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저 둘은 역시 형제로군
조계안은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씩씩거리며 물었다.
“어젯밤에 월씨 저택에 갔었다고?”
“그래.”
육장봉이 드디어 조계안의 말에 대꾸했다. 그리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빛이 조금 더 담담해져 있었다.
“폐하, 신은 어젯밤 월씨 저택에 식사하러 갔습니다.”
그는 원래 사적으로 황제에게 물어볼 심산이었다.
‘청주에는 꼭 월령안이 가야 합니까? 제가 청주로 가서 범씨 가문을 제압하면 안 되겠습니까?’
하지만 이제는 물어보지 못할 것 같았다. 황제는 결국 황제이지, 그의 형제가 아니었다.
그를 감시했던 사람은 황제였다. 조계안이 아니라.
아무리 황제가 그를 총애하고 형제라고 부르더라도 그는 결국 황제였던 것이다.
결국, 달라질 수밖에 없는 일도 있다. 육장봉과 황제의 관계가 그러했다.
지금 육장봉의 담담한 표정에는 아무 감정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식사하러 갔다고?”
화가 나서 눈까지 벌게진 조계안은 펄펄 뛰었다.
“육장봉, 쓸데없이 월씨 저택에는 왜 식사하러 갔단 말이냐?”
‘육장봉, 이놈 너무하잖아! 내가 다친 틈을 타서 몰래 월령안과 접촉했겠다.’
“당연히 내 입맛에 맞아서 그랬지.”
육장봉은 조계안을 흘겨보았다.
“이유는 그것뿐이냐?”
황제는 의심의 눈초리로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그럼 폐하의 생각은요? 신의 집에 금산이 없어서, 월령안을 기쁘게 해 주려고 찾아갔겠습니까?”
육장봉은 춘일연의 일을 들어 황제를 은근히 비꼬았다.
황제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장봉아, 짐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 이런 때일수록 월령안과 왕래를 줄여야지.”
애당초 황제는 돈 때문에 육 노태군이 육장봉을 대신해 월령안을 맞아들이는 것을 묵인했었다. 그러나 그 일은 이미 지난 일이 일이었다.
육장봉이 말했다.
“폐하께서는 철광산의 일을 조사하고 싶으신 게 아닙니까? 신이 월령안을 감시하지 않으면 어떻게 조사하겠습니까? 그리고 얼마 전, 월령안이 하곡의 말 상인이 보내온 군마도 군영으로 보냈습니다. 그 군마들은 대단히 훌륭하더군요. 조정의 마장(馬場)에서 제공한 말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월령안의 덕을 보고도, 월령안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노비로만 아는군. 폐하께서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되지.’
월령안은 황제에게만 기대 사는 궁녀, 내관들과 달랐다.
심지어 월령안은 역대 월씨 가문의 가주들과도 달랐다. 역대 가주들은 어려서부터 황실에 충성하고, 목숨을 걸라는 사상을 주입 받았다.
그러나 월령안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가 태어난 시기가 그 시절과는 달랐고, 태어난 다음에도 또 많은 일을 겪었다. 그녀는 비록 월씨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거의 홀로 자랐다.
월령안은 월씨지만, 황실 노비인 월씨가 아니다.
황제는 월령안의 재능을 잘 알고 이용하려 하면서도 동시에 그녀를 낮잡아 봤다. 그녀를 제대로 사람 취급을 해 주지 않는다면, 조만간 큰코다치게 될 것이다.
예전이었더라면 육장봉도 슬그머니 한마디 일깨워 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황제의 일생은 너무 순탄했다. 순조롭게 옥좌에 등극했고, 대신들의 사랑을 받았다. 어려움에 부딪혀도 육장봉과 조계안이 나서서 해결했다.
황제도 좌절을 겪고, 고생을 해 봐야 한다.
그가 황제라고 해서, 그의 손에 쥔 권세와 부귀를 가지기 위해 누구나 다 그에게 충성하고 목숨을 걸지 않는다는 사실을, 좌절을 겪고 봉변도 당해 봐야만 진정으로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이 세상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리라.
육장봉의 무덤덤한 얼굴에는 아무 감정도 없었다. 목소리도 무심결에 한마디 툭 던진 듯, 전혀 기복이 없었다.
그러나 말 속에 담긴 뜻을 알아챈 황제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흠흠…….”
