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양심도 없군
월령안은 비밀 감옥에서 나온 뒤,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육장봉 일행이 보였다.
“대장군.”
월령안은 앞으로 다가가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설득하기는커녕 오히려 설득을 당할 줄은 몰랐군.”
육장봉은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실망스럽다는 듯 말했다.
월령안이 웃으며 말했다.
“대장군, 그럴 리가요.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손해 보는 장사를 하겠어요?”
육장봉은 그들의 대화를 훔쳐 들었다는 것을 전혀 숨기려 들지 않았다.
“말하고 마음이 따로 노는군.”
육장봉이 비웃었다.
월령안은 말없이 웃고만 있었다. 해명하지도 않았다. 해명해도 소용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이런 일은 행동으로 보여주어야만 했다.
“수횡천이 당신의 권고를 들었으면 좋겠소. 그자가 협조한다면 나도 아랫사람들에게 무림맹주의 체면을 봐주라고 분부할 것이오.”
수횡천이 지금 받는 대우는 전부 본인이 자초한 것이었다. 월령안은 육장봉을 탓할 수가 없었다.
“대장군, 감사드립니다.”
월령안은 감사 인사를 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세상의 이치는 때때로 참 재미있다. 상대방이 자기를 괴롭히지 않았다고 오히려 감사 인사를 해야 하는 때도 있다.
‘정말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육장봉이 말했다.
“갑시다. 내가 내보내 주겠소.”
황제는 아직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돌아가 보고해야 했다. 추밀원 쪽도 오늘 가서 중요한 사무를 인수해야 했다.
그는 월령안을 집까지 데려다줄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월령안이 바래다주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만약 그가 정말로 월령안을 집까지 바래다주기라도 한다면, 그녀는 오늘 밤 잠들지도 못할 것이다.
“그럼 대장군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육장봉이 거리를 두자, 월령안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바로 육장봉이지. 아까 육장봉은 잠이 덜 깼던 게 분명해. 그래서 이상한 소리나 한 거겠지.’
육장봉은 월령안을 데리고 왔던 길을 돌아갔다. 관문을 하나하나 통과해, 월령안을 형부의 감옥에서 내보냈다.
마차는 바로 밖에 세워져 있었다. 육장봉은 입구에 서서 더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모든 일에는 적정선이 있다. 월령안은 경계심이 지나치게 강했다. 그는 오늘 월령안의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보다 지나쳐서는 안 됐다.
“대장군, 가 보겠습니다.”
월령안은 예의 바르게 말을 한 뒤, 고개도 돌리지 않고 떠나갔다.
육장봉은 제자리에 서 있었다. 월령안이 떠나기 전에 몸을 돌려 자신을 돌아보기를 바라며 기다렸다.
그러나 마차가 멀리 떠나갈 때까지 월령안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양심도 없군.”
육장봉은 화가 나기도 하고 웃음이 나기도 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추밀원처럼 성가신 걸 떠맡았는데. 저 양심 없는 아가씨는 볼 일 다 봤다고 바로 쳐다보지도 않는군.’
* * *
월령안을 보낸 다음, 육장봉은 마차를 타고 입궁했다.
황제는 수횡천이 협조를 거절했다는 말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단지 감탄하며 말했다.
“의동생은 결국 연모하는 이보다는 못하구나. 잠한성을 봐라. 그쪽은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못 할 짓이 없었지. 그런데 수횡천은 어떠냐. 의동생이 그렇게 설득해도 전혀 소용없었어. 이 강호 대협들은 정말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육장봉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수횡천은 반대로 월령안을 설득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 사람들을 구해 달라고요.”
그러나 수횡천이 월령안을 가장 소중히 여겼더라면, 절대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횡천은 자신이 하는 일이 조정에 반기를 드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건가? 자기야 혈혈단신에 능력도 갖춘 몸이라서 조정이 귀찮게 해도 괜찮다지만, 월령안은? 수횡천은 너무 이기적이로군.’
“그자는 정말 대영웅이 되고 싶은가 보구나.”
황제는 화가 나 비웃더니, 퉁명스럽게 물었다.
