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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274)화 (274/1,004)

274화 잠한성의 심문

육장봉은 월씨 저택을 나서자마자 말을 채찍질하여 장군부로 돌아왔다.

“잠한성의 심문은 어떻게 됐느냐?”

그는 장군부에 발을 들이자마자 입을 열었다.

월령안의 말이 사실이라면, 청희 장공주의 일은 신중히 처리해야 했다.

북요의 사신들이 변경에 도착하기까지 보름 정도 남았다. 그동안 변경에는 그 어떤 소란도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제 막 평화를 찾은 국경이 다시 시끄러워질 것이다.

주나라 군은 북요와의 전쟁에 패배할 것을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면 주나라도 크게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육삼이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그자를 서재로 데리고 오너라. 내가 직접 이야기해 보겠다.”

육장봉은 냉혹한 얼굴로 말했다. 눈에는 차가운 살의가 엿보였다.

그의 부하들이 선혈로 이룩한 변방의 평화였다. 그 누구도 그 평화를 파괴하게 둘 수 없었다.

그 상대가 청희 장공주는 물론, 신이라고 해도 어림도 없었다.

“네, 장군.”

육삼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육삼은 본인이 직접 감옥으로 가서 잠한성을 데리고 육장봉의 서재로 갔다.

“잠 맹주, 앉으시오!”

육장봉은 잠한성을 난처하게 만들지도, 그에게 위세를 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잠한성은 육장봉을 방어하며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경계하는 시선으로 육장봉을 바라보며 맞은편에 앉았다.

그동안 육장봉의 수완에 대해서는 배운 바가 있었다.

“잠 맹주, 내가 당신을 잠 맹주라고 불러야 하겠소, 아니면 숙부라고 불러야 하겠소? 베갯머리 순서대로 따져보면, 당신은 내 생부와 형제로 지내야 할 사이인데.”

육장봉이 입을 열자, 진한 조롱과 비난이 쏟아졌다.

“육 대장군, 그게 무슨 뜻인가?”

잠한성은 어리둥절했지만, 속으로는 경계심을 다잡았다.

오늘 육장봉이 내뿜는 살기는 함정을 파 놓고 그를 잡아들이던 날보다 더 강렬했다. 좋은 뜻으로 보자고 했을 리가 없었다.

잠한성은 육장봉에게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를 경계하느라 정작 그의 말뜻은 전혀 깨닫지 못했다.

이를 본 육장봉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잠한성도 정말 늙었군.’

잠한성에게서 더는 강호인 특유의 날카로운 기세도, 무림 제일 고수로서의 오만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청희 장공주가 정말 사람을 제대로 망쳐 놓았다. 멀쩡한 무림 고수가 그녀의 손에서 이렇게 망가졌다.

“보아하니, 잠 맹주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나 보군. 다시 한번 말해 주겠소. 잠 맹주, 잘 들으시오. 만약 베갯머리 순서로 따진다면, 그쪽과 내 아버지는 형님, 아우하며 지내야 할 사이오.”

육장봉은 누군가의 체면을 봐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일부러 ‘베갯머리’라는 네 글자를 강조했다.

잠한성은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육 대장군, 빙빙 돌리지 말고 대놓고 말하게. 나는 무식쟁이라, 이렇게 빙빙 둘러 이야기하면 알아듣지 못하네.”

“쉽게 말해서 우리 아버지와 청희 장공주 사이에는 과거가 있었소.”

육장봉은 이 일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굳이 여러 번 언급하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잠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아버지가 청희를 연모했지만, 구애에 실패했었지.”

이것은 비밀도 아니었다. 그때 육속 장군은 청희 장공주 때문에 혼인하라는 성지도 거역했었다. 이 사건을 아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육속 장군은 성지도 거역했지만, 결국 청희 장공주를 얻지는 못했다.

‘역시 똑같이 어리석군.’

육장봉이 비웃었다.

“잠 맹주께 실망을 안겨드리게 된 것 같군. 내 아버지는 구애에 실패한 게 아니오. 청희 장공주의 첫 남자였으니까.”

“그럴 리가 없어!”

잠한성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야말로…….”

말을 하던 잠한성은 갑자기 뭔가를 느낀 듯, 입을 닫았다.

‘육장봉은 지금 나를 떠보고 있는 거다.’

“허!”

