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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278)화 (278/1,004)

278화 짐의 자리를 넘본다는 말이냐?

황제는 가슴이 덜컹했다. 육장봉의 눈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장봉아, 이 일은 지, 짐이 바로 사람을 보내 알아보도록 하겠다.”

“망극합니다, 폐하.”

육장봉도 선을 지켰다.

사실 그는 누구보다도 폐하의 어려움을 알고 있었다. 황제는 궁에 앉아 대신들에게 꼼짝없이 감시당하고 있었다. 조금도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되었고, 조금이라도 틀려서는 안 되었다.

조계안이 아니었더라면 황제가 아는 것이라고는 대신들이 의도적으로 보여 준 것뿐이었으리라. 대신들이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이라면, 황제는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다.

이 황궁에서 나가면,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황제 노릇이 그렇게 쉬운 게 아니었다. 더구나 그는 좋은 황제가 되고 싶었다. 그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육장봉이 황제를 도와줄 수 있는 일도 이 정도뿐이었다.

육장봉은 눈을 감고 말을 하지 않았다.

조계안은 황제와 육장봉이 말을 터놓는 모습을 보았다. 또 자신이 추밀원의 일을 안해도 된다고 생각하자,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거로 하죠. 황성사는 제가 관리하겠습니다. 황형, 걱정하지 마세요. 황성사는 제가 하루빨리 재건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사실 추밀사 노릇을 조금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추밀사가 아니라 추밀원 부사의 직무만 승낙했었다. 황제가 마땅한 인재를 찾게 된다면 추밀원의 일을 떠넘길 작정이었다.

하지만 황형이 그의 뜻을 따라주지 않았다. 어떻게 말해도 그를 대신할 사람을 찾기는커녕, 그더러 부사의 명의로 추밀사의 일을 하라고 했다.

이제는 육장봉이 추밀사의 일을 맡겠다고 했으니 다행이었다. 그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육장봉이 추밀사를 맡겠다고 한 것은 그와 황제의 걱정을 덜어주려는 것이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육장봉은 조계안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다친 데는 괜찮나?”

추밀원은 일이 많았다. 육장봉이 추밀사를 맡으면 황성사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황성사는 기밀을 다루어야 했다. 이런 일은 많은 사람의 손을 거치면 좋지 않았다.

“일상적인 업무는 괜찮다. 내가 오후에 사람을 데리고 황성사로 가지. 뒷일은 내게 맡겨라.”

조계안은 일을 떠넘기지 않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조계안은 병사를 거느리고 전쟁을 치르는 일이라면 육장봉보다 못했다. 그러나 이런 구린 일들을 몰래 조사하는 것으로는 육장봉이 조계안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황제는 조계안에게 며칠 더 쉬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가까지 올라온 말을 도로 삼켰다.

청희 장공주의 일이 사실이라면, 조계안은 정말 쉴 틈이 없었다. 쉬기는커녕 더욱 바빠질 것이다.

황제는 여기까지 생각하자, 미안한 얼굴로 조계안을 힐끔 바라보았다.

마침 조계안이 이를 알아차렸다. 눈썹을 치켜뜨며 조롱하듯 웃었다.

“황형, 이제는 월령안을 감시하는 사람을 도로 불러들여도 되겠지요?”

“짐이 바로 그들을 불러들이겠다.”

조계안이 가만히 있겠다면, 황제도 사람을 동원하여 월령안을 감시하고 싶지 않았다.

황제는 재빨리 대답했다. 말을 마치고서야, 조계안에게 이끌려 무심코 내뱉은 말로 해명을 제대로 한 셈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황제는 그래도 육장봉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범하게,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장봉아, 어젯밤 일은 신경 쓰지 마라. 짐은 널 노린 게 아니었다.”

“폐하, 천만의 말씀입니다.”

육장봉은 속으로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그가 소인의 마음으로 군자의 아량을 가늠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로서는 결국, 황제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황제에게 악의는 없었을지라도, 그의 마음속에는 종묘사직뿐이었다. 종묘사직을 위해서라면, 그 누구라도, 심지어 육장봉마저도 희생시킬 사람이었다.

