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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275)화 (275/1,004)

275화 거울에 비친 꽃, 물에 비친 달

잠한성이 용서를 빌었다. 육장봉은 으스대지 않았다. 단지 담담하게 한마디만 했다.

“미안하오. 내게는 오직 적과 내 편만 있을 뿐, 제삼자는 없소.”

말을 마친 육장봉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잠한성의 옆을 스쳐 걸어 지나갔다.

“강산은 영원하지만, 인재는 늘 새롭게 배출되는 법. 내가…… 졌구나.”

잠한성은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다.

그는 비틀거리며 한 걸음 나아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금의 그로서는 망가진 자기 몸조차 지탱할 수 없었다.

그는 졌다. 육장봉의 손에 철저하게 패했다.

지금의 그는 무공을 잃은 것뿐만 아니라, 몸도 마음도 모두 육장봉 손에 무너졌다.

잠한성, 그는 육장봉에게 사로잡혔을 때도 무너지지 않았다. 무공을 잃고, 어깨뼈가 쇠사슬에 꿰뚫렸을 때도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의 자신감이, 모든 것이 육장봉의 손에 산산조각이 났다.

‘육장봉, 저놈은 마귀가 따로 없구나!’

육삼은 옆에 서 있었다. 잠한성을 재촉하지 않았지만, 동정하지도 않았다.

잠한성이 이렇게 된 것은 순전히 본인이 자초한 것이었다.

* * *

육장봉이 잠한성의 심문을 마쳤을 때는 날이 밝아 있었다. 밤새 자지 못했지만, 정신은 맑아 조금도 피로하지 않아 보였다.

오늘도 황제가 여전히 꾀병을 부리고 있으니 조회에 참석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육장봉은 바로 황궁으로 갔다. 지체해도 되는 일이 있고, 조금도 지체할 수 없는 일이 있다. 이번 일은 한시도 지체하면 안 될 일이었다.

“폐하, 대장군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황제의 측근 내관인 이반반이 조용한 걸음으로 황제의 곁으로 다가가 나지막하게 아뢰었다.

이때, 황제는 마침 조계안과 아침 수라를 들고 있었다. 이반반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귀가 밝은 조계안은 듣고 말았다. 그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육장봉? 그놈이 왜 또 입궁했다는 말이냐? 황성사를 조사하러 간다고 하지 않았나? 벌써 끝났다더냐?”

“장봉이가 이 시간에 알현을 청하는 걸 보니 분명 중요한 일이 있는 모양이구나. 어서 들라고 해라. 참, 이렇게 이른 시간에 입궁했으니 아직 식사 전이겠군. 그릇과 수저를 한 벌 더 가져오너라.”

황제가 육장봉에게 얼마나 살갑게 구는지는, 눈이 달린 사람이라면 다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네, 폐하.”

이반반은 그 말을 듣더니 웃으며 대답했다.

육장봉은 궁인의 안내를 받으며 식당으로 왔다. 그가 예를 올리지도 않았는데, 황제는 함께 아침을 들자고 했다.

육장봉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래도 식사를 하기 전에 황제와 조계안에게 예를 올렸다.

“폐하, 조왕 전하.”

“형제끼리 그렇게 예를 갖출 필요 없다.”

황제는 웃으며 말했다. 반면 조계안은 오만하게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됐다. 앉아라.”

육장봉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황제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황제 앞에서 자질구레하게 예의에 얽매이는 대신, 젓가락을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그는 늦게 왔지만 먹는 속도는 빨랐다. 전날 밤에 월령안의 집에서 몸도 마음도 모두 만족스러운 저녁 식사를 마친 터라 지금은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래서 죽 한 그릇만 비우고 바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황제는 그가 배불리 먹지 못했을까 봐 살갑게 몇 번이나 더 권했다. 육장봉이 배불리 먹었다며 여러 번 말하고 나서야 그만두었다.

세 사람은 난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리에 앉자마자 조계안이 말을 꺼냈다.

“내가 자리를 피해야 하나?”

육장봉은 여전히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황제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소란 피우지 마라.”

“황형…….”

황제의 기분을 맞추려는 듯, 조계안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됐다, 됐어. 앉아라.”

