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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279)화 (279/1,004)

279화 월령안을 건드리지 마라

조계안은 비웃으며 또 말했다.

“황형, 아직도 장봉이가 야율제를 죽였던 것을 탓하실 겁니까? 야율제가 죽지 않았다면 청희 장공주도 이렇게 빨리 정체를 드러내지는 않았을 겁니다. 저희가 모르는 사이에 청희 장공주의 세력이 강대해졌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육장봉이 누구 때문에 야율제를 죽였는지는, 그 자리에 있는 세 사람 모두가 뻔히 알고 있었다.

조계안도 육장봉이 월령안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꼬웠다. 하지만 그래도 육장봉을 도왔다. 왜냐하면 그도 월령안을 이 일에서 빠지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의 황형은 누군가를 마음에 들어 하면, 그 사람이 무엇을 해도 좋게 보았다. 반면, 누군가가 눈에 거슬리면 그 사람이 아무리 잘해도 아니꼽게만 여겼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온갖 일을 다 엮어다가 그 사람에게 뒤집어씌웠다.

불행하게도 황형은 월령안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조계안으로서는 월령안에 대한 황형의 편견을 없앨 수는 없었다. 황형이 월령안에게 책임을 묻지 않도록, 그녀를 이 일에서 깔끔하게 배제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육장봉은 조계안을 힐끔 보고는 말을 하지 않았다. 조계안은 영리한 사람이었다. 또 황제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딱 적절한 시점에 입을 열었다.

“그야…….”

황제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한참 지나서야 풀이 죽은 얼굴로 말했다.

“잠한성이 또 어디서 사사들을 키웠는지, 알아낼 수 있겠느냐?”

황제는 이 일을 다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화제를 돌렸다.

잠한성과 관련된 일은 항상 육장봉이 도맡아 처리했다. 육장봉은 조계안과는 달리, 언제나 적당한 선에서 물러날 줄 알았다.

황제의 물음에 육장봉이 대답했다.

“제 부하가 잠한성의 고향으로 갔습니다. 아직 받은 소식은 없습니다.”

황제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잠한성이 천명사에 세운 거점을 수횡천이 찾았다고 했지. 장봉아, 수횡천이 무언가를 알고 있지 않을까?”

예전 같았으면 황제도 천천히 찾도록 내버려 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청희 장공주의 야심을 알게 되자, 청희 장공주보다 그 사람들을 먼저 찾아내 기용하고 싶었다.

사사들의 전투력은 무시할 수 없다.

북요의 사절단이 곧 변경에 도착한다. 이런 때에 소란이 일어나서는 안 됐다.

육장봉이 말했다.

“수횡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자와 같은 사람은 고문해도 소용없습니다.”

강호인끼리 통용되는 은어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같은 정보를 가지고 수횡천이 그들보다 더 빨리 천명사의 거점을 찾아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말을 마친 육장봉은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잠한성의 심리적 방어선을 무너뜨린 것은 청희 장공주 덕입니다. 만약 청희 장공주가 없었더라면 저도 잠한성의 입을 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군.”

황제는 잠시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말했다.

“장봉아, 짐이 듣기로는 수횡천이 월령안을 의누이동생으로 삼았다더구나. 짐이 월령안더러 시험해 보라고 하면 소용이 있겠느냐?”

“신은 모르겠습니다.”

육장봉은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조계안은 황제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육장봉을 노려보았다.

‘교활한 소인배 같으니라고! 네가 일부러 그러는 것을 내가 모를 것 같나? 황형이 월령안에게 시선을 돌리게 유도했잖아. 월령안이 수횡천을 만나게 할 기회를 만들어 주느라고.’

수횡천은 큰 죄를 저지른 죄수였다. 그는 잡힌 뒤로는 계속 비밀 감옥에 갇혀 있었다.

육장봉은 월령안이 그와 만나게 할 권한이 있었다. 그러나 그랬다가는 황제의 경계심에 다시 불을 붙일 것이다.

