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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272)화 (272/1,004)

272화 무슨 소문 말씀이세요?

월령안은 육장봉을 데리고 바깥 서재로 왔다. 그리고 하인에게 차를 가져오라고 분부했다.

“이 늦은 시간에 또 차를 마시라는 거요?”

육장봉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마시고 나서야 산사차라는 것을 알았다.

순간,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원망의 시선으로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일부러 이런 건가?’

“산사차예요. 대장군께서 저녁을 많이 드시더군요. 저녁에는 체하기 쉬우니 산사차를 올리라고 했어요. 대장군께서 싫으시다면 우전 용정차로 바꿔 오라고 할게요.”

월령안은 새콤달콤한 산사차를 들고 음미하듯 들이켰다. 물론, 자신이 일부러 그랬다는 사실을 육장봉에게 알려 줄 생각은 없었다.

육장봉은 새콤달콤한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신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

“고맙소.”

육장봉은 억지로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월령안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음, 앞으로 월 가주가 신경 많이 써 주시오.”

“대장군께서 좋아하신다면 내일 또 끓이게 하지요.”

월령안은 육장봉의 시선에 소름이 끼쳤다. 어렴풋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앞으로’라는 세 글자를 애써 무시했다.

그녀와 육장봉 사이에는 미래가 없었다. 있어서도 안 되었다.

그녀도 더는 그와의 미래를 바라지 않았다.

단 한 번만으로도 상처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그러한 경험을 또 겪었다가는 감당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좋소.”

육장봉은 가볍게 웃었다. 월령안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알아차리기 힘든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잔꾀를 부리는 월령안이 이토록 귀여울 줄은 예전에는 미처 몰랐었다.

육장봉은 생선을 훔쳐먹는 데 성공한 고양이처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자기를 놀린 건데도 왜 저렇게 기뻐하지? 육장봉이 뭘 잘못 먹었나? 순순히 넘어가다니?’

월령안은 의아한 표정으로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순간 멍해졌다. 어두운 불빛이 육장봉의 얼굴 위에서 일렁이며 그의 날카로운 얼굴선을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다. 또 그의 미간에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었다.

이 남자는 정말 잘생겼다. 특히 누군가를 조용하게 바라볼 때는 더욱 그랬다.

육장봉과 마주 보고 있으려니 새삼 황홀한 기분이 들었다.

육씨 가문에 시집간 삼 년 동안, 그녀는 저녁마다 대부분 시간을 육씨 저택의 바깥 서재에서 홀로 보냈다.

그때 여러 번 이런 장면을 꿈꿨었다. 육장봉이 돌아온 다음, 그녀는 그와 한방에서 지내게 될 것이다. 그는 책을 읽고, 그녀는 장부를 보고 있으리라.

두 사람이 매 순간 서로를 지켜볼 필요는 없다. 그저 고개를 들거나 시선을 돌렸을 때, 그를 볼 수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가끔 시선이 마주치면, 그가 지금처럼 그녀를 불러 준다거나, 그녀에게 웃어 준다면 더 좋을 것이다.

그녀가 예전에 바랐던 것들은 고작 이런 것들이었다. 아쉽게도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육씨 가문에 있었던 삼 년 동안, 서재에서 밤을 보냈던 사람은 항상 그녀 혼자였다.

홀로 장부를 맞추고, 변방의 물자 부족에 마음을 졸이다가 입술이 부르트기도 했었다.

육장봉이 그녀를 내친 지금에 와서, 단둘이 있는 시간이 늘었다. 그러나 상상 속의 따스함도, 다정함도 없었다.

둘은 마주 보고 앉아 있어도 서로에 대한 방어와 경계심밖에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부부였는데 낯선 사람들보다 더 서먹하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월령안은 눈을 감아 눈망울에 맺힌 씁쓸함과 조롱을 지웠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눈망울은 한없이 맑았다.

그녀는 손에 든 찻잔을 옆으로 내려놓고, 육장봉의 깊고 그윽한 눈과 마주했다. 그리고 먼저 입을 열었다.

“대장군께서는 어쩐 일로 늦은 밤에 방문하셨나요?”

