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나는 아주 마음에 드오
월령안은 옷을 갈아입은 다음, 먼저 화청에 도착했다. 화청의 장식들을 보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을 접대하려면 모양새를 갖춰야지. 부집사가 일을 잘했네.’
월령안이 화청의 장식을 확인하고 있을 무렵, 육장봉도 깨어났다.
그가 부르자 육삼이 깨끗한 옷을 들고 들어왔다. 육장봉은 육삼을 칭찬했다.
“신경 많이 썼구나.”
‘나를 대신해 옷을 가져올 줄도 알고. 보아하니, 육삼도 그리 맹하지는 않구나. 앞으로 육삼에게 일을 맡겨도 될 테니, 육일과 육이에게 벌을 줄 때 굳이 봐줄 필요는 없겠군.’
“월 낭자께서 일러 주신 겁니다.”
육삼은 이 공로를 가로챌 엄두는 나지 않았다.
육장봉은 잠시 멍해졌다가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육삼이 건네준 옷을 받아 펼쳤다. 그러나 입어보니 옷이 조금 작았다.
육장봉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린 채로 육삼을 힐끔 보았다.
육삼은 서둘러 변명했다.
“장, 장군, 옷은 집사가 준비한 겁니다. 집사가 이 옷은 월 낭자가 있을 적에 장군을 위해 직접 지은 옷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집에 남아 있는 옷은 이 한 벌이고, 나머지는 모두 전선의 자택에 보냈다고 했습니다. 저희…… 저희도 옷을 가져오지 않았으니 일단 이 옷이라도 입으시지요.”
육장봉은 옷을 벗으려고 하던 찰나에 육삼의 말을 들었다. 바로 생각을 바꾸고 분부했다.
“잘 정리해서 가져오라고 해라.”
“네, 장군.”
육삼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집사의 설명 덕분에 봉변을 당하지는 않았다.
육장봉은 항상 차림새에 신경을 썼지만, 이번만큼은 더 따지지 않았다. 약간 작은 옷을 입은 채로 화청으로 갔다.
월령안은 미리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육장봉이 긴 다리, 늘씬한 허리, 넓은 어깨까지, 몸매를 완전히 드러내는 옷을 입고 화청에 성큼성큼 들어섰다. 그 모습을 보자, 월령안은 눈을 약간 치켜떴다.
‘육장봉은 항상 널찍하고 편한 옷을 입지 않았나? 오늘따라 왜 몸에 꼭 맞게 몸매를 다 드러내는 옷을 입었지?’
육장봉이 가까이 오자, 월령안은 그가 입은 옷의 모양새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순간 얼굴의 미소가 굳어져 버렸다.
그녀는 그 옷을 알아보았다. 육씨 가문에 시집가서 육장봉을 위해 처음으로 만든 옷이었다.
그때는 육장봉의 취향을 잘 몰랐다. 그의 치수도 잘 몰라서, 눈대중으로 어림짐작해서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옷이 조금 작게 만들어졌다.
결국, 그녀는 그 옷을 상자의 맨 아래에 처박아 놓고 보내지 않았다.
그런데 육삼이 육장봉이 갈아입을 옷으로 하필 그 옷을 꺼내 올 줄은 몰랐다. 이게 우연이라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과연 육장봉이 그 사실을 알고 저 옷을 입은 것인지는 몰랐다.
생각해 보니, 모를 것 같기도 했다.
그녀가 그동안 육장봉에게 직접 지어 준 옷이 한두 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돌아온 지 꽤 되었는데도, 그녀가 만든 옷을 입은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월령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을 꾹 억눌렀다. 그리고 웃음을 띤 얼굴로 다가가 육장봉이 자리에 앉게 이끌었다.
“대장군, 식사하시지요.”
“아주 좋소.”
육장봉은 그녀의 앞에 한 걸음 멈춰서더니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월령안이 이렇게 분홍빛 옷을 입고 소녀처럼 치장한 모습을 본 적은 극히 드물었다.
월령안은 그 앞에서 항상 성숙하고, 점잖고, 대범한 모습만 보였었다. 지금 그녀는 보기 드물게도 소녀 같은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색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대장군께서 좋으시다면 됐어요.”