황제는 조계안을 조금도 어쩌지 못했다. 조계안이 조금이라도 수그러드는 모습만 보이면, 황제는 바로 원칙을 내팽개쳤다.

육장봉은 이 광경을 보고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옆에 있던 찻잔을 들어 올려 맑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입을 열었다.

“폐하, 신은 청희 장공주의 일을 보고하기 위해 입궁했습니다.”

“청희 장공주가 또 무슨 일을 벌였느냐?”

청희 장공주의 이름을 듣자, 황제의 안색이 바로 어두워졌다.

그는 청희 장공주가 단순하고 연약한 여인이라고 여겨 항상 우대했다. 과거의 일들도 굳이 따지고 들지 않고 덮어 두었다.

그러나 청희 장공주는 그의 뒤통수를 세게 내리쳤다. 황성사도 움직일 수 있는 여인이 도대체 어디가 연약하다는 말인가.

그가 보기에는, 황제인 자신보다도 청희 장공주가 훨씬 강했다.

그가 오늘 계속해서 꾀병을 부려 조회에 참석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대신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황성사를 폐지하라고 난리를 쳤을 게 분명했다.

“신의 부하가 잠한성을 조사하다가, 그자가 청희 장공주와 아주 오래전에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음을 밝혀냈습니다.”

육장봉은 쓸데없는 소리는 조금도 하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풉……!”

마침 차를 마시던 조계안은 깜짝 놀라서 입안의 차를 뿜어냈다. 바로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부적절한 관계? 둘이 잤다고?”

허공에 뿜어져 나간 찻물이 바닥에 튀었다. 그중 몇 방울은 육장봉의 신발 위에 떨어졌다.

육장봉은 싫은 티를 내며 조계안을 흘겨보았다. 그러나 그의 말에는 여전히 대꾸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황제에게 보고했다.

“또 공교롭게도, 신의 부친과 청희 장공주도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심지어 부친은 이것 때문에 혼인 성지를 거역하고, 청희 장공주와 혼인하겠다며 주청을 드렸지요.”

“풉……!”

이번에는 황제가 차를 뿜었다.

“자, 장봉아……. 너 뭐라고 했느냐?”

육장봉은 반응이 빨랐다. 황제가 차를 뿜기 직전, 몸을 일으켜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그래서 황제가 뿜는 찻물을 피할 수 있었다.

‘둘이 똑같군. 뭐 그렇게 호들갑 떨 일이라고. 아니면 순진하게도, 청희 장공주가 시집간 지 벌써 십여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순수하기 그지없는 소녀인 줄로 아는 건가?’

“폐하, 잘못 들으신 게 아닙니다. 청희 장공주와 저의 부친, 잠한성은 모두 친밀한 사이였습니다.”

육장봉은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자기 아버지가 연관된 추문을 말할 때도 감정의 기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 걸 가지고 분노할 질풍노도의 시기는 이미 지났다. 아버지는 죽었고, 어머니도 개의치 않는데 그가 신경 쓸 게 뭐가 있겠는가.

“이, 이럴 수가…….”

황제는 정말로 깜짝 놀랐다. 차가 온몸에 튀었는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였다.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그는 입을 떡 벌린 채 육장봉을 바라보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청희 장공주가, 그, 그래도 공주인데 어떻게 그랬다는 말이냐?”

육장봉이 대답했다.

“고종 황제께서는 청희 장공주가 황성사도 마음껏 움직이게 해 주셨습니다. 못 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황제는 청희 장공주가 후궁에서 자유 없이 자라난 일반적인 공주들과 다르다는 것을 잊은 모양이었다.

청희 장공주는 시집가기 전까지만 해도 진정 세상에서 가장 귀한 여인이었다. 그 시절에는 황자보다도 자유롭게 황궁을 들락거렸다. 황궁을 나가서 못 할 일이 있었겠는가.

“그랬었지. 짐이 어쩌다 잊었을꼬? 황조부는…….”

황제는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다음 정신을 다잡고 물었다.

“이 일은 확실한 것이냐?”

