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이 일은 내게 맡기시오
육장봉이 말했다.
“좋소. 내일 집사더러 가서 날짜를 고르라고 하겠소. 걱정하지 마시오. 최대한 빨리 혼인하게 하겠소.”
소 승상도 그러기를 바랄 것이다.
월령안은 담담한 웃음을 지었다.
“축하드려요.”
‘육비우와 소함연이 혼인을 빨리 하든, 말든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육장봉이 일부러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뭘까? 나더러 선물이라도 하라는 건가?’
“함께 기뻐해 줘서 고맙소.”
육장봉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하면 월령안이 조금이라도 기뻐하지 않을까?
‘내가 여기서 기뻐할 일이 뭐가 있는데? 나도 축하하긴 뭘? 육장봉은 무슨 생각인 거야?’
월령안은 따지기도 귀찮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장군, 또 다른 용건이…….”
육장봉이 언짢은 듯 말했다.
“지금 나더러 그만 가라고 눈치를 주는 것이오?”
월령안이 자꾸 다른 일이 더 있냐고 묻는 것에서 손님을 쫓아내려는 의도가 너무 뻔히 보였다.
‘내가 그렇게도 월령안 눈에 거슬리나? 나와 함께 한방에 있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나는 건가?’
월령안이 말했다.
“대장군, 오해하셨습니다. 저는 대장군께 보고드릴 일이 있었어요. 지금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그녀는 조금이라도 빨리 용건을 다 끝내고, 육장봉을 보내고 싶었다.
오늘 밤, 육장봉은 너무나 이상했다. 그녀의 직감이 위험하다고, 빨리 피하라고 알려 주고 있었다.
육장봉이 말했다.
“무슨 일이오? 말해 보시오.”
원래 그가 오지 않더라도 월령안은 그에게 용건이 있었다.
‘오늘 밤, 내가 잘못 왔나? 내가 오지 않았더라면 월령안이 먼저 찾아왔을까? 아깝군…….’
월령안은 짐작도 못 했지만, 육장봉, 이 생각이 깊은 남자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단어를 신중하게 고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대장군, 제가 청희 장공주의 옛일을 좀 알아냈어요.”
“말해 보시오.”
육장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청희 장공주는 소 승상, 잠한성 모두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어요. 알고 계신지요?”
월령안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진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 육장봉도 월령안을 놀리려는 생각을 접었다.
“부적절한 관계라는 게 무슨 뜻이오?”
“청희 장공주와 잠한성은 몸을 섞은 사이예요. 그들 둘이 엮인 것은 겉보기에는 우연인 것 같지만, 사실은 청희 장공주가 잠한성에게 수작을 부린 거였어요. 청희 장공주가 소 승상과 더 깊은 관계를 맺었는지는 저도 몰라요. 이건 소 승상에게 직접 물어봐야 해요.”
월령안은 육장봉 아버지의 일을 말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아들 앞에서 그 아버지의 허물을 들추어냈다가는 밉보일지도 몰랐다.
“당신이 알아낸 정보가 믿을 만하다고 확신하오?”
육장봉은 월령안이 아니었다. 그는 정치적인 부분에 대해서 훨씬 예민했다. 이 일을 듣는 순간, 사건의 심각성을 알아챘다.
“잠한성은 바로 장군의 손에 있으니까 심문해 보시면 되죠.”
월령안은 노인을 완전히 믿었다.
노인은 신비로운 사람이라, 자신의 과거를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하지만 월령안은 그가 절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여봐라!”
육장봉이 외쳤다.
이 일은 대단히 심각했다. 육장봉은 월령안을 믿었지만, 확인해야 할 건 해야 했다.
“네, 장군.”
서재 밖에서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월령안은 그쪽을 힐끔 보더니 말없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육장봉의 암위는 늘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구나.’
육장봉이 분부했다.
“잠한성을 심문해라. 그자와 청희 장공주 사이의 모든 일을 알아야겠다. 알겠느냐?”
앞서 그들은 잠함성을 심문했었다. 하지만 그와 청희 장공주 사이의 사적인 일에는 전혀 집중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잠한성이 청희 장공주를 연모하고, 그녀를 위해 해서는 안 될 일을 많이 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검은 그림자는 대답하고 소리 없이 떠나갔다.