월령안은 육장봉이 요리를 칭찬하는 건지, 아니면 식당의 장식을 칭찬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차피 어디가 좋든, 육장봉이 만족스럽다면 그만이었다. 하물며 이번에는 육장봉을 정식으로 초대해 식사하는 자리였다.
“나는 아주 마음에 드오.”
육장봉은 월령안이 입은 분홍색 치마를 힐끔 보고 또 자신이 입은, 몸에 꼭 맞는 하늘색 두루마기를 보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특히 ‘마음에 드오’라고 말할 때, 육장봉은 아주 느릿하게 말꼬리를 길게 끌며 여운을 남겼다.
월령안은 방 안의 온도가 조금 높다고 느껴졌다. 어째서인지 몰라도 얼굴이 조금 화끈해졌다.
* * *
월령안은 정성을 쏟았고, 육장봉은 마음을 쏟았다. 이번 점심은 둘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한 끼였다.
이번 식사는 월령안에게는 주인과 손님이 모두 즐거운 시간이었다. 육장봉에게는 가정의 따스함을 느끼게 해 준 시간이었다.
육장봉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한마디 찬사를 보냈다.
“훌륭했소.”
요리나 월령안이나 모두 훌륭했다.
이번 식사는 그가 요즈음 먹은 것 중 가장 마음 편히 즐긴 끼니였다.
“오늘의 주방장에게 상을 내려라.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상을 받을 것이다.”
월령안도 장단을 맞추어 바로 하인에게 분부했다.
“아가씨, 감사합니다.”
하인은 기쁜 마음으로 앞으로 다가와 감사 인사를 올렸다.
‘아가씨?’
하인의 ‘아가씨’라는 소리에, 육장봉에게서 풍기던 기쁜 기색이 조금 옅어졌다. 새삼 그가 처한 상황이 와닿았다. 월령안은 대장군 부인이 아니게 된 지 오래였다.
그는 월령안을 힐끔 보고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엎지른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다.
어떤 일은 일어났으니 지나간 일이 되었다. 과정이 어떠하든 간에 결과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육장봉은 드물게도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월령안은 그가 왜 또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최대한 빨리 이 상황을 넘길 방법을 생각해 냈다.
“장군, 우리 화청에 가서 잠시 앉는 게 어떨까요?”
육장봉이 여기 앉아 있다가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그렇다면 장소를 옮겨 분위기를 바꿔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방금 배불리 먹었으니 앉고 싶지 않소.”
육장봉은 그렇게 바로 거절하더니, 조금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나와 함께 화원을 걸읍시다.”
월령안의 웃는 얼굴이 잠시 굳었지만, 곧 다시 미소가 피어났다.
“우리 집 정원은 아주 작아요. 장군께서는 흉보지 마세요.”
‘육씨 가문 의원이 육장봉한테 배불리 먹자마자 걷지 말라고 말을 안 해 줬나? 자리에 앉아서 소화를 시키는 게 먼저지.’
때는 정오였고, 햇볕은 뜨거웠다. 육장봉은 괜찮을지 몰라도 그녀는 괜찮지 않았다. 햇볕에 타는 건 쉬워도 원래 피부색으로 돌아오기는 힘들었다.
“갑시다.”
월령안은 완곡하게 거절하려고 했지만 육장봉이 먼저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가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육장봉은 월령안보다도 월씨 저택의 구조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다. 월령안이 길을 안내할 필요가 없이 익숙하게 걸어가는 모습은 마치 자기 집을 걷는 듯했다.
손님이 나갔는데, 월령안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함께 걸을 수밖에 없었다.
월씨 저택의 화원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정교하게 꾸며져서, 한 걸음마다 절경이라고는 못해도 세 걸음마다 볼만한 광경이 나오고는 했다.
때는 정오라 뜨거운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었다. 좀 더웠지만, 다행히 정원 안에는 나무 그늘과 작은 호수가 있었다. 또 가끔 미풍이 솔솔 불어와 기분 좋은 시원함을 더해 주어,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육장봉은 느긋한 걸음으로 걸었다. 월령안도 뒤에서 천천히 따라갔다. 처음에는 불만스러웠지만 걷다 보니 제법 좋았다.
두 사람 모두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느긋하게 정원을 거닐었을 뿐이다.
