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284)화 (284/1,004)

284화 제 말은 안 들을 거죠?

육삼이 대답했다.

“네, 장군.”

월령안은 진심으로 육장봉을 때려 주고 싶었다.

“왜? 수횡천을 위해 사정이라도 할 셈이오?”

육장봉은 월령안의 시선을 느끼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월령안, 어디 사정해 보지 그래. 당신이 사정을 한 번 하면 난 수횡천의 하루치 물과 음식을 끊을 거다. 이삼일 굶었다고 해서 수횡천이 죽지는 않을 테니까.’

“령안아…….”

수횡천은 월령안이 자신을 위해 어리석은 일을 벌일까, 서둘러 입을 열어 타일렀다.

“령안아, 날 위해 사정하지 마라. 육장봉은 착한 놈이 아니다. 네가 사정했다가는 큰코다칠 거다.”

“오라버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월령안은 옅은 웃음을 지었다. 눈웃음을 지으니 그녀의 몸에서 부드러운 빛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사실 사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는 육장봉이었다. 아무리 사정하고 싶어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지금 수횡천 앞에서 육장봉에게 사정했다가는 수횡천의 자존심을 짓밟는 꼴이 될 것이다.

“똑똑하군.”

이를 본 육장봉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기분이 언짢아졌다.

월령안은 그에게는 이렇게 부드럽게 웃어 준 적이 없었다.

월령안은 얼굴에 떠오른 웃음기가 사라지기 전, 부드럽게 부탁했다.

“대장군, 저와 수 오라버니 둘이서만 이야기를 좀 할 수 있을까요?”

육장봉이 그녀를 데리고 수횡천에게 온 이유는 그녀가 그에게 식사 두 끼를 대접했기 때문만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여기에 데려온 목적은 그녀더러 수횡천을 설득하라는 뜻이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어쨌든 설득을 하는 건 그녀의 몫이었다. 단, 수횡천이 그 설득을 들을지 말지는 그녀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지.”

육장봉은 월령안에게 따로 당부하지 않았다. 그는 월령안의 영리함을 잘 알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하고, 무슨 말을 하면 안 되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육장봉은 대담하게도 비밀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내보냈다. 물론 그 자신도 나갔다. 오직 월령안과 수횡천 두 사람만 남겨 놓았다.

하지만 육장봉과 그의 사람이 어느 구석에서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쯤은 수횡천도, 월령안도 다 알고 있었다. 그들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전부 누군가가 듣고 있었다.

“령안아, 넌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어.”

사람들이 떠나가자, 수횡천은 더는 무게를 잡지 않고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온몸은 쇠사슬로 묶인 채로, 두 다리는 허공에 떠 있었다. 벽에 걸려 있는 모습은 마치 거미에게 붙잡힌 벌레 같았다.

그의 몸을 속박하는 쇠사슬은 특수한 방식으로 감겨 있었다. 목 부분에도 한 바퀴 둘려 있었다.

그가 조금만 움직여도, 하다못해 손이나 발만 까딱해도 온몸의 쇠사슬이 꽉 조여 숨도 쉴 수 없었다. 단순히 벽에 매달린 것처럼 보이더라도, 사실 수횡천은 조금도 힘을 뺄 수가 없었다. 온몸이 꽉 조여 눈을 붙이기도 힘들었다.

이틀 동안 갇혀 있었을 뿐인데, 수횡천은 마치 서리 맞은 가지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남의 일 때문에 이 지경까지 되다니. 오라버니, 도대체 이게 무슨 고생이에요?”

월령안은 가까이 다가갔다. 수횡천의 벌게진 두 눈과 끊임없이 밖으로 피가 배어 나오는 상처를 보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까 밖에서 볼 때는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들어오고 나서야 수횡천의 몸에 상처가 얼마나 있는지 제대로 보였다. 몇몇 상처는 쇠사슬에 짓눌려 아물지도 못해, 피가 계속 흘렀다. 그렇게 흐른 피로 쇠사슬마저 빨갛게 물들였다.