일단 육장봉이 사적으로 월령안을 수횡천에게 데리고 가서 만나게 해 주었다는 것을 황제가 알게 된다면, 그가 다시 월령안을 탓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황제가 먼저 월령안과 수횡천을 만나게 하라고 말을 꺼냈다. 이렇게 되면, 육장봉과는 상관 없는 일이 된다.

육장봉은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자기 목적을 달성했다. 게다가 전혀 트집 잡힐 거리도 없었다.

‘육장봉 이 자식, 정말 갈수록 교활해지잖아!’

조계안은 정말이지 화가 났다.

황제의 허락이 있다면, 월령안이 수횡천을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육장봉은 자연스럽고 교묘하게 이 일을 해냈다.

강호의 일은 이치대로라면 육장봉의 소관이 아니었다. 조정에는 강호의 여러 문파를 상대하는 곳이 따로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일을 두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잠한성은 육장봉이 잡아들였다. 그 뒤의 일도 모두 육장봉이 한 것이었다. 게다가 수횡천도 육장봉이 잡아들였다.

인제 와서 육장봉더러 이 일에서 배제하고 손도 못 대게 한다면, 그의 공로를 빼앗는 꼴이었다.

게다가 육장봉은 앞으로 추밀원을 장관할 예정이었다. 정 안 되면 강호의 사무를 책임지는 부문까지 추밀원의 관할로 들이면 된다.

황제는 속으로 주판을 튕겨 보았다. 그리고 육장봉이 월령안을 데리고 수횡천을 만나도록 허락했다.

조계안은 자신이 월령안을 수횡천에게 데려가고 싶다며, 몇 번이나 대놓고 말하기도 했고, 눈치를 주기도 했다. 하지만 황제는 모른 척했다.

황제는 그와 월령안이 접촉하는 것을 꺼렸다. 당연히 그에게 그런 기회를 줄 리가 없었다.

더구나 조계안은 상처도 낫지 않았는데 황성사의 일을 도맡기로 했다. 그럴 마음이 있더라도 여력이 따라 주지 않았다.

조계안은 화가 났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두 눈 뻔히 뜨고 육장봉이 명령을 받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육장봉이 황궁을 나설 때, 조계안은 싱글벙글 웃으며 가면을 썼다. 그리고 육장봉을 배웅하면서 겸사겸사 그와 황성사의 일을 상의한다고 말했다.

이때, 조계안은 예전처럼 육장봉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육장봉은 싫은 티를 내면서도 밀어내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황제는 육장봉이 개선하고 성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조계안의 계략에 빠졌던 일 때문에, 둘의 마음이 멀어졌을까 걱정하던 참이었다.

둘의 이러한 모습을 본 황제는 걱정을 내려놓고 기쁜 얼굴로 허락했다.

“너희끼리 천천히 이야기하려무나.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알겠어요, 황형.”

조계안은 황제를 등지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귀찮다는 뜻이었다.

두 형제는 황제의 ‘흐뭇한’ 시선을 받으며 서로 어깨를 감싼 채 멀어졌다. 하지만 황제가 자세히 보지 못하는 곳에 이르자마자, 조계안은 육장봉의 복부에 주먹을 날렸다.

육장봉도 양보하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팔꿈치를 조계안의 옆 허리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조계안의 상처를 피해 묵직한 한 방을 선사했다.

황제는 창문 앞에 서서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피었다.

“계안이와 장봉이도 참……. 다 커서도 어릴 때처럼 길을 갈 때도 티격태격하는구나. 정말 조금도 쉬지 않는다니까.”

“조왕 전하와 장군의 감정은 어릴 적부터 쌓아 올린 게 아닙니까. 어중이떠중이가 망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지요.”

황제의 측근 내관인 이반반은 황제의 마음을 잘 알고 있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렇지. 어릴 적부터 쌓아 올린 감정이니…… 고작 여인 하나에 깨지면 안 되지.”

황제 얼굴의 미소가 조금 옅어졌다. 눈에 깃든 어두움도 한층 무거워졌다.