방 안의 분위기는 조금 이상했다. 그녀는 육장봉의 태도가 낯설었다. 일 이야기를 해서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당신…….”

육장봉은 그녀에게 방금 무슨 생각을 했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억지로 웃음을 짜내는 월령안을 보자, 결국에는 묻지 못했다.

자신이 그녀와 가까워질 가장 좋은 시기를 놓쳤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월령안은 그를 경계하고 적으로 여겼다. 이건 정말 기뻐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육장봉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너무 무심했다. 조계안의 계략에 한 번 당한 뒤로, 지금까지 너무 수동적으로 굴었다.

“대장군?”

월령안은 육장봉이 초점 없는 시선으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을 보고, 그의 정신이 딴 데 가 있음을 눈치챘다. 잠시 기다렸지만, 여전히 그는 한눈을 팔고 있는지라 그를 부르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육장봉은 경각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월령안이 한 번 부르지 바로 정신을 차렸다.

“듣고 있었소.”

그의 작은 목소리에는 드러날 듯 말 듯 한 미련이 담겨 있었다.

월령안의 심장이 갑자기 한 박자 어긋나게 뛰었다.

잠이 덜 깨 착각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육장봉은 가볍게 웃으며 앞으로 기울어진 몸을 뒤로 젖히며 편한 자세로 의자에 기대앉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가볍게 책상을 두드리며 월령안의 주의를 끌었다.

“월령안, 지금 밖에서 무슨 소문이 도는지 알고 있소?”

월령안은 어리둥절했다.

“소문이오? 무슨 소문 말씀이세요?”

‘소 승상에 관한 소문인가? 육장봉은 황제를 대신해 따지러 온 건가?’

그러나 황제는 소여방 일을 가지고 그녀를 탓할 수는 없었다.

“밖에 사람들이 어젯밤 내가 월씨 저택에 묵었다고, 당신을…… 지쳐 쓰러지게 했다고 소문내고 있소.”

의자에 기대어 앉은 육장봉의 얼굴은 전부 어둠 속에 묻혀 있었다.

월령안은 밝은 곳에 앉아 있어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단지 그의 나지막하고도 느긋한, 귀족 특유의 화려한 억양이 섞인 어조만 들렸다.

그 목소리는 심지어 약간의 야릇한 기운마저 띠고 있어, 대단히 위험하게 들렸다.

한순간, 월령안은 자신이 환청을 들은 줄 알았다.

“대장군, 뭐라고 하셨나요? 방금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요.”

그녀는 온종일 잠만 잤을 뿐이었다. 그 사이에 밖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왜 부집사가 그녀한테 보고하지 않았을까.

“당신이 잘못 들은 것 아니오. 밖에서 어젯밤, 당신과 나 사이에 남에게 말 못 할 일이…… 벌어졌다고 소문이 났소.”

‘일’이라고 발음할 때, 그의 목소리는 아주 나지막했다. 말끝이 길게 끌리며 의미심장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무슨 소리예요?”

월령안은 놀라서 하마터면 의자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있을까요?”

‘육장봉이 왜 이렇게 애매하게 말하는 거지?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어젯밤 우리 둘이 정말로 무슨 일을 치른 줄 알겠네.’

그들은 어젯밤 단둘이서 시간을 보낸 적도 없었다.

“나도 궁금하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오? 고작 하루 만에 왜 내가 무책임하고 비정한 사내 취급을 받게 됐을까?”

육장봉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책상 위의 원보(元寶 – 화폐로 쓰던 말굽 모양의 은덩어리, 마제은) 모양의 장식품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렸다.

그의 얼굴은 어둠 속에 파묻혀 있어 기분을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월령안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대장군, 전 이제야 깨어났어요. 밖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르니 좀 알려 주시겠어요?”

그녀는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아예 몰랐다. 부집사가 보고한 적도 없었다. 육장봉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소문은 당신네 집에서부터 흘러나온 것이오. 내가 당신에게 따지고 들지도 않았는데 오히려 나보고 알려달라는 건가?”

육장봉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더니 윗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협박의 의미가 다분했다.

‘역시 화가 난 거였구나. 무슨 일인지 짐작도 안 가는데.’