육장봉은 황제의 종묘사직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월령안을 희생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월령안을 보호하고 싶었다. 이건 그의 사심이었다. 그것도 황제가 알아서는 안 되는 진심이었다.

세 사람이 중요한 일을 연달아 몇 가지나 상의한 덕분에, 난각 안의 분위기는 조금 무거웠다.

황제는 일부러 두어 가지 편한 얘깃거리를 꺼내 육장봉, 조계안과 한담을 했다. 하지만 오늘은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이지, 이야기를 하다 하다 보니 또 소씨 가문이 화제에 올랐다.

사정을 아는 세 사람은 침묵을 지켰다.

육장봉은 그나마 괜찮았다. 그저 찻잔을 들고 말을 하지 않았다.

반면 조계안은 거리끼는 것이 없었다. 그는 동정 어린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더니, 심술궂게 말했다.

“황형, 만약에 진비가 임신하면 누구의 아이를 가진 걸까요?”

황제를 가장 화나게 한 것은, 조계안은 이 질문을 한 뒤, 그에게 대답할 틈조차 주지 않고 자기가 대답을 가로챘다는 점이다.

“오, 잊었네요. 진비는 수마(瘦馬 – 어릴 적 가난한 집안에서 사들인 뒤 교육을 해 부자들의 첩이나 기루로 보낸 여자아이를 가리키는 말)니까, 아이는 안 들어서겠네요.”

조계안은 말을 마치더니, 또 동정 어린 표정으로 황제를 조롱하듯 바라보았다.

“쯧쯧쯧……. 황형, 전 때로는 황형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여인은 출신이 깨끗하지도 못하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쳤는지도 모르잖아요.

그런데도 황형은 그런 여인과도 잘 수 있다니. 역시 보통 사람은 참지 못할 일도 잘 견디신다니까! 저로서는 따라갈 수 없는 경지입니다.”

“조계안, 당장 그 입 다물어라!”

신하에게 여인을 뺏기는 엄청난 망신을 당하고도 말할 수도 없었다. 조계안이 아픈 곳을 찔러대니, 황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조계안에게 호통을 쳤다.

이 아우는 그와 상극으로 태어난 게 분명했다.

이것도 조계안이었기에 그냥 넘어간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 이렇게 함장을 파서, 어엿한 제왕이 망신을 당하게 만들었다고 해 보라. 황제는 반드시 그놈의 구족을 멸했을 것이다.

조계안은 두 손을 늘어뜨리고 말했다.

“말하지 말라면 안 하지요. 그런데 정말 남들이 모를 거로 생각하시나요?”

“너, 네 이놈……! 여봐라! 짐의 검이 어디 있느냐!”

황제는 화가 치민 나머지 사람이라도 죽여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러나 일어나 병기를 찾는 모양새는 사실상 육장봉에게 말려 달라고 눈치를 주는 것이었다.

예상과 달리 육장봉은 강 건너 불구경이라도 하듯, 전혀 끼어들지 않았다.

이 광경을 본 조계안은 즐거워서 연탑(軟榻 – 누울 수도, 앉을 수도 있는 가구의 일종) 위에서 연신 뒹굴었다.

“황형, 황형은 날 이기지 못해요. 체면 구길 일은 그만두시지요.”

황제는 화가 났다. 하지만 더는 난리를 치지 않고 털썩,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씩씩거리며 조계안에게 눈을 부릅떠 보였다.

육장봉은 형제가 장난을 치는 것을 보고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어떻게 되든, 적어도 지금만큼은 그들 셋이 같은 선에 서서 한마음으로 함께하고 있었다.

황제와 조계안이 한바탕 난리를 친 뒤 난각 안의 분위기가 제법 가벼워졌다. 황제도 어느 정도 홀가분해졌다.

셋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한 시진 뒤, 황제가 소씨 가문으로 보낸 수하가 돌아오며, 소 승상의 대답도 가져왔다.

그는 보고하러 난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육장봉과 조계안이 모두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바로 보고해야 할지 말지 잠시 머뭇거렸다. 어쨌든, 떳떳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손을 내저으며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말해라. 모두 한 식구들이니.”