황제는 조계안이 월령안을 남다르게 여기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계안이 월령안과 접촉하고 교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월령안이라서만은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육장봉 때문이었다.

어찌 되었건 월령안은 육장봉의 아내였다. 친구의 아내를 넘보아서는 안 된다. 육장봉이 월령안을 내쳤다 하더라도, 월령안은 조계안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여인이었다.

만약 조계안과 월령안이 이어진다면, 앞으로 무슨 낯으로 육장봉을 보겠는가. 세 사람은 어떻게 지내야 하는가. 그는 황제로서 무슨 염치로 육장봉을 대하라는 말인가.

그는 자기의 친아우가 서운해하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육장봉을 서운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들 형제 사이를 월령안이라는 여인 하나 때문에 망치게 할 수는 없었다.

황제는 창가에 기대어 섰다. 똑바로 걷지도 못하면서 육장봉과 티격태격하는 조계안을 보니, 옅어졌던 웃음이 또다시 활짝 피었다.

‘계안과 장봉이가 형제로서 이십여 년이라는 세월을 헛보낸 게 아니로군. 다시 처음처럼 화해했잖아.’

* * *

그러나 황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육장봉과 조계안은 서로의 사정을 조금도 봐주지 않고 아픈 곳만 골라서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상대가 통증으로 입을 떡 벌릴 정도로 아프게 때리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물론, 입이 떡 벌어지게 아픈 사람은 조계안이었다. 다행히 얼굴에 쓴 가면 덕분에, 그 꼴사나운 모습을 본 사람이 없을 뿐이었다.

반면 육장봉은 무표정했다. 마치 그가 조계안을 때리고 있는 게 아닌 듯 보였다.

“소인배!”

궁문 입구에 도착했을 무렵, 조계안은 팔꿈치를 무기 삼아 육장봉을 강하게 후려쳤다.

육장봉은 진작 예상한 듯, 조계안이 공격하는 순간 손을 돌려막았다. 하는 김에 조계안의 발도 꾹 밟아 주었다.

조계안은 아파서 소리를 지르더니, 낮은 목소리로 욕을 내뱉었다.

육장봉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산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궁문 입구까지 아직 몇 걸음이나 남았다. 육장봉은 조계안을 봐주는 기색 없이 밀쳐내고, 차갑게 말했다.

“폐하의 말을 명심해. 좀 조용히 있어. 월령안을 건드리지 마라. 십 년 뒤에나 다시 이야기하지.”

황제의 인자하고 선량한 성격이 좋을 때도 있었다. 최소한 조계안과 월령안의 접촉을 막는 것만큼은 황제가 잘 처리했다. 형제다운 의리 있는 처신이었다.

조계안이 입을 열었다.

“십 년 뒤에 너랑 무슨 이야기를 하라는 거야? 이야기하더라도 그건…….”

육장봉은 조계안의 말을 잘라 버렸다.

“십 년 뒤에도 월령안은 내 아내다. 너는 나하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

“육장봉, 말을…….”

육장봉은 조계안에게 말할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다. 말을 마치자마자 조계안만 그 자리에 남겨 놓고 바로 멀리 가 버렸다.

조계안은 큰 소리로 욕을 퍼붓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여기는 황궁이었다. 그가 오늘 육장봉에게 한마디라도 욕을 했다가는 당장 온 변경에 소문이 날 것이다.

조계안은 약이 바싹 올라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망할, 내 집인데도 조용히 있지를 못하겠군.”

조계안은 욕을 하자자, 또다시 느껴지는 아픔에 이를 드러냈다.

‘육장봉 이놈, 손속이 아주 악랄하네!’

육장봉이 그의 상처를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상처가 벌어졌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여봐라, 연교를 가져오너라!”

조계안은 온몸에서 지독한 통증을 느꼈다. 특히 육장봉이 마지막으로 밟은 발가락이 너무 아파서 마비된 것만 같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느끼지 못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대로 서기조차 힘들 정도로 너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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