자기를 생각한다는 것을 알기는 하는군. 감사를 받을 줄은 몰랐는데.’
“대장군을 배웅해 드릴게요.”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월령안이 육장봉을 붙잡을 리가 없었다.
“괜찮소.”
육장봉은 손을 내저었다. 월령안더러 나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정말로 배웅을 안 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배웅하는 척만 하려고 해도 두어 걸음은 나가야 했다.
월령안은 육장봉의 뒤에서 몇 걸음 따라갔다. 속으로는 문 입구까지만 배웅하면 되려나 생각하던 중이었다.
곧 문턱을 넘으려 할 때, 육장봉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수횡천이 말한 그 일은, 당신이 절대로 끼어들면 안 되오. 수횡천이 영웅이 되고 싶다면 그건 그자의 일이오. 영웅은 대부분이 끝이 좋지 못했다는 점을 기억하오.”
월령안은 잠시 침묵하다가 가볍게 대답했다.
“그러죠.”
* * *
월령안은 육장봉을 보내고 노인의 처소로 갔다.
그녀는 수횡천이 부탁한 일을 전력을 다해 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육장봉이 특별히 찾아와 해서 경고하자 겁이 났다.
지금은 좀 막막했다.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해도 될지 안 될지도 몰랐다. 그래서 노인과 이야기를 좀 하고 싶었다.
월령안이 왔을 때, 노인은 금방 약을 먹은 참이라 정신이 맑은 상태였다.
그녀가 들어가자, 노인은 귀찮은 얼굴을 했다.
“이 녀석아, 왜 또 왔느냐?”
노인의 방 안에는 온통 약 냄새였다. 게다가 늙은이 특유의 퀴퀴한 체취도 섞여 있었다.
이 두 가지 냄새가 한데 섞이자, 역겨운 냄새가 났다. 남들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도 질색하는 냄새였다. 그래서 그는 평소 월령안이 자기를 보러 오지 못하게 했다.
“육장봉이 조금 전에 갔어요.”
월령안은 낮은 의자를 옮겨다 침대 옆에 앉았다.
그녀는 두 다리를 모으고 팔꿈치를 무릎 위에 올려 두 손을 꼭 쥐고 턱을 받쳤다. 윗몸은 앞으로 기울여 기댔다.
노인은 월령안이 어렸을 때처럼 고분고분하게 그의 옆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의 눈에 그리워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늙었다. 그러나 그가 키운 아이는 커서 홀로 세상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걸로 충분했다.
그러나 월령안의 말을 듣자, 노인의 얼굴에 떠오른 자애로움이 순식간에 언짢음으로 바뀌었다.
“그놈은 왜 또 왔다더냐?”
“저를 일깨워 주려고 왔대요. 새로 임명될 승상이 여전히 소씨 가문 출신이래요. 저더러 이 시기에는 소 승상한테 손을 대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월령안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소씨 가문에 대한 황제의 마음은 진실한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그놈이 신경을 썼구나.”
노인은 굳은 얼굴로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게 말했다.
월령안은 기분이 나쁘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그 인간의 충고 따위는 필요 없어요. 제가 멍청이도 아니고, 어떻게 소씨 가문의 속임수에 당하겠어요?”
‘육장봉이 신경을 쓰기는 뭘. 분명 우리 집에 밥이나 얻어먹으러 온 거겠지. 정말 날 신경 쓰는 거라면 점심때 말했을 거 아냐. 저녁에 또 올 필요가 있겠어? 육장봉은 분명 밖에서 우리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줄 알고 있을 텐데. 나를 피해도 부족할 판에 이렇게 뻔질나게 드나들다니. 사람들에게 흉을 보라고 부추기는 꼴이잖아.’
“그래서 육장봉의 흉을 보려고 날 찾아왔느냐?”
노인은 웃음기 띤 얼굴로 물었다.
“아니에요.”
월령안은 고개를 저었다. 눈에 머금은 웃음은 걱정으로 바뀌었다.
“제가 점심에 수 오라버니를 보러 갔거든요. 수 오라버니는 제가 도와주기를 바라고 있어요. 잠한성이 키운 사사들을 구해 달라고 하더군요. 그 이야기를 듣고 전 한번 시도해 보고 싶었어요. 제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영웅이 될 수 있는지 한번 보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육장봉이 저녁 무렵에 와서 저한테 영웅이 되지 말라고 진지하게 말하더군요. 영웅들은 끝이 좋지 못했다면서요. 그 바람에 또 망설이고 있어요.”
“음, 육장봉 말이 맞아.”
노인은 정곡을 찔렀다. 육장봉을 싫어한다고 해서 그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영웅이 되는 건 아주 힘든 일이야. 너에게는 어울리지 않아.”
“영감님, 수 오라버니도 잘 아시잖아요. 그런 강호 대협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게 바로 약속이에요. 본인이 승낙한 일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망설이지 않고 할 거예요. 수 오라버니는 육장봉에게 잡혀서 감옥에 갇혀 있는데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해요. 전 수 오라버니가 걱정된다고요.”
월령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눈에는 온통 걱정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