월령안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장군, 전 방금 깨어나서 오늘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이 일을 알아볼 시간을 주세요. 내일 반드시 만족하실만 한 답변을 드릴게요.”

육장봉은 무심하게 말했다.

“좋소, 기다리겠소.”

월령안은 그에게 답변을 줄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여기 오기 전에 육삼더러 육십이를 군영에 가두라고 했으니까. 육십이는 당분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월령안도 이번만큼은 억울하게 당할 수밖에 없으리라.

‘월령안에게 위자료로 무엇을 요구할지 잘 생각해 봐야겠군.’

육장봉은 손에 든 원보 장식품을 내려놓더니 턱을 쓰다듬으며 살짝 웃었다.

월령안은 유언비어에 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육장봉이 따지고 들자, 그녀로서는 당황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초라하게 방어만 하는 게 고작이었다.

다행히 육장봉도 적당히 하고 물러섰다. 이 기회를 틈타 그녀에게 손해 보는 거래를 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육장봉은 위압감을 거두고 원래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그것을 본 월령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날카로운 기운을 뿜어내는 얼굴과 공격성이 다분한 그 눈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압박감이 느껴졌다.

특히 육장봉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려, 그대로 숨이 막혀 죽을 뻔했다.

그렇다고 해서 육장봉이 흉악하고 무섭게 생겼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아주 준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변경 남자들의 부드럽고 우아한 분위기와는 달랐다. 조계안처럼 변덕스러운 미치광이와도 또 달랐다.

육장봉은 이목구비가 날카롭게 생긴 데다가 살기까지 띠고 있었다. 척 보아도 친근감을 느낄 수 없는 얼굴이었다. 또 쉽게 기억할 수 없는 얼굴이기도 했다. 다름이 아니라, 그의 기세가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육장봉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또 그의 몸에서 풍기는 영웅적 기개를 좋아하기도 했다.

하지만 갑자기 날카로운 위압감을 내뿜는 육장봉과 마주하면, 이 남자가 조금 무섭다고 느껴졌다.

그러나 또다시 생각해 보면 이해는 갔다. 죽고 죽이는 전쟁을 겪고, 피바다를 헤쳐온 남자가 상냥하고 곱게 자란 어린 공자들과 같을 수는 없다.

월령안은 차를 마시는 동작으로 몰래 숨을 고르고 나서야 마음속의 두려움을 억누를 수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난 월령안은 육장봉이 의자에 앉아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자, 먼저 입을 열었다.

“대장군께서 오늘 밤 오신 용건은 단지 소문 때문인가요?”

‘이제는 용건이 끝났으니, 가지 않을까?’

달콤한 음식으로 기분을 달래고 싶었다. 또 진실을 조사할 시간도 필요했다.

육장봉이 실없이 꺼낸 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을 완전히 믿지도 않았다.

“육비우와 소함연이 곧 혼인하게 되는데 당신 생각에는…… 언제가 좋겠소?”

육장봉은 마치 집안일로 잡담을 나누듯 입을 열었다.

분위기가 너무 좋은 탓이었을까. 월령안은 저도 모르게 경계심을 풀고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

“당연히…….”

반쯤 말하고 나서야 이상함을 느꼈다.

‘내가 육장봉과 무슨 사이라고? 육씨 가문의 일을 왜 나한테 묻지?’

“당연히 뭐요?”

육장봉은 시선을 내리깔고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월령안은 눈치가 너무 빨랐다. 그가 놓은 덫에 걸려들지 않았다.

“당연히…… 흠천감(欽天監 – 명청 시대에 천문 등을 맡아보던 관아)에 좋은 날을 골라 달라고 하면 되죠.”

월령안은 육장봉을 대할 때 절대 경계심을 늦추지 말자고, 그에게 끌려다니면 안 된다고 재차 다짐했다.

이 남자는 분위기를 장악하는 데 능수능란했다. 여기는 분명히 그녀의 집이었고, 그녀의 서재였다.

그러나 그녀는 깨닫지 못했다. 대화를 시작해서 지금까지, 대화를 이끈 사람은 육장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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