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난 잘못이 없어!
조계안을 바라보는 육장봉의 눈은 매우 깊어서 감정의 기복을 엿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쪽에 놓인 그의 손은 조용히 꽉 움켜쥐어졌다.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럼 그 늙은이들이 월령안을 청주에 산 채로 도착하게 가만 놔둘지는 생각해 봤나? 그들이 월령안에게 공평하게 경쟁할 기회를 줄 것 같나?”
그토록 간이 큰 월령안도 청주의 이야기를 꺼내자, 안색이 크게 변했다.
월령안은 자신의 사명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청주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면서도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월씨였고, 황제의 노비였다.
그녀의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죽은 뒤, 세상에는 그녀의 버팀목이 되어 줄 사람도, 그녀를 보호해 줄 사람도 더는 없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육장봉의 어조는 늘 그렇듯 평온하고 기복이 없었다. 눈빛에도 아무 변화가 없었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고개를 돌려 더는 조계안을 바라보지 않았다. 마치 무심결에 한마디 던진 것일 뿐, 대답을 원하지 않는 듯 보였다.
그러나 육장봉이든, 조계안이든, 이제 예전과는 달라졌음을 알고 있었다.
육장봉은 화를 내고 있었다. 누구에게 화를 내고 있는지 조계안은 잠깐 생각해내지 못했다.
육장봉은 아무 예고도 없이 마음속의 어두움을 노출했다. 순간, 조계안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심지어 앞으로 월령안을 마주할 면목이 없겠다 싶은 당황스러움마저 밀려왔다.
이 순간, 조계안은 대단히 화가 났다. 아무나 붙잡고 죽이고 싶을 정도였다.
조계안은 당장 육장봉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휘두르고 싶었다. 그의 멱살을 잡고 알려 주고 싶었다.
‘난 잘못이 없어!’
그렇다. 그는 잘못이 없었다.
황숙, 전대 암황은 그에게 잔뜩 어질러진 국면을 남겨 주었다.
황형은 또 명군이 되고 싶어 했다. 아름다운 이름을 길이 나기는 성군이 되고 싶어 했다. 그는 떳떳하고 밝은 길을 가야 했다.
육장봉은 대장군이 되고 싶어 했다. 그는 종묘사직을 지키는 정의로운 대장군이 되어야 했다.
그러려면 어두운 곳에 숨겨진 더러운 일은 누군가가 해야 했다. 그들이 하지 않으니 그가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잘못이 없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잘못한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먼저 그에게 미안한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 미안한 일을 저지른 것은 모두 그 때문이었다. 조계안이 한 모든 나쁜 일은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조계안의 눈에 붉은빛이 떠올랐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고, 해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육장봉은 그를 등지고 더는 보지 않았다.
그리고 조계안 자신도 핏기없는 입술만 달싹거릴 뿐이었다. 결국, 한 자도 내뱉지 못했다. 해명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고, 할 필요도 없었다.
세상에는 누군가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었다. 월령안이 아니어도 다른 사람이 해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도 할 수 있고, 그 같은 어엿한 황자도 할 수 있다. 월령안이라고 왜 안 되겠는가?
조계안은 피식 비웃더니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육장봉이 죽더라도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월령안의 처지는 조계안 혼자만의 ‘공로’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육장봉의 ‘공로’도 무시할 수 없었다.
조계안은 오만하게 고개를 돌리고, 더는 육장봉을 보지 않았다.
‘육장봉이 무슨 자격으로 화를 내는 거지? 화를 내도 월령안이 내야지.’
황제는 육장봉을 보고, 또 조계안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모두 이렇게 고집스러운 것을 보자,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월령안이 화근이라는 것을 진작 알고 있었다. 이 여인에 관한 이야기는 입 밖에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육장봉이 월령안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육장봉은 누구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육장봉이 월령안과 접촉했다는 사실에 안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흠, 짐은 소 승상에게 사람을 보내 물어보려 한다. 너희도 더 묻고 싶은 것이 있느냐?”