“월령안은 승낙했느냐?”
“월령안은 현명한 사람인데 그런 부탁을 어찌 승낙하겠습니까?”
육장봉이 무심결에 대답했다.
“하기는 그렇지. 만약 월령안이 승낙했다면, 짐이 사람을 잘못 쓴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웠을 거다.”
황제는 월령안에 대한 멸시를 전혀 감추지 않고 비꼬았다.
그는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고, 이익을 중요히 여기고 정을 가볍게 여기는 월씨 가문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연히 월령안도 좋아하지 않았다.
육장봉은 그 말을 받지 않았다. 대신 추밀원을 핑계로 물러가겠다고 했다.
황제가 말했다.
“넌 정무를 처리한 적이 없어서 잘 모를 거다. 그 문관들은 온갖 속셈이 득실득실하지. 짐이 이반반을 함께 보내마.”
육장봉이 황제의 입김으로 추밀원에 들어갔으니, 추밀원의 관리들이 육장봉을 난감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대충 상대할 가능성은 있었다.
육장봉이 능력 있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병사들만 거느려 봤을 뿐, 문직(文職)을 맡아본 적이 없었다.
황제는 그가 추밀원의 능구렁이들을 장악하지 못할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측근 내관을 보내 육장봉에게 힘을 실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육장봉이 거절했다.
“폐하, 망극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래, 필요할 때 다시 짐에게 말하거라.”
황제는 강요하지 않았다. 그래도 육장봉에게 여지는 남겨 주었다.
육장봉이 대답하고, 떠나려고 몸을 돌렸을 때였다.
“어? 장봉아, 네가 입은 옷이 어찌 몸에 맞지 않느냐? 아니면 짐이 옷을 한 벌 가져오라고 할까?”
육장봉이 몸을 돌리자, 황제는 그제야 육장봉이 입은 옷이 몸에 꼭 끼는 것을 알아차렸다.
“육삼이 옷을 잘못 가져왔습니다. 신은 오늘 말을 타지 않을 것이니 갈아입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육장봉이 해명했다.
“네 시중은 늘 육이가 들지 않았느냐? 육이는 어디 가고?”
황제는 호기심에 차서 물었다.
“잘못을 저질러 벌을 받았습니다.”
육장봉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는 아랫사람들한테 너무 엄격하구나. 그들이 견디지 못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거라.”
“공로가 있으면 상을 내리고, 잘못이 있다면 벌을 내리지요. 신은 사람이 아니라 일만 보고 결정합니다.”
육장봉은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고, 충고하듯 말했다.
그러나 황제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동의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여전히 월령안을 전혀 사람 취급하지 않자, 육장봉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표정은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했다.
사람 마음속의 선입견은 마치 커다란 산 같았다. 남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옮겨줄 수는 없었다.
육장봉은 평소 입던 모양과 전혀 다른 두루마기를 입고 추밀원으로 갔다.
추밀원은 주나라 권력의 핵심 중 하나라, 황궁과 아주 가까운 데 있었다. 그는 오래지 않아 바로 도착했다.
오전에 추밀원의 관원들은 황제가 드디어 추밀사를 임명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황제는 육부(六部)를 통하지 않고 직접 임명했다.
추밀사는 병권을 장악했다. 제왕의 심복이 아니면 맡을 수 없는 자리기도 했다. 추밀사의 직무를 맡는 사람이라면, 절대 보통 사람일 리가 없었다.
평소 해이하던 관원들은 새로운 상사가 누구인지는 몰랐으나, 소식을 듣자마자 최대한 빠른 속도로 추밀원을 정리했다.
육장봉이 도착했을 때, 추밀원은 새롭게 탈바꿈하여 생기로 가득 차 있었다.
육장봉은 추밀원으로 들어가 열심히 일하고 있거나, 열심히 공무를 처리하는 척하는 관원들을 훑어보았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 대장군?”
육장봉이 들어오자,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일어났다.
“나는 새로 부임된 추밀사로, 오늘부터 내가 너희의 상사다. 앞으로 추밀원의 모든 공무는 내게 보고해라. 알겠느냐?”