육장봉이 비웃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내가 아는 내용이 정말 사실인가 보군. 청희 장공주와 당신들 사이에는 역시 떳떳하지 못한 관계가 있었어.”

월령안의 서재에서 나서는 순간, 육장봉은 다짐했다. 남을 속이려면 자신을 먼저 속여야 한다.

‘청희 장공주의 과거에 대한 것은 모조리 내가 알아낸 것이지, 월령안과는 상관이 없다.’

이번 일에서는 반드시 월령안을 철저하게 제외해야 했다. 월씨 가문이 황궁에 사람을 심어 황실의 비밀을 엿들었다고 황제가 의심하게 해서는 안 된다. 육장봉은 그렇게 다짐했다.

“그, 그걸 어떻게 알았나?”

잠한성은 순간 식은땀이 흘렀다. 그리고 무언가 깨달은 듯이 떠듬떠듬 덧붙였다.

“그리고 ‘당신들’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와 청희 장공주의 남다른 관계는 그들 둘만 알고 있는 일이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육장봉으로서는 알아낼 수 없는 일이었다.

육장봉이 말했다.

“오래 전, 아버지는 청희 장공주의 속임수에 넘어가 정을 통했지. 아버지는 자신이 청희 장공주를 더럽혔다고 여겨 죄책감을 느꼈소. 그래서 그 이유로 혼인 성지를 거역하고, 청희 장공주와 혼인하겠다고 주청했지.

청희 장공주가 직접 나서서 설득하고 나서야 아버지는 포기했소. 그런 게 아니라면, 청희 장공주가 뭐가 대단해서 육씨 가문의 가주가 죽네 사네 했을 거라고 생각했소?”

그의 아버지는 애정 방면에서는 확실히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죽을 때가 되어서야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었다.

아쉽게도 때는 이미 늦었다. 그의 어머니는 진작에 그의 아버지를 내려놓았다.

아버지는 임종 직전에 후회와 고통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것만 떠올리면 육장봉은 마음이 돌처럼 무거워져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그가 어렸을 때 본 아버지는 청희 장공주에게 쩔쩔매며 휘둘리고는 했다. 마지막 몇 년 동안은 바싹 야위어 후회로 땅을 치는 처량한 모습이었다.

그는 수도 없이 다짐했다. 사랑이란 독과 같은 것이니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그러나 세상사는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는 월령안이 독을 품은 줄 알면서도, 기꺼이 그 위험을 감수하고 싶었다.

육장봉은 여기까지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자조적인 웃음을 띠었다. 그러나 곧 개인적인 감상은 내려놓고 냉정하게 말했다.

“당신과 청희 장공주의 만남이 영웅과 미인의 만남인 줄 알았소? 아니, 당신들은 계략에 놀아났소. 그 관계도 다 계략이었을 뿐이오. 물론, 당신들을 속인 사람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청희 장공주 본인이요. 우리 아버지와 당신 말고도, 소 승상과 야율제의 부친이 청희 장공주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지.”

“그, 그럴 리가 없어. 청희……. 그때는 내가 청희에게 미안한 짓을 했어. 내가 청희를 더럽혔으니까. 그리고 청희도 나 때문에 야율제의 아비한테서 협박을 받은 거였네. 청희를 모욕할 생각은 하지 말게.”

잠한성은 크게 화를 냈다. 하지만 내뱉는 말에서는 자신감이 부족했다.

어떤 일들은 자세히 따져보고 싶지 않아 덮어 두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가 있는 일이었다. 누군가가 지적하면, 예전에는 가볍게 지나쳤던 사소한 부분들이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때 나는 다친 몸으로 황실의 별원에 들어갔었다. 그건 우연이었어. 청희가 나를 구해 준 거다. 청희가 날 구해 줬단 말이다.”

잠한성은 그와 청희 장공주의 만남은 우연이고, 아무런 함정이나 속임수가 없었다며 계속 강조했다.

그러나 육장봉은 그를 놓아주지 않고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청희 장공주는 고종 황제가 제일 아끼는 공주였소. 신변을 지키는 고수도 아주 많았겠지. 다친 당신이 그 사람들의 시선을 쉽게 피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나? 당사자의 지시가 없었다면, 당신이 청희 장공주를 만날 수나 있었을까? 그리고 잘 생각해 보시오. 그때 어떻게 다쳤소? 단지 우연이었소? 잠한성, 잠 맹주. 현실을 마주 보시오. 이 세상에는 그렇게 여러 번이나 겹치는 우연은 없소. 만약 정말 있다면, 그건 우연이 아니라 계획이요.”

