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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281)화 (281/1,004)

281화 운명이 사람을 농락하는구나

사실 월령안은 육장봉이 아무리 큰 대가를 요구하더라도 그걸 치르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됐소’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육장봉의 입에서 나온 ‘됐소’라는 말에, 더 크고 많은 것을 원한다는 뜻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바라는지도 몰랐다.

육장봉은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를 전혀 믿지 못하고 의구심을 가득 품은 표정을 보자, 그도 순간 표정이 굳었다.

“내가 신경을 쓴들, 쓰지 않은들 어쩌겠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나 있소?”

‘월령안의 저 눈빛은 뭘까? 날 못 믿겠다는 뜻인가? 내가 언제 말한 대로 하지 않았던 적이 있나? 월령안에게는 내가 이 정도 신용도 없는 사람인가?’

월령안은 간절한 얼굴로 말했다.

“대장군, 이 일은 제가 바로잡을 수 있어요. 필요하시다면, 황성사의 일을 말해도 됩니다. 대장군께서 황성사 때문에 월씨 저택에 오셨었다고 하면, 굳이 해명할 필요도 없이 소문은 가라앉을 거예요.”

그렇게 한다면 더욱 크게 골치가 아파질 건 뻔했다. 그래도 육 대장군에게 미운털이 박히는 것보다 나았다. 그에 비하면 다른 골칫거리는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졌다.

육장봉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당신은 간도 크군. 황성사까지 끌어들이다니. 폐하께서 노하실까 두렵지도 않소?”

‘머리가 좋기는 하군.’

육장봉은 옆에 있던 찻잔을 들어 감탄 어린 시선을 감췄다.

찻잔 뚜껑을 열고 푸른빛의 찻물을 본 그의 눈 속에 웃음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녀에게 신세를 질 때면 주인의 뜻대로 따르는 손님이 될 수밖에 없다. 그녀가 내키지 않으니 시어 빠진 산사차를 마셔야 한다.

그녀에게 사과를 받을 때는 귀빈 대우를 받는다. 방금 올린 새 우전차도 마실 수 있다.

‘이 아가씨는 보통 현실적인 게 아니로군.’

그래도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육장봉은 두 손으로 찻잔을 들고 있었다.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끼고 있으려니, 월령안의 말이 들렸다.

“대장군께서 불쾌하시지 않았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제 마음속에는 폐하보다 대장군께서 만족하셨는지가 더 중요하니까요.”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하는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육장봉은 의식하지 못한 새에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그는 자칫 추태를 보일까 싶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짐짓 정색해서 눈을 부릅떠 보였다.

“내게 아부해도 소용없소.”

그는 절대 물러지지 않을 것이다.

“장군께서 오해하셨군요. 제가 한 말은 전부 진심이었어요.”

월령안은 진심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에도 성의가 듬뿍 담겨 있었다.

하늘은 높고 황제는 멀리 있었다. 비록 수도에서 살고 있었지만, 그녀에게 황제는 여전히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존재였다.

황제가 그녀를 죽이지 않고 계속 이용하는 이상, 황제가 그녀에게 만족하든 말든 조금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벼슬이 아무리 높아도, 지금 당장 실권을 쥔 사람만 못한 법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황제는 너무나 먼 존재였다. 황제가 그녀를 아무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자신을 낮추면서까지 일개 장사치를 상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육장봉은 달랐다. 그는 바로 눈앞에 있었다. 지금 그녀의 윗사람은 바로 그였다. 반드시 육장봉의 비위를 잘 맞춰야 했다.

심기가 언짢은 육장봉이 손짓 한 번만 해도, 그녀는 아무것도 못하고 짓눌릴 것이다.

“됐소. 내가 넘어가겠다고 한 이상, 이 일은 없었던 일이오. 다시는 따지지 않겠소.”

이 여인이 하는 말이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육장봉의 입가에 걸린 웃음기는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았다.

황제가 왜 항상 명군, 성군이 되고 싶어 하는지, 왜 항상 대신들에게서 영명하다,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치켜세워지는 기분이란 게 확실히 좋기는 했다.

육장봉은 찻잔을 들고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 이 산사차는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는 눈을 들어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불쌍한 척 고분고분하게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월령안을 보자, 육장봉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낮아졌다.