사람을 괴롭히는 거로 치자면, 역시 육장봉을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사내대장부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 있단다.”

수횡천은 애써 위로하는 웃음을 지었다. 월령안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왜 했어요?”

월령안은 수횡천 앞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를 건드리지는 않았다. 그의 상처에서 피가 스며 나와도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다.

육장봉이 문을 열고 수횡천과 그녀를 여기에 내버려 둔 것은, 문이 열려 있더라도 수횡천이 도망칠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횡천의 몸에 두른 쇠사슬은 한눈에 보아도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차마 함부로 건드릴 엄두가 안 났다.

수횡천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잠 맹주는 내 선배야. 그분이 부탁한 일은 죽어서라도…… 해야 했었다.”

“그럼 오라버니가 말하는 잠 맹주가 청희 장공주와 친밀한 사이라는 건 아나요? 그 사람이 한 이 모든 일이 전부 자기의 사적인 감정 때문인 것을 알고는 있어요?”

월령안은 비꼬듯이 말했다. 마음속으로는 말할 수 없이 답답했다.

‘오라버니는 너무 어리석었어. 잠한성은 오라버니를 이용하려고 작정한 거야.’

수횡천의 동공이 갑자기 커졌다. 그는 차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았다.

“잠 맹주의 사사로운 일은 내가 간섭할 권리가 없어. 난 잠 맹주의 일을 돕겠다고 승낙했으니 그건 내 일이다. 난 반드시 해낼 거야.”

“잠 맹주가 오라버니더러 몰래 키운 사사들을 없애라고 했잖아요. 오라버니가 조정에 알려 조정 사람들이 손을 쓰더라도 결과는 같지 않아요?”

이 말은 육장봉이 월령안을 통해 수횡천에게 들려주려는 말이었다. 월령안도 이를 알고 있었다.

물론, 그녀도 수횡천을 설득하고 싶었다. 하지만 수횡천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령안아, 상황은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간단하지가 않아.”

수횡천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정에서 만약 그 사람들을 찾아내면 어찌할 것 같아?”

“죽이겠죠!”

월령안은 생각도 하지 않고 말했다.

잠한성이 키운 사람들이다. 그들이 나쁜 짓을 했든지 안 했든지, 조정에서는 그들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죽이겠지.”

수횡천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에서 내키지 않는 기색과 무력감이 흘러나왔다.

“령안아, 너도 알다시피 조정에서는 반드시 그들을 죽일 거야. 마치 천명사의 그 사사들처럼 말이야. 하지만…… 령안아, 그들이 얼마나 억울할까?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모른단다. 그들이 죽어서는 안 돼.”

수횡천은 최대한 그들을 구해 주고 싶었다. 마치 과거의 그가 곤경에 처했을 때, 그 늙은 승려가 그를 도와줬던 것처럼 말이다.

그 늙은 승려의 도움이 있어 그의 오늘이 있었다.

그는 그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그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바꿔주고 싶었다.

월령안은 침묵을 지켰다.

수횡천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조정의 입장에서 보면, 육장봉도 틀리지 않았다.

잠한성이 키운 사람들은 지금 당장 조정에 불리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 자체가 조정에 불리했다. 조정에 대한 위험이자 위협이었다.

조정에게 위협이 될 만한 것들을 싹트기 전에 제거하는 것은 틀린 게 아니었다. 적어도 월령안은 육장봉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였더라도 육장봉과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횡천의 두 눈은 벌게져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오로지 불굴의 의지뿐이었다.

“령안아, 잠 선배가 이 일을 내게 맡긴 것은 그들을 죽이라는 뜻이 아니라, 구하라는 뜻이다. 잠 선배는 이미 후회하고 계셔. 자기의 잘못을 깨달으셨어. 그분의 유일한 소원이 자기 때문에 인생을 망친 그 사람들에게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는 것이래. 령안아, 난 거절할 수 없었다. 내 말 이해하겠어?”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이 죽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면, 오라버니는요? 수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그 사람들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목숨을 걸어도 된다는 말인가요?”