황제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다 큰 사람이 아직도 헛기침 따위로 시치미를 떼다니요. 장봉이가 눈이 없는 줄 아십니까? 황형이 연기하는 것도 모를까 봐서요?”
조계안은 황제를 흘겨보더니, 그의 연기를 폭로했다.
“쿨럭쿨럭…….”
황제는 더욱 심하게 기침을 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금방이라도 폐까지 토해낼 것 같았다.
조계안은 핀잔을 주기는 했지만, 결국 황제에게 식은 찻물을 건네주었다.
“자, 물이라도 드세요.”
“큼큼…….”
황제의 표정에서는 어색함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몰래 조계안에게 눈을 부라리더니, 찻잔을 받아 한 모금 크게 들이켰다.
조계안은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찻물을 다 마시고 나자, 심술궂게 말했다.
“황형께 말씀드리는 걸 깜빡했네요. 이 물은 제가 마셨던 겁니다. 육장봉의 말에 놀라서 입에 넣었던 물을 다시 뱉어냈지요.”
“욱…… 콜록! 콜록! 콜록!”
황제의 얼굴은 자홍색으로 변하며 부어올랐다. 처음에는 찻물을 토해내려 했지만, 이미 삼킨 뒤였다. 아무리 애를 써도 조금도 토해낼 수가 없었다.
조계안은 더욱 즐거워하며 크게 웃었다.
“황형, 장난이에요. 제가 이 물을 마시긴 했지만, 찻잔은 계속 손에 들고 있었지요. 아까 마신 차는 허공에 뿜어내서, 찻잔에는 들어가지 않았답니다.”
“조계안!”
황제는 화가 나서 호통을 쳤다.
갑자기 조계안이 히죽거리던 것을 그치더니, 정색해서 말했다.
“황형, 내뱉은 말은 뿜어낸 물처럼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입니다.”
“너!”
황제의 얼굴에서 방금 가라앉았던 난처한 기색이 또 확 떠올랐다. 그는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조계안은 황제가 회피하게 두지 않고 따져 물었다.
“황형, 월령안에게 사람을 붙여 감시하는 게 맞습니까? 월령안을 감시해서 뭘 하려는 겁니까?”
“계안아…….”
황제는 조계안을 차마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는 좀 무안한 듯했다.
이 일에 대해서는 황제 쪽에서 할 말이 없었다.
“월령안은 제 사람입니다. 월령안은 저만 책임을 지면 그만이지, 황형께서 책임을 질 필요는 없습니다. 황형이 사람을 붙여 감시하는 걸 보니, 저를 못 믿으시는 모양이군요?”
조계안의 목소리는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다. 그는 황제의 체면을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조계안은 황제가 아니었다. 높은 자리에서 모두의 우러름을 받는 구오지존(九五之尊 – 제왕의 자리)이 아니었다.
‘황형이 장봉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면, 장봉이가 그저 기분만 언짢아할 거라고 여기는 건가? 아니! 육장봉은 언짢을 뿐만 아니라 황형을 경계하기 시작할 거다.’
조계안은 그들 형제 사이가 그 지경에 이르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황형이 사실을 말하게 해야만 했다.
그는 황형이 육장봉에게 사람을 붙여 감시했을 리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육장봉이 어젯밤 월씨 저택에 나타난 것을 황형이 아는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황형이 월령안에게 사람을 붙여 감시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말을 조계안이 직접 할 수는 없었다. 황형이 스스로 말하게 해야 했다.
“계안아, 짐은 너를 믿지 못한 것이 아니다. 짐이 월령안을 감시하는 이유는, 이유는…….”
황제는 서둘러 해명에 나섰다. 그러나 사실을 말했다가는 조계안이 또 화를 낼까 두려웠다. 순간 난처해진 그는 육장봉에게 도움을 바라는 시선을 던졌다.
육장봉과 황제의 눈이 마주쳤다. 기대에 찬 황제의 시선을 받은 육장봉은 덤덤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옆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리더니 차분하게 마셨다.
“폐하께는 신이 많이 부족하셨던 모양입니다.”
함부로 떠봐서는 안 되는 일도 있다. 육장봉은 자신이 화낼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또 화를 내서, 자신의 충성심을 드러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황제의 관심이 월령안에게 향하지 않을 것이다.