미풍이 가볍게 불어왔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더 가까워진 듯했다. 월령안의 폭넓은 옷자락이 바람에 나부끼다가 가끔 육장봉의 옷깃을 스쳤다. 마치 어린 개구쟁이가 슬쩍 건드렸다가 움츠러드는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줄곧 말이 없었지만, 분위기는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은근한 온기가 느껴졌다. 또 암묵적으로 호흡도 잘 맞았다.
육장봉은 아까 하인이 말한 ‘아가씨’라는 말에서 느낀 불쾌감도 거의 잊었다.
정원의 꽃들과 나무를 바라보며 기분이 좋아진 그는 찬사를 또 한마디 보냈다.
“정원을 잘 가꾸었군.”
그가 장군부에 막 돌아와서 정원을 보았을 때도 이런 기분이 들었다.
그가 없던 삼 년 동안, 그가 좋아하지 않던 장군부는 월령안의 손길을 타고 그에게 가장 편한 모습으로 변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조계안이 전부 망가뜨렸다.
나중에 수리하기는 했지만, 그때 무슨 생각에서였는지는 몰라도 침실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전부 고치게 했다. 월령안이 그를 위해 정성을 들인 곳이라면 전부 손을 보게 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장군부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수리가 끝난 장군부는 그의 마음에 들던 장군부가 아니었다. 어디를 보아도 눈에 거슬리기만 했다.
육장봉은 사색에 잠긴 듯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월령안은 육장봉의 시선에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한마디 했다.
“정원사에게 상을 내려라.”
‘이렇게 하라는 뜻인가?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니겠지?’
육장봉은 월령안의 반응에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바로 얼굴에 핀 웃음을 거두고 진지하게 말했다.
“장군부 뜰이 심하게 망가졌소. 소개해 줄 만한 실력이 좋은 장인이 있소?"
월령안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있어요.”
예전에는 없었지만, 지금은 적당한 사람이 생겼다.
장군부의 정원이 망가진 것은 수횡천 쪽 사람들이 친 사고 때문이 아닌가.
‘수 오라버니와 그 사람들은 지금 다 감옥에 있잖아. 하나같이 가난뱅이인데 무슨 능력으로 뒤처리를 하겠어? 내가 맡는 것 말고 다른 수가 있겠어?’
월령안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호방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일 바로 장인을 보내 드릴게요. 천궁각의 무 선생이 저의 집에 계시거든요. 그분이 정원의 배치에 맞춰 방어 시설을 결합하는 데는 아주 능숙하세요. 만약 장군께서 믿으신다면 저도 무 선생을 보낼게요. 장군 취향대로 꾸며드릴 거예요.”
“좋소. 명세서를 잘 작성해 두시오. 이 공사비는…… 따로 낼 사람이 있소.”
육장봉은 그 협조적인 모습을 보고 월령안의 생각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수횡천의 뒤처리를 해 주도록 내버려 둘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육장봉은 월령안의 이 생각을 지우려고 무심한 척 한마디 덧붙였다.
“돈을 내고 사는 교훈은 가장 작은 교훈이오. 어떤 사람들은 큰코다치고 봉변을 당해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더군. 그래야만 앞으로 충동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지. 마치 아이처럼 사고를 칠 때마다 어른이 나서서 수습을 해 준다면, 그 아이는 점점 더 큰 사고만 칠 것이오. 나중에 어른이 더는 아이의 사고를 수습할 능력이 없어진다면, 고생하는 것은 역시 아이 자신이오. 령안, 그렇지 않소?”
정작 월령안은 육장봉이 친근하고 은근하게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녀는 진지하게 육장봉의 말을 곱씹어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호의에서 한 말이 아님을 알고 있더라도, 이 말이 일리가 있다고 인정했다.
아이가 일을 저지르면 혼나야 한다. 성인은 더더욱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
수 오라버니가 한밤중에 장군부로 쳐들어갈 때 이런 결과도 생각했어야 했다.
수횡천은 항상 그까짓 목숨 하나 걸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목숨 하나 건다고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자기 혼자만 살고 죽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은혜를 갚고 복수를 하는 일은 통쾌하다. 하지만 통쾌함을 느낀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수 오라버니도 다른 사람 생각을 좀 할 때가 된 거야.’
월령안은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장군 말씀이 맞아요.”
육장봉은 입꼬리를 올리며 가볍게 웃었다.
“시간이 된 것 같으니 갑시다. 내가 당신을 수횡천에게 데려다주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