월령안은 화가 나서 수횡천에게 소리를 질렀다.

“잠한성이 저지른 잘못을 왜 오라버니가 책임져야 하나요? 왜 오라버니가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건데요? 잠한성한테 빚이라도 졌어요?”

그녀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그녀는 수 오라버니처럼 사심 없이 굴 수는 없었다. 일이 생기면 늘 자신의 안위와 이익부터 챙겼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도 있어. 잠 선배가 할 수 없으니 내가 할 수밖에. 만약에 나도 하지 않는다면, 누가 하기를 바라겠어?”

수횡천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월령안은 화가 나다 못해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제 말은 안 들을 거란 뜻이죠? 맞아요?”

“령안아, 어떤 일들은 잘잘못만 따질 수는 없는 거야. 이익만을 따져서도 안 되고. 그런 걸 따지지 않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도 있어.”

수횡천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요, 수 오라버니.”

월령안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곧 그녀는 모든 울화를 거두고 냉정하게 물었다.

“강호에서 오라버니가 반드시 얼굴을 비추어야 하는 일은 뭐가 있어요?”

설득할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낼 수밖에 없었다.

“무림 대회 말고는 없어.”

수횡천은 월령안의 말뜻을 알았다.

“그럼 수 오라버니, 무림 대회까지 버티기를 바랄게요.”

월령안은 애처로운 시선으로 수횡천을 바라보았다.

“수 오라버니, 전 먼저 갈게요. 당분간은 다시 보러 오기 힘들 거예요.”

무림 대회까지 아직 반년이라는 시간이 있었다. 반년이라면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다. 또 수 오라버니가 여러 번 죽을 수도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령안아, 나는…….”

월령안을 바라보는 수횡천의 얼굴에는 망설이는 기색이 비쳤다.

“수 오라버니, 말하세요.”

월령안은 수횡천이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그녀는 듣고 싶지 않았다. 들으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안 들을 수도 없었다.

“령안아, 나는…….”

수횡천의 얼굴에는 어떻게 입을 열지 고민하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그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고 자책하듯이 말했다.

“령안아, 반드시 누군가가 해야만 하는 일도 있어. 오늘 네가 남을 돕지 않는다면, 다음에 네가 위험에 처했을 때 그 사람도 보고만 있을 거야. 령안아, 너는…… 내 걱정하지 마. 난 괜찮을 거야.”

수횡천은 자신이 이러는 건 뻔뻔스러운 행동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는 자유가 없었다. 또 믿을 만한 다른 사람도 없었다. 그가 믿을 사람이라고는 월령안밖에 없었다.

월령안은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대답했다.

“수 오라버니,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어요.”

‘수 오라버니가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한번 해 보자. 이렇게 해서 수 오라버니가 안심할 수 있다면.’

“령안아, 미안하다. 넌…… 노력만 하면 돼. 모험은 하지 말고.”

수횡천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알겠어요.”

월령안은 가볍게 대답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미소를 지었다.

수 오라버니를 설득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에게 설득당할 줄은 몰랐다. 정말 우스운 일이었다.

“수 오라버니, 제가 오라버니가 감옥에서 최대한 편히 지낼 수 있도록 해 볼게요. 오라버니도 그들에게 조금만 더 협조해 주세요. 그들도 돈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에요. 윗사람한테 할 말은 있어야죠. 다들 쉽게 사는 게 아니니 서로 조금만 양보하자고요. 서로한테 좋잖아요.”

월령안은 생각하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충고 한마디를 했다.

“네 말대로 할게.”

수횡천은 평소와 다르게 선뜻 대답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자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월령안이 그에게 작은 부탁을 하자, 그나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갈게요.”

말을 마친 월령안은 머뭇거리지 않고 몸을 돌려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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