“수횡천을 만나고 싶다고 하지 않았소? 점심을 준비하시오. 식사를 마치거든 내가 데리고 가서 만나게 해 주겠소.”

육장봉은 거의 이틀 밤낮을 꼬박 새웠다. 정신은 멀쩡했지만, 목소리는 가라앉고 조금 갈라져 있었다. 게다가 어조가 낮아지자, 조금 상냥하게 느껴졌다.

그 바람에 월령안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몰래 몸을 흠칫 떨었다. 육장봉이 도대체 뭘 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가 어젯밤에 한 약속을 지키려고 하는 모습을 보자, 기분이 좋아졌다.

“대장군, 감사드립니다. 시간이 아직 이르니 좀 쉬시겠어요?”

기분이 좋아지자, 그녀의 상인 기질도 발휘되었다.

그녀가 사람을 대접하는 방식은, 마치 자기 집에 온 것처럼 살뜰하게 돌보아 주는 것이었다. 대접받는 사람이 마음속으로부터 따뜻함을 느끼게 했다.

마치 지금처럼, 육장봉은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월령안은 그의 피로를 눈치챘다. 그래서 육장봉이 쉴 수 있도록 먼저 말을 꺼냈다.

“괜찮겠소?”

육장봉은 거절하지 않았다.

지금은 괜찮았다. 하지만 오후에는 추밀원에 가야 했다. 저녁에는 또 군영에 가야 했다. 그러니 쉴 수 있는 시간이 아주 적었다. 지금 조금이라도 쉴 수 있다면 아주 좋았다.

“바깥뜰에 손님방이 있어요. 지금 하인에게 준비하라고 할게요.”

월령안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마음도 어느 정도 홀가분해졌다.

당연히 괜찮았다. 어차피 육장봉이 여기서 점심을 먹겠다고 했으니, 당장 떠나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집에서 육장봉이 앉든 눕든 밖의 사람들은 알 수가 없었다.

소문을 낼 사람들은 계속해서 낼 것이다. 다만 육장봉도, 그녀도 신경을 쓰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진이 빠지도록 여기에 앉아 육장봉과 담소를 나누며 밥때를 기다리느니, 그가 쉴 수 있도록 해 주는 게 더 나았다. 그래야 그녀도 잠시나마 조용히 있을 수 있었다.

육장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어차피 월씨 저택에서 밤을 새운 적도 있으니, 낮에 조금 더 머물러도 별일은 아니었다.

월령안은 하인을 불러 육장봉을 안내하라고 했다. 육장봉은 하인을 따라 바깥채로 이동했다.

육장봉이 순순히 이동하는 것을 지켜본 월령안은 몸을 돌려 육삼을 찾았다.

“장군께서는 바깥채에서 잠시 눈을 붙이실 거예요. 옷이 좀 구겨졌던데, 일어나셔서 새 옷으로 갈아입으려고 하실 것 같네요. 육삼 장군, 미리 준비하는 게 어떨까요?”

그녀는 육장봉을 손님으로, 상업상의 동업자로서 대접한다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월 낭자,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육삼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역시 여인들이 세심하다니까. 우리처럼 어려서부터 대장군과 함께 지낸 사람들도 대장군이 지친 것도,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는데. 대장군을 이해하고 챙겨 주는 거로는 우리 열두 명을 합해도 월 낭자 한 사람보다 못하겠구나.

장군께서 이혼하지 않아서, 월 낭자가 아직도 우리 장군의 부인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깝게도 운명이 사람을 농락하는구나. 잘 어울릴 수 있었던 한 쌍이 이렇게 어긋나 버렸어.’

월령안의 말에 육삼은 바로 장군부로 돌아가 육장봉이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몸을 돌리자마자, 월령안의 물음이 들렸다.

“맞다, 육삼 장군, 십이 장군은 어디에 갔나요?”

“십이는 벌을 받고 있습니다.”