아무리 망신을 당하더라도, 신하와 자신의 여인이 간통한 것만큼 망신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기왕 벌어진 일이라, 황제는 이미 자포자기하는 심정이었다. 황실의 체면이고 뭐고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또한, 황실의 체면은 그가 홀로 세우려 한들 세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말썽쟁이 친아우는 자신의 형마저도 봐 주지 않고 함정에 빠트리는데, 그 혼자서 아무리 노력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폐하, 소인이 명령을 받고 소씨 가문에 다녀왔습니다.

소 승상이 대답하기를, 이십여 년 전에 청희 장공주와 확실히 교류가 있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부부로서의 정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는 다른 것은 묻지 않았다. 묻더라도 소 승상이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 승상이 이 말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

황제도 마음속으로는 진작 예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직접 두 귀로 듣자, 역시 너무 뜻밖이었고 화도 났다.

“짐의 황고모잖느냐!”

문관, 무장, 적의 우두머리, 강호 고수, 그리고 영녕후부라는 공신까지……. 청희 장공주는 정말 각 분야의 고수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손에 넣었다.

‘청희 장공주는 도대체 뭘 하려고 한 거지? 세상이라도 뒤집을 셈이었나?’

“됐다. 물러가거라.”

황제가 화가 난 나머지 추태를 보일까 봐, 조계안은 자신이 나서서 사람을 내보냈다.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황형, 십 년 전에 소 승상이 왜 고집을 부리며 굳이 월 부인을 맞이했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소 승상은 한미한 출신으로, 집안이 부유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돈이 부족해도, 어엿한 승상이 남편과 이혼한 장사꾼 여인을 아내로 맞이할 필요는 없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황제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네.”

조계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는 그늘이 가득 드리웠다. 어두운 눈빛과 어우러져 얼굴의 흉터가 더욱 무섭게 보였다.

“소 승상은 아마도 청희 장공주를 위해 재물을 긁어모았을 겁니다.”

조계안은 어두운 얼굴로 엄숙하게 말했다.

“황형,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잠한성이라도 사사를 배양하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청희 장공주가 군과 조정 사람을 돈으로 매수했는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청희 장공주는 분명 황성사의 사람들과 꾸준히 교류했을 겁니다. 청희 장공주도 그들에게 돈을 적지 않게 썼을 거예요.

황형이 청희 장공주의 봉지에서 세금을 거두지 못하게 했는데, 일개 공주가 어디서 그 많은 돈을 구했을까요?”

“어렸을 때 일이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 육씨 가문은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부호라고 불렸지요.”

육장봉은 두 손으로 찻잔을 들고 있었다. 눈에는 싸늘함이 스쳤다.

육씨 가문은 개국공신으로, 주나라와 함께 일어난 가문이었다. 여러 세대를 거치며 노력했으니, 육씨 가문이 대부호까지는 아니더라도 월령안이 육씨 가문에 시집온 다음에야 겨우 상황이 천천히 필 정도로 가난하지는 않았었다.

유일하게 가능한 해석은, 육씨 가문의 재산을 누군가가 탕진했다는 것이다.

“사사를 키우고, 병권을 가진 공신 가문에 시집가고, 북요 황족의 핏줄을 가진 아이를 출산하다니. 청희 장공주가…… 짐의 자리를 넘본다는 말이냐?”

황제의 꽉 악물린 잇새에서 겨우 몇 마디가 새어 나왔다.

조계안이 피식, 하고 비웃었다.

“못 할 거야 없겠죠? 잊으셨습니까? 부황께서는 황형에게 청희 장공주가 여인이라 다행이라고, 그렇지 않았다면 황위가 자신에게 넘겨졌을 리도, 황형에게 넘겨졌을 리도 없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잖습니까.”

“그래도 여인이 아니냐! 황조부께서 아무리 정신이…… 아무리 아낀다 해도 황위를 넘겨 줄 리는 없었을 것이다. 황조부가 그러고 싶었더라도, 조정 대신들은 반대했을 것이다.”

그래서 황제는 청희 장공주가 이토록 큰 야심을 품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 본 적조차 없었다. 너무나 무서운 일이었다.

“여인이면 또 어떻습니까? 누가 여인이 야심을 품으면 안 된다고 규정이라도 만들었습니까? 그리고 우리 조씨 황조 이전에 말입니다. 선대 황조에는 여인이 황제가 된 선례도 있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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