암위가 떠나간 뒤, 육장봉은 다시 월령안에게 눈길을 돌렸다.
“당신이 청희 장공주와 잠한성 사이의 일을 알아냈으니, 그녀와 내 아버지 사이에 대해서도 알아냈겠지?”
“아니라고 한다면, 장군께서 믿으시겠어요?”
월령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믿지 않을 거요.”
육장봉은 책상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 소리는 빠르고도 무거웠다.
“말해 보시오.”
“정말 들으시려고요? 그렇게 좋은 일은 아니었어요.”
월령안은 미리 경고했다. 육장봉은 성격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조계안만큼 종잡을 수 없는 변덕쟁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똑같이 제멋대로이고, 다른 사람의 기분 따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육장봉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하시오. 아무리 듣기 싫어도, 사생아라는 소리보다 더 듣기 거북하겠소?”
그의 아버지는 그때의 일을 입 밖에 꺼내려 하지 않았다. 그가 조사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또 그에게 청희 장공주에게 복수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도록 강요했다.
그의 아버지는 항상 청희 장공주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아버지가 도대체 왜 청희 장공주에게 미안해야 하는지 들어나 봐야겠군.’
육장봉은 듣고 싶었다. 월령안도 숨길 수는 없었다. 노인이 알아낼 수 있는 일이라면 육장봉도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다.
그래도 육장봉의 체면을 생각해서 월령안은 단어를 신중하게 골랐다.
“사실 뭐 별일은 없었어요. 청희 장공주가 선대인(先大人 – 남의 돌아가신 아버지를 높여 부르는 말)을 먼저 유혹했어요. 아마도 선대인께서 지나치게 냉정하셨나 봐요. 청희 장공주는 선대인께서 자신의 순결을 빼앗았다고 수작을 부렸지요. 선대인께서 그 당시 다른 사람과 혼인을 약속한 몸으로 청희 장공주의 순결을 더럽혔다고 여기셨대요. 그래서 청희 장공주에게 죄책감을 가진 거라고 들었어요.”
월령안은 육장봉의 아버지를 최대한 좋게 이야기하느라 노력했다. 어차피 노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 뻔했다.
육장봉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정말 내 아버지가 청희 장공주의 순결을 빼앗았단 말이오?”
어쩐지 아버지는 항상 청희 장공주에게 미안하다고 했었다. 그래서 황실의 분노를 살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고종 황제에게 어머니와의 혼약을 취소하겠다고 했던 것이었다.
‘역시……. 어리석군.’
월령안이 말했다.
“저도 확신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시간상으로는 선대인과 청희 장공주가 알게 된 시점이 가장 빨라요.”
그 말인 즉슨, 재수 없게 청희 장공주의 첫 사냥감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여복이 적지 않으셨군.”
육장봉이 조롱하며 말했다.
아버지가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진작 알았더라도, 육장봉은 여전히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에야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그다음에는 어땠던가.
청희 장공주가 영녕후부에 시집간 다음에도, 그의 아버지는 여전히 그녀가 육씨 저택에 들락거리게 했다. 심지어 그에게는 어머니라고 속이기까지 했다.
그의 아버지가 청희 장공주에게 속아 넘어가 휘둘린 것도 당연했다. 선황의 미움을 받아 평생 뜻을 펼치지 못한 것도, 죽을 때까지 어머니의 용서를 받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월령안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자기 아버지를 저렇게 비웃어도 괜찮은 거야?’
하지만 육장봉은 몰라도, 월령안은 그럴 수 없었다. 그녀로서는 못 들은 척, 시치미를 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육장봉은 그녀에게 시치미를 뗄 기회를 주지 않았다.
“계속 말해 보시오.”
“뭐를요?”
“청희 장공주의 일 말이오.”
“다 했는데요.”
“겨우 이것뿐이오?”
“어…… 고종 황제께서 청희 장공주에게 만약 네가 사내아이였더라면 황태자 자리는 네 것이었을 거라고 사적으로 여러 번 말씀하셨대요. 이것도 되나요?”