심문하는 수단 중에는 끊임없이 범인의 자신감을 무너뜨리는 방법이 있다. 그리고 범인이 확신하지 못하는 한 부분을 반복해서 추궁하여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범인은 심문자의 인도하에 잊어버렸던 사소한 부분까지 떠올리게 된다. 깊은 의식 속에 잠재웠던 기억들이 하나둘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왜곡되는 기억도 있다. 심문자의 인도에 따르다 보면, 심지어 자신의 기억에 속기도 한다. 그래서 벌어지지도 않은, 자기가 상상했던 일들을 진짜라고 믿게 된다.

지금 이 순간, 육장봉은 잠한성의 심리적 경계선을 무너뜨렸다. 그가 원한다면 잠한성이 더 많은 일을 말하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육장봉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잠한성이 더 많은 것을 자백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저 잠한성이 청희 장공주와 과거에 깊은 관계를 맺었다는 것만 인정하면 충분했다. 다른 것은 황제가 알아서 조사할 것이다.

“됐소. 잠 맹주, 난 당신의 과거를 캘 생각이 없었소. 단지 후배로서, 당신이 말년을 처량함과 후회 속에서 보내지 않기를 바랄 뿐이오. 당신에게 연루된 사람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소. 수횡천도 당신 때문에 형부 감옥에 갇혀 있지. 살아서 나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육장봉은 다시 한번 잠한성에게 큰 타격을 가했다.

잠한성은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심지어 그와 청희 장공주의 일을 자세히 생각해 볼 틈도 없이 벌떡 일어났다.

“수횡천? 육장봉, 그자는 무고하오. 그들은 전부 무고한 사람들이오. 그들을 놓아주시오! 무슨 일이 있다면 나한테 따지시오!”

“난 내 아버지 말도 안 듣는데, 당신 말을 들을 것 같소?”

육장봉은 일어서더니 의자에 걸친 피풍의(披風衣 – 망토와 비슷한 옷)를 집어 느긋하게 둘렀다.

“내가 중요하게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 봐야겠소. 더는 함께하지 못하겠군.”

육장봉은 피풍의의 매듭을 묶고 목소리 높여 명령했다.

“여봐라. 잠 맹주를 돌려보내거라.”

“육장봉, 원하는 것이 뭔가? 알려 준다면 그대로 하겠네. 다른 사람한테까지 손을 뻗지는 마시오. 그들은 모두 무고하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단지 날 돕기 위해…….”

잠한성의 두 눈은 벌게져 있었다. 그는 두 손으로 탁자 가장자리를 단단히 짚으며 육장봉에게 다가가 막으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잠한성은 무공을 잃었다. 쇠사슬이 어깨뼈를 꿰뚫고 있어, 움직일 때마다 고통을 겪어야 했다.

지금은 육장봉을 막아서기는커녕 뼈를 꿰뚫는 고통 때문에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제 발로 일어나 몸을 꼿꼿이 세우고 육장봉과 마주 서는 게 한계였다.

그러나 잠한성은 물러설 수도, 주저앉을 수도 없었다. 반드시 육장봉을 마주해야만 했다.

그날 밤, 장군부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그를 구하기 위하여 장군부에 쳐들어왔다.

그때 그는 밖에서 나는 싸움 소리를 들으며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만약 이들이 성공한다면 자유를 찾게 되리라. 일단 도망치기만 하면, 다시는 육장봉에게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날이 밝을 때까지 그가 있는 곳까지 들어오는 사람이 없자, 기대를 내려놓았다.

그는 그 사람들이 육씨 저택의 감옥에 갇히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의 무공이 강해, 작전이 실패하자 도망쳤을 거라고 스스로를 속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육장봉은 그의 마음속의 희망을 짓밟아 버리고, 스스로를 속였던 환상마저 깨뜨렸다. 그가 잔혹한 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는 죄인이었다.

그에게 불순한 의도를 품고 이용했을지도 모르는 여인을 위해, 자기를 추종하고 숭배하는 수많은 사람을 해쳤다.

그렇다. 육장봉 앞에서는 청희 장공주와의 만남, 교제, 사랑이 모두 그녀가 꾸민 일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 사실을 조금씩 믿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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