육장봉은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폐하께서는 제 부친과 잠한성이 왜 청희 장공주에게 마음을 쏟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청희 장공주가 계속 잘못을 저질러도, 심지어 가족의 목숨까지도 나 몰라라 하며 성지를 거역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정말 단지 청희 장공주가 아름다웠기 때문이겠습니까?”

세상에 어여쁜 여인은 많고도 많았다. 기루의 화괴들만 해도 용모와 재능이 뛰어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육장봉의 아버지가 아무리 못났어도, 육씨 가문에서 심혈을 기울여 길러낸 후계자였다. 제아무리 어리석었다 해도 여자 하나에 정신이 팔려 죽네 사네 할 리는 없었다.

잠한성이 지금은 보잘것없지만, 젊었을 때는 그래도 품위 있는 대협객이었다. 그를 좋아하는 강호의 여협도 부지기수였다. 그가 단지 얼굴만 몇 번 본 여인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며, 주나라를 배신할 만한 일을 저지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을 것이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말하고 보니 좀……. 사실, 청희 장공주를 만날 때마다 짐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단다. 청희 장공주가 아름답기는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렇지, 육속 장군과 잠한성이 그녀를 위해 죽네 사네 할 정도는 아니라고 여겼었다.

짐은 몰래 이런 생각도 한 적이 있었단다. 육속 장군과 잠한성이 혹시 뭐에 홀린 것은 아닐까? 왜 하나같이 미친 것처럼 굴까, 하고 말이다. 네가 이렇게 말하니 그 많은 일이 이제야 이해되는 것 같구나.”

확실한 증거는 없었지만, 황제는 육장봉의 말을 받아들였다. 예전의 그는 육속 장군과 잠한성이 청희 장공주에게 바치는 사랑이란, 마치 거울에 비친 꽃, 물에 비친 달처럼 아주 아름답지만 현실적이지 않다고 느꼈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 아가씨들이라면 재자와 미인의 아름답고 몽환적인 사랑 이야기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이런 일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육장봉의 말을 듣고 나자, 이것이야말로 진실이라고 느껴졌다.

“청희 장공주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사람은 제 부친과 잠한성 말고도 소 승상이 있습니다.”

육장봉은 이 충격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또 한 번 날벼락을 떨어트렸다.

“뭐라고? 소 승상?”

황제는 경악했다.

“소, 소희, 그 노친네가?”

조계안도 예전의 느긋함을 버리고 눈을 반짝거렸다.

이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육장봉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소 승상의 신분이 신분이다 보니, 신이 심문할 수가 없었습니다. 폐하께서 사람을 보내 물어보시지요.”

우물에 빠진 틈에 돌을 던져야 한다.

소씨 가문이 황제의 미움을 받고 있을 때를 틈타 소 승상을 완전히 짓밟지 않는다면, 다음 기회가 언제 올지 모른다.

“장봉아, 이 일의 중요성은 알겠지?”

황제는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압니다. 그래서 조금도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육장봉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이 정보는 네가 알아낸 것이 확실하냐?”

육장봉을 바라보는 황제의 시선에는 심문하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육장봉은 전혀 피하지 않았다. 황제의 눈을 직시하며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황성사의 옛일과 잠한성의 자백을 통해 추리한 것입니다.”

그는 황성사에서 쓸모 있는 단서를 찾아내기는 했다. 그러나 월령안이 이 일을 밝히기 전까지는 이 두 가지를 함께 연결 짓지는 못했다.

월령안의 지적이 아니었다면, 청희 장공주에게 이런 속셈이 있다는 것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젯밤, 네가 월씨 저택에 가서 한 시진 정도 있었다지. 왜 그랬는지 짐이 알아도 되겠느냐? 네가 월씨 저택에 있는 한 시진 동안 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냐?”

황제는 원래 이 일을 거론하고 싶지 않았다. 말을 꺼내면, 형제간 감정이 상하리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이 너무 공교롭게 들어맞았다. 확실히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청희 장공주의 일을 알아낸 사람이 육장봉이라면 괜찮았다. 그러나 월령안이 알아낸 것이라면 제대로 조사해야 했다. 황제인 자신도 알아내지 못한 일을, 월령안이 어떻게 알아낼 수 있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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