황제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실내의 고요함을 깨뜨렸다.
이 둘이 조용한 모습은 무서울 정도였다. 제왕인 그조차도 조금 견디기 힘들었다.
“신은 없습니다.”
육장봉이 먼저 입을 열었다. 늘 그렇듯 듬직한 모습이었다.
육장봉이 먼저 물러나자, 조계안도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그도 건들거리며 대답했다.
“저도 없습니다.”
조계안의 시선이 육장봉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나 한순간이었을 뿐, 시선이 또 비켜나갔다.
‘내가 괜한 생각을 했나? 육장봉이 말만 그렇게 한 거지, 다른 생각은 없었던 걸까?’
아까는 육장봉이 화를 냈다고 느꼈지만, 지금 보니 그런 척을 한 것뿐이었다. 육장봉은 전혀 화가 나지 않은 듯 보였다.
이런 생각이 들자, 조계안은 약간 제 발이 저렸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어색하게 코를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이리저리 피했다.
황제가 말했다.
“그래, 짐이 지금 사람을 보내 묻도록 하겠다. 너희는…….”
“저희는 여기서 소식을 기다리겠습니다.”
육장봉과 조계안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둘은 말을 마치고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상대방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리고 또 고개를 돌렸다.
육장봉은 조계안한테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또 그를 원망하는 것도 아니었다. 조계안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면, 그는 잘못이 없었다. 심지어 가장 좋은 선택을 했다.
육장봉은 단지 월령안을 어떻게 보호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우리 함께 기다리자꾸나.”
황제는 다시 육장봉을 쳐다보았다가 또 조계안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이 둘의 상태가 좀 이상했다.
이 둘이 갑자기 싸우는 걸 방지하기 위해, 황제는 직접 두 사람을 지켜보기로 했다.
황제의 말에 육장봉과 조계안은 반대하지 않았다. 둘은 자리에 앉아 묵묵히 기다렸다.
난각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조계안과 육장봉 중 누구도 이 고요함을 깨뜨리려고 하지 않았다.
황제는 한참 기다렸지만 아무 기척도 들을 수 없었다. 이렇게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사람을 너무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자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장봉아, 황성사의 일은 어떻게 되었느냐?”
“신은 어제 고작 몇 년 전의 일만 보았습니다. 알아낸 것이 많지 않습니다.”
육장봉은 황제와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없었다.
“황성사는 아직도 쓸 만하더냐?”
황제는 황성사에서 몇 명을 쓸 수 있냐고 묻지 않았다. 황성사의 사람들이라면 한 명도 믿을 수가 없었다.
육장봉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성사는 재건해야 합니다.”
황성사를 쓸 만한지, 아닌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반드시 써야만 했다.
조계안이라는 드러나지 않은 세력이 있다고 해도 황성사는 존재해야 했고, 계속 운영하며 유지해야 했다.
이렇게 해야만 간 큰 신하들도 정도를 지킬 것이다. 감히 황제가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고 여기지 않으며, 건성건성 일하지 않을 것이다.
육장봉은 조계안을 힐끔 쳐다보고는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폐하, 추밀원의 지위는 특별합니다. 그 주인이 없어서는 안 되지요. 추밀원의 관리들은 오랫동안 상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을 보호할 사람도, 그들의 소리를 폐하께 전달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 이 년간, 추밀원의 권력은 점점 약해져 갔습니다. 소 승상과 장 승상이 손을 잡고 짓누르니, 더욱더 실권을 잃게 되었지요.
계속 이렇게 나아가다 보면 권력의 균형을 잃게 될 것입니다. 문관들의 권력이 끊임없이 강대해지는 것은 조정에도 좋은 점이 없습니다. 조왕께서 사람들 앞에 나서기 싫으시다면, 황성사를 책임지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황성사는 황제의 이와 발톱이었다. 제왕의 심복이 아니면 맡을 수 없는 자리였다.
