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271)화 (271/1,004)

271화 내 입맛에 아주 잘 맞는군

월령안은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은 일단 내려놓기로 했다.

‘수 오라버니의 일은 서둘러도 소용없어.’

월령안이 분부했다.

“그들에게 유월 전까지 절영마(絶影馬) 한 필을 구해 줄 수 있는지 물어보게. 그 말을 구해 준다면 가격을 두 배로 내겠다고 하게.”

그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아무리 늦어도 다음 달에는 청주로 떠나야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청주 쪽에서는 구체적인 정보를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청주, 그곳은 이제 월씨 가문이 주름잡던 지역이 아니었다.

그녀는 준비를 더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들어온 예단들을 정리해 두었는가? 내가 살펴봐야겠네. 틈이 나는 대로 그 몇몇 가문의 구체적인 상황을 책자로 만들어 정리하게. 이 일은 급하지 않으니 며칠 내로 정리해서 주면 되네. 또 적당한 선물을 준비해서, 내일 자네가 직접 댁으로 가져다드리게.”

이 사람들은 월씨 가문에서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자, 가장 먼저 사람을 보냈다. 그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이들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면, 그녀가 다시 변경에 돌아왔을 때 도움이 될 것이다.

장사하는 사람이라면 친구는 많을수록 좋았다.

“예단 목록은 소인이 미리 작성해 두었습니다. 다른 것은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부집사가 말했다.

“여기 두고 나가게.”

월령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집사는 책자를 내려놓고 조용히 물러갔다. 월령안은 책자를 들고 넘겨 보았다. 막 장군왕부의 예단을 보았을 때, 부집사가 또 돌아왔다.

“아가씨, 육 대장군께서 오셨습니다. 화청에서 아가씨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월령안은 멍해졌다.

“육장봉이라고?”

‘이런 우연이?’

그녀는 지금 무슨 핑계를 대고 육장봉을 만날까 고민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육장봉이 제 발로 찾아올 줄이야.

“네.”

부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과를 올리라고 하게. 내가 지금 가겠네.”

월령안은 책자를 내려놓고 일어나, 자기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기로 했다.

육장봉은 손님이었다. 주인으로서 손님을 맞이하는 자세를 보여야 했다. 평상복 같은 격식 없는 복장으로 손님을 맞이한다면, 손님이 오해할 수도 있었다.

육장봉의 아버지는 남녀 사이의 일에 그토록 어리석었지 않은가.

월령안은 육장봉도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고자, 월령안은 마음속으로부터 육장봉을 손님으로 대하기로 했다.

* * *

육장봉은 화청에 앉아 있었다.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월령안이 나타나지 않았다. 간신히 억눌렀던 짜증이 다시 솟구쳤다.

‘월령안, 이 여인은 사람을 참 잘 괴롭히는군.’

육장봉은 기분이 울적했다. 그때 향긋한 간식 냄새를 맡자, 머뭇거리다가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그는 간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달콤하고 느끼한 과자류를 싫어했다.

그러나 월씨 저택의 간식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육장봉은 간식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찌푸렸던 미간이 저도 모르게 스르르 풀어졌다.

짭조름하면서도 바삭한 것이 그가 예전에 먹었던 달콤하고 느끼한 간식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의 입맛에 꼭 맞았다.

“안에 소고기도 들었군.”

간식 한 조각으로 육장봉의 기분이 제법 좋아졌다.

월씨 저택, 아니, 월령안이 준비한 모든 것은 늘 편안함과 자연스러움을 느끼게 했다.

월령안은 정말 우수하고 인내심이 있는 사냥꾼이었다. 그녀가 정성을 들여 친 그물을 벗어날 수 있는 사냥감은 없었다.

육장봉은 늘 사냥꾼의 위치였다. 남에게 사냥감 취급을 당하는 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육장봉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손에 든 간식을 입으로 밀어 넣었다.

월령안이 왔을 때, 육장봉은 이미 탁자 위의 간식을 절반 이상 먹은 뒤였다.

월령안이 걸어 들어오자, 육장봉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힐끔 보았다. 그러고 또 계속해서 간식을 먹었다.

그는 이각이나 기다렸다.

월령안은 한밤중인데도 잔뜩 치장하고 나왔다. 그를 남으로, 손님으로서 취급하겠다는 뜻이 분명했다.

그 의도를 알아챈 육장봉은 속으로 불쾌함을 느꼈다.

‘분명 예전에는 이렇게까지 거리를 두지 않았는데. 왜 하루 만에 변한 거지?’

육장봉은 미간을 찌푸렸다. 입안의 짭조름하니 맛있던 간식이 쓰고 딱딱하게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음식을 씹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전이었더라면, 월령안은 못 본 척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육장봉 앞에서 남을 ‘비방’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웃으며 말했다.

“대장군께서는 이것을 좋아하시나 보네요?”

“좋아하오.”

육장봉은 입안의 음식을 삼키고, 뜨거운 눈길로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좋아한다.

이 감정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무엇 때문에 생겼는지는 몰랐다.

그가 마음을 자각했을 때, 좋아한다는 감정은 마치 이 과자와 같았다. 그의 입에 들어가 그의 위를 채우고 그의 마음에 들어와 있었다.

“대장군께서 좋아하신다면, 간식을 만드는 비법을 장군부로 보내드리지요.”

월령안은 예를 올리고 육장봉의 아랫자리에 앉았다. 육장봉이 그녀의 집에 오면 상석에 앉는 데에 익숙해져 버렸다.