월령안은 말하면서 육장봉의 얼굴을 살폈다. 육장봉이 미간을 찌푸리는 것을 보자, 잠시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청희 장공주는 절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쉬운 사람이 아닐 거예요. 그 단순함, 순진함, 연약함, 무고함은 모두 우리에게 보여 주려고 꾸며낸 것이니까요. 만약 제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면, 청희 장공주는 자기와 야율제의 관계를 황제가 알았다는 것도 눈치챘을 거예요. 황성사의 사람들을 움직인 것도 자기가 단순하다고 믿게 하기 위해서였어요. 황제가 자기의 멍청함을 보고, 경계심을 내려놓게 하려고요. 야율제의 일로 자기를 경계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예요.
물론, 황성사를 움직인 게 영녕후부를 끌어내려는 의도일 수도 있어요. 영녕후부에 시집간 지도 오래되었는데 아직도 세자비잖아요. 영녕후부의 사무에는 전혀 손을 댈 수가 없었으니 마음이 조급해질 만도 하죠.”
뒷이야기는 노인도 월령안에게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멍청이도 아니고, 노인이 한 많은 이야기를 통해 청희 장공주의 야망을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도 청희 장공주가 황성사의 사람들을 움직인 의도를 추측하지 못하는 사람이 바보였다.
“내게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한 건, 청희 장공주는 야망이 있는 사람이고 아들을 낳아 황제로 만들려고 했다는 걸 알려 주려는 거였소?”
육장봉은 청희 장공주가 이토록 야망이 있는 사람인 줄은 정말 몰랐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월령안을 또 새로 보게 되었다.
청희 장공주와 그녀의 몇몇 추종자들의 일은 조계안의 부하들도 이토록 많이 알아내지 못했다. 그런데 월령안은 어떻게 알아냈을까.
‘혹시 월씨 가문에서 황궁에 첩자를 많이 심어 둔 것은 아니겠지? 이 일은…… 황제가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월령안이 말했다.
“장군, 역시 지혜로우시군요.”
그녀가 굳이 청희 장공주의 야심을 까발릴 필요는 없었다.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청희 장공주가 한 일을 보기만 하면 다 알아챌 수 있으리라.
“됐소, 이 일은 내게 맡기시오. 당신은 더 묻지 마시오. 또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시오. 알겠소?”
육장봉은 몸을 일으키더니 두 손으로 탁자를 짚은 후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어조가 이상할 정도로 엄했다.
월령안은 갑자기 울컥했다. 일어나서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육장봉에게 예를 올렸다.
“대장군께 감사드립니다. 잘 알겠습니다.”
육장봉이 이렇게 말한 것이 그녀를 보호하고 두둔하기 위해서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노인은 조계안이 아닌, 육장봉에게 알리라고 했다. 육장봉이 비록 그녀를 내치기는 했으나, 됨됨이는 믿음직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음.”
육장봉은 가볍게 대답했다. 깊은 눈망울에 별빛처럼 작은 반짝임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나의 령안은 역시 총명하군.’
육장봉은 월령안 옆으로 걸어가더니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그녀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린 아가씨는 이런 잡다한 일에 신경 쓰지 말고 일찍 잠자리에 드시오.”
말을 마친 육장봉은 성큼성큼 떠나갔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뒤로 묶은 긴 머리가 휘날렸다. 머리카락이 가볍게 월령안의 볼을 스쳐 지나가며 옅은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그 주인처럼 잔잔한 서늘한 죽향만 남기고 그녀의 곁을 떠나갔다.
월령안은 눈시울이 빨개진 채,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육장봉은 나를 어린애로 여기는 건가?’
방금 그 순간, 그녀의 꼬마 장군이 돌아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녀의 꼬마 장군은 옛날에도 이랬었다. 쓸데없는 일은 많이 생각하지 말고, 즐겁게만 지내라고 했다.
월령안은 육장봉이 떠나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이 들었다.
“당신의 여동생이 되는 것이 더 좋았을까요?”
그녀는 몸을 돌려 문밖을 내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월령안의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문밖에서는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며 소리를 냈다.
그러나 육장봉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