앞서 황제는 황성사를 정비하는 사무를 그에게 맡겼다. 육장봉은 황제의 걱정거리를 분담하는 것이 싫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 황제는 일부러 어젯밤의 일을 꺼냈다. 황제가 사람을 붙여 감시하는 상대가 월령안이든, 아니면 육장봉 자신이든 간에, 그는 황제의 의지에 따라 신하로서의 본분을 잘 지켜야 했다.
“네가 추밀사가 되고 싶다는 거냐?”
조계안은 바로 육장봉의 의도를 알아챘다. 그러나 동시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육장봉은 권력욕이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또 조정과도 깊게 연루되고 싶어 하지 않아 했다.
그의 황형이 육장봉에게 추밀사로 부임하여 추밀원을 관리하라고 건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육장봉은 거절했다.
육장봉은 권신(權臣)이 될 생각이 없었다. 병권을 제외하고, 아무 권력도 가지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번에 육장봉이 대승을 거두고 돌아왔다. 황제는 육장봉을 왕으로 봉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육장봉은 예전과 똑같이 거절했다.
육장봉은 병사를 거느라고 전쟁을 치르는 장군 노릇만 하고 싶어 했다. 그는 하루빨리 북요를 무너뜨리고, 현음 고모를 모셔오고 싶어 했다. 이 목표를 제외하면, 육장봉은 다른 일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육장봉이 인제 와서 추밀원을 넘겨받고 싶다고 말하다니, 이건 무슨 뜻이지?’
“맞아.”
육장봉이 선뜻 인정했다.
“왜?”
황제는 묻지 않았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조계안이었다.
황제는 육장봉이 추밀원의 직무를 맡겠다고 하자 기쁘게 웃었다. 그러나 또 조계안의 말을 듣자 또 엄숙해졌다.
육장봉은 권력을 독점하고 휘두르는 데는 줄곧 관심이 없었다. 또 조정의 일에 참견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먼저 벼슬을 달라고 하는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왜냐고?’
육장봉은 속으로 싸늘하게 웃었다. 높은 관직을 가지고, 권력이 막강해진다면 누군가를 위해 뭔가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야만 자신이 보호하고 싶은 사람, 즉 월령안을 보호할 수 있었다.
이런 말은 형제에게는 할 수는 있지만, 황제에게는 할 수 없었다. 주나라의 조왕 전하에게는 더더욱 말할 수 없었다.
육장봉은 마음속 가장 진실한 생각을 황제와 조왕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황제와 조계안이 자신을 믿지 못할까 걱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 마음속에서 자신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권력을 도모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사실을 말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가 사심을 감추고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며, 그들을 형제로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황제와 조왕이 모두 믿을 만한, 허울 좋은 이유를 댈 수밖에 없었다.
육장봉은 입을 열기 전에 이미 이유를 생각해 두었다. 침착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일 년 전, 천궁각에서 개조한 투석기의 도면을 정안현 현령에게 바쳤다고 합니다. 개조한 투석기는 더욱 정교하게 조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속도도 더 빠르고 사정거리도 더 멉니다. 또 다루기가 쉬워 여인들도 조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까지, 저는 천궁각에서 보냈다는 도면을 보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변경에서는 이 일을 아는 사람도 전혀 없습니다.”
육장봉은 여기까지 말하더니, 말머리를 돌려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만약 일 년 전에 개량된 투석기를 전쟁에 동원할 수 있었다면 우리 주나라 사람들의 희생을 얼마나 줄일 수 있었겠습니까? 허무하게 죽어간 주나라의 남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도면만 있었더라면 그들이 죽을 필요가 없지 않았겠습니까?”
육장봉은 늘 침착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목소리에는 살기가 어려 있었다. 물결 한 점 일지 않던 그의 눈에도 폭풍우를 품고 있어, 언제든 폭발할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