뒷짐을 지고 서 있는 육장봉에게서는 감출 수 없는 기세가 흘러나왔다.
추밀원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았지만, 결국 하나둘씩 대답했다.
“소관, 알겠습니다.”
그들은 새로 부임한 추밀사가 육 대장군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육 대장군이 이토록 격식을 차리지 않고 직접 올 줄은 더더욱 몰랐다.
육장봉은 이부(吏部)의 관원조차도 거느리지 않고 혼자 왔다.
그들이 미리 준비하여 추밀원을 정돈했기에 망정이었다. 또 십이방(十二房 – 추밀원에 설치한 열두 개 부서)의 공무도 정리해 두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 새 상사가 왔을 때 아주 당황했을 것이다.
추밀원의 몇몇 관리는 몰래 다행이라고 여겼다.
“내가 반 시진을 주겠다. 반 시진 뒤, 추밀원 부속의 십이방에서 각자 한 명씩 내게 와서 최근 삼 년간 했던 일을 보고해라. 한 사람당 일각만 준다. 그동안 내게 무슨 말을 할지 미리 생각해 두어라.”
육장봉은 소리소문없이 추밀원으로 왔다. 떠들썩한 일을 벌이지도 않았지만, 추밀원에 온 첫날부터 모든 관원의 군기를 잡았다.
그 때문에 늘 한가하던 추밀원 관리들은 오후 내내 바빠서 난리가 났다. 그러나 그 누구도 육장봉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육장봉도 딱히 욕도 하지도, 벌을 내리지도 않았다. 다만 그들의 보고를 듣고 난 뒤, 딱 한 마디 ‘틀렸다’는 소리만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시 준비하게 했다.
추밀원은 병권을 장악하고 있어 평소 육장봉을 만날 일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육장봉의 성격을 자연히 알고 있었다.
육 대장군은 기준이 높고 엄격했다. 하지만 절대로 이유도 없이 사람을 못살게 굴지는 않았다. 육 대장군이 틀렸다고 한다면, 그들이 보고한 내용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철없는 멍청이는 꼭 있었다. 육장봉에게 두 번이나 틀렸다는 말을 듣자, 마음속으로 앙심을 품었다. 고개를 쳐들고 육장봉에게 어디가 틀렸냐며 따지고 들기 시작했다. 일부러 군기를 잡고 괴롭히는 것이 아니냐며 질문했다.
“민병방(民兵房), 삼로(三路 – 하동, 하북, 섬서)의 보갑(保甲 – 지방에서 작은 단위로 이루어진 자치 제도)과 궁수를 장관한다.”
수하의 질문에 육장봉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무덤덤하게 그 사람을 힐끔 보았을 뿐이다.
그 시선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마치 죽은 사람을 보는 듯했다.
“네, 네.”
그 청년은 놀라서 몸을 흠칫 떨었다. 마음속으로 잘못했다고 후회하였다.
안타깝게도 후회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나는 원래 너희의 체면을 봐주려고 했다. 이렇게 뻔뻔하게 나오니 나도 더는 봐주지 않겠다.”
육장봉은 책상을 내리치며 일어났다.
“육사, 민병방의 소모품을 조사해라. 특히 활이 얼마나 소모되었는지 알아봐라. 경교(京郊 – 수도 근교)의 궁수들이 하나같이 신력을 타고나서 일 년에 일석(一石 – 석은 중량 단위, 1석은 60kg)짜리 활이 만 개 이상 소모되고, 이석(二石 – 120kg)짜리 활이 천 개 이상 소모되며, 화살촉이 수만 개 소모되는 게 맞는지 봐야겠다.”
“자, 장, 장군…….”
청년은 두 다리가 풀려 털썩 무릎을 꿇었다. 자신이 이제 끝장났음을 깨달았다.
육장봉은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육사에게 일을 맡긴 후, 민병방을 제외한 나머지 십일방 관리들을 훑어보았다.
나머지 관리들은 하나같이 덜덜 떨며 식은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모두 고개를 떨구고 육장봉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망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