조계안은 황제에게 비웃는 기색이 역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니면 저를 못 믿는 겁니까? 저를 경계하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황제가 말을 못 하자, 조계안이 그를 대신해 말했다.
“계안아, 짐이 그럴 의도가 없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잖느냐.”
도움을 요청해도 소용이 없고, 조계안도 물고 늘어졌다. 황제는 뾰족한 수가 없어, 그저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요. 황형은 저를 믿지 않은 적도, 경계한 적도 없죠. 그러나 제가 월령안을 찾아가는 것은 막았지요. 만약 어젯밤, 월씨 저택에 나타난 사람이 저였다면, 저는 문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황형의 사람에게 붙잡혀 왔겠지요?”
조계안은 황제의 체면을 전혀 봐주지 않고 쉴 새 없이 몰아쳐서 비꼬았다.
육장봉도 눈치채지 못할 만한 감시자라면, 황궁의 그 늙은 괴물밖에 없었다. 그자만이 육장봉의 눈과 귀를 피할 수 있었다.
황제는 조계안에게 호되게 면박을 당하기는 했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계안아, 짐은 널 위해서 한 일이었다. 만약 네가 정말로 월령안을 좋아한다면, 십 년 뒤 월령안이 청주에서 진정한 월씨 가주가 된 다음에 너희를 맺어 주마.”
지금의 월령안은 능력이 좀 있긴 했다. 하지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는 법. 월령안이 용이나 봉황이 될지, 아니면 짓밟힐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월씨 가문 자제들은 천성적으로 경영에 큰 소질을 보였다. 그러나 그 뛰어난 재주를 지닌 월씨 자제들도 가주 쟁탈전에서 무수히 죽어 나갔다.
월령안의 친 오라비만 해도 그랬다. 그는 재주로나 도량으로나 모두 월령안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 역시 죽고 말았다.
월령안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다. 또한, 십 년은 긴 세월이었다. 그녀가 이십 년 동안 살아남을지는 그들 중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 심지어 월령안이 살아서 청주에 도착할 수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황제는 아우가 상처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
“황형, 생각이 과하십니다.”
조계안은 퉁명스럽게 황제에게 눈을 흘겼다.
‘십 년 후에 맺어 주겠다고? 황형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만약 월령안이 황제에게 휘둘렸다면, 삼 년 전에 이미 순순히 청주로 가서 범씨 가문 사람들과 싸웠을 것이다. 조계안이 삼 년이라는 시간을 허탈하게 낭비하게 하지도 않았으리라.
그때까지 육장봉은 묵묵히 듣기만 하고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월령안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자, 참지 못하고 한마디 덧붙였다.
“월령안이 청주로 가서 범씨 가문과 가주 쟁탈전을 벌인다면, 단지 보이는 데 놓아두는 장기 말일 뿐이겠지요?”
‘폐하로서도 월령안의 생사를 보장할 수 없다는 말인가?’
“그렇게 듣기 거북하게 말하지 마라. 이 세상에서 장기말이 아닌 자가 누가 있겠어? 월령안을 굳이 장기 말에 비유한다면, 금테를 두른 장기 말이지.”
조계안은 육장봉을 노려보았다. 괜히 끼어들어 성가시게 하지 말라고 눈치를 주는 것이었다.
‘지금 내가 누구 때문에 황형과 다투는 줄이나 알아?’
육장봉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확실히 장기 말은 아니로군요. 월령안은 폐하의 손에 든 날카로운 칼이겠지요. 폐하를 위해 몇몇 노친네들의 방패를 찢어 줄 무기 말입니다.”
무기로서의 월령안은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롭기만 하면 되었다. 그 무기의 생사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육장봉은 자신이 월령안에게 너무 무관심했다고 생각했다.
암황은 조계안이었다. 이 일은 암황의 권리 다툼과 연관이 있었다. 육장봉도 이 일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물어본 적이 없었다. 알려고 한 적은 더욱 없었다.
이는 그가 대신으로서의 본분을 지키는 것이자, 그와 조계안의 암묵적인 규칙이기도 했다. 그들은 상대방의 일을 간섭하지 않았다. 또 서로의 영역에 첩자를 심지도 않았다. 알고 싶은 것이 있다면 직접 물으면 그만이었다. 형제 사이에 말 못 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는 월령안을 신경 쓰지 않았었다. 그래서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조계안도 늘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입을 열지 않았었다.
‘저 둘은 역시 형제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