육삼은 바로 대답했다. 말을 마친 다음에야 월령안이 무언가를 떠보느라 그랬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이렇게 대답한 게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잘 몰랐다. 그러나 이미 내뱉은 말이니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그저 동요하지 않은 척, 고요하게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월 낭자도 너무하는군. 내가 잠깐 정신을 판 사이에 십이의 일을 묻다니. 내가 이 이틀간 대장군을 따라다니며 말조심하는 법을 배워서, 말을 아꼈기 망정이구나.’

그러지 않고 무언가를 누설해서 장군의 계획을 망쳤다면, 그도 육일, 육이와 똑같은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벌을 받고 있군요. 십이 장군의 다음 휴일은 언제인지 아시나요?”

월령안은 마음속의 의심을 없애 버렸다.

보아하니 그녀의 오해였다. 육장봉이 유언비어에 관하여 더 따지지 않은 것은 그저 상벌이 엄격했기 때문이다.

육십이가 말끝마다 들먹이는 ‘우리 장군님’은 그에게 문만 지키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십이 혼자만의 생각대로 쓸데없는 소리를 덧붙인 것이리라.

그것을 알게 된 육장봉이 죄 없는 그녀가 아니라 진정으로 잘못을 저지른 육십이에게 죄를 묻기로 한 듯했다.

“그건 저도 모릅니다. 십이가 잘못을 저질러서 장군께서도 매우 언짢아하셨습니다.”

월령안이 생글생글 웃자, 육삼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육일, 육이, 그리고 육십이의 비참한 모습을 떠올리자, 더는 월령안과 길게 말할 엄두가 안 났다. 말이 많으면 실수도 잦아지는 법. 그는 벌을 받고 싶지 않았다.

“월 낭자, 시간이 늦었습니다. 제가 얼른 장군부로 돌아가서 장군의 옷을 가져오겠습니다. 그리고 장군께서는 월 낭자가 준비해 주신 어린 양고기를 아주 좋아하십니다. 혹시 댁에 좀 있는지요? 없다면 제가 장군부에 가서 좀 가져오겠습니다.”

육삼은 월령안이 또 물어볼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짐짓 다급한 척하며 대화의 주도권도 가로챘다.

월령안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조금 옅어졌다.

“우리 집에는 없어요. 수고스럽지만 육삼 장군이 가져와야 할 것 같네요.”

그녀는 아까까지만 해도 육장봉을 손님으로 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육삼이 바로 그녀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육삼은 그녀가 육장봉을 위해 미친 짓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를 일깨워 주었다. 당시 그녀는 거금을 들여 국경 밖에서 흙과 풀을 운반해 왔다. 이런 어리석은 짓은 그녀만이 해낼 수 있었다.

월령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육삼이 보지 못하게 하려고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그에게 예를 올렸다. 그렇게 시선에 담긴 자조적인 기색을 감췄다.

육삼을 보낸 뒤, 월령안은 주방으로 갔다. 상에 올릴 요리를 직접 지정했다. 주방장에게도 육장봉의 입맛대로 준비하라고 일러두었다.

모든 지시를 끝마쳤을 때는 이미 반 시진이 지나 있었다.

월령안은 한숨을 돌리고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왜탑(矮榻 – 눕거나 앉을 수 있는 나지막한 평상)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그녀는 일각 후 일어나서는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분홍색 긴 치마를 입고, 머리도 풀었다. 하녀에게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 달라고 한 뒤, 옅은 색의 꽃 두 송이를 꽂았다.

이렇게 치장하니, 마치 열다섯, 여섯 살쯤 되는 소녀처럼 보였다. 온몸에서는 싱그러움이 뿜어져 나왔다.

그녀는 거울을 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눈매가 휘어지면서 아주 사랑스러워 보였다. 월씨 가문의 가주로서의 영리함과 강경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의동생이 아직 어린 걸 봐서라도, 수 오라버니가 적당히 타협해 줬으면 좋겠네. 너무 내 속을 끓이지 말고.”

월령안은 풋풋하게 치장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실소를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녀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수 오라버니는 형부 감옥에 갇혀 들어갔다. 그를 구해내고 싶었지만, 수 오라버니가 협조적으로, 때를 놓치지 말고 조정에 고개를 숙여야만 가능했다.

수 오라버니의 마음을 흔들도록, 그가 타협하도록, 그녀는 어린 모습을 가장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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