“간식이 중요한 게 아니오.”

육장봉은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차로 입 안에 남아 있던 간식의 여운을 씻어내고, 손이 가는 대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검은 눈망울이 월령안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먹을 것이 있소? 시장하군.”

월령안은 계속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그녀의 웃음이 거슬렸다.

하지만 지적할 수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다음번에는 웃음조차 싹 사라질지도 모른다.

‘간식을 다 먹고도 모자라 밥을 달라고? 육장봉은 식사도 안 하고 찾아온 건가? 그렇게 급한 일인가?’

월령안은 어리둥절했지만, 묻지 않고 일어났다.

“있어요. 지금 바로 준비하라고 하지요. 자리를 옮기시지요.”

“당신도 아직 식사 전이오?”

육장봉은 월령안 옆으로 다가와서 멈추었다.

월령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녀도 배가 고팠다.

“정말…… 우연이군.”

육장봉은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월령안은 억지웃음을 지었을 뿐, 말을 하지 않았다.

육장봉의 이 말에 이상하게 불안해졌다. 특히 ‘우연’이라는 이 두 글자에는 더욱 깊은 뜻이 있는 것 같았다.

육장봉이 그녀를 노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육장봉이 뜬금없이 나를 노려서 뭘 어쩌려고? 최근에는 딱히 무슨 일을 저지른 적도 없는데.’

월령안은 굳이 더 생각하지 않았다. 육장봉을 식당으로 데려가서는 하인에게 음식을 내오도록 했다.

음식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어, 하인은 재빠르게 상을 차려냈다.

고기 요리 두 가지, 채소 요리 세 가지, 탕 하나와 밑반찬 네 접시가 올라왔다. 시간이 촉박해서 죽은 올라오지 않았다.

“당신은 평소에도 이렇게 푸짐하게 먹소?”

육장봉은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을 보자, 속으로 매우 서러워졌다.

월령안이 육씨 저택에 있을 적에 짠 식단에 따르면, 그에게는 매일 요리 세 가지만 내오도록 했다. 그런데 자기는 혼자서 이렇게 푸짐하게 먹고 있었다니.

‘설마 내가 너무 가난해서 집안을 부양하지 못할 거라 여긴 건가?’

그는 기회를 봐서 진실을 말해줘야 할지 고민했다. 사실 자기는 돈이 아주 많다고, 가족을 부양하는 것은 물론, 그녀까지 함께 먹여 살리더라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이다.

“대장군께서 오셨으니 주방에 두어 가지 더 올리라고 한 거예요. 대장군의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세요.”

월령안은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집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는 당신이 잘 알고 있을 텐데.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

육장봉은 그릇과 젓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월령안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는 할 말을 마치더니, 월령안이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젓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먹는 속도가 아주 빨랐다. 그는 고기 요리에 특히 자주 손을 댔다.

정작 월령안은 육장봉의 말 한마디에 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또 식욕이 떨어질 뻔했다.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는 내가 잘 안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내 말이 그냥 예의상 한 소리인 것도 모르나? 나 원 참, 열 받네!’

월령안은 육장봉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골라 먹는 것을 보았다. 순간 화가 나서 자기도 고기 요리에 집중해서 먹기 시작했다.

월령안과 육장봉 모두 주방에서 방금 만든 채소 요리에는 젓가락도 대지 않았다.

월령안은 이 한 끼를 먹느라 피곤해졌다. 충동적으로 과식한 탓에 속도 더부룩했다.

육장봉은 월령안보다 많이 먹었다. 그러나 앉아 있는 자세는 여전히 꼿꼿했다. 평평하고 탄탄한 복부에서는 과식한 흔적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역시, 내 입맛에 아주 잘 맞는군.”

육장봉은 우아하게 젓가락을 놓더니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월령안은 속으로는 말할 수 없이 답답했다. 그래도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장군께서 만족스러우시다니 다행이네요.”

육장봉은 손님이니 하는 수 없었다. 손님과 실랑이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일, 양고기도 준비하시오.”

육장봉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내일이라고요?”

월령안은 경악한 얼굴로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육장봉 이 인간이 미쳤나? 내일 또 오겠다고?’

“왜, 여기 없소? 없으면 장군부에서 가져오게 하지.”

육장봉은 월령안에게 거절할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다.

월령안이 말했다.

“아니, 내일 장군께서는…….”

‘내일 와서 뭘 하려고? 용건이 있으면 오늘 다 말하면 되잖아!’

육장봉은 월령안의 말을 잘라 버리고 말했다.

“내일 나는 황성사에서 계속 공무를 볼 거요.”

“그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왜? 싫소?”

육장봉의 목소리가 갑자기 차가워졌다.

“대장군, 저의 집은 주루가 아닙니다.”

월령안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육장봉이 기어이 날 말려 죽이려고 작정했나?’

“어젯밤 일로 내가 당신을 위해 죄를 뒤집어썼으니 이건 그 보수인 셈이오. 물론, 나도 덤을 줘야겠지. 내일 형부에 가서 면회해도 좋소.”

월령안이 형부에 줄을 대느라 애를 썼으니 잘 알 것이다. 그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누구를 찾아도 소용없었다.

월령안은 육장봉을 바라보면서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거래 성립이네요.”

‘어젯밤의 일이라……. 좋아.’

그녀는 청희 장공주의 미움을 받는 것도, 영녕후부에 밉보이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를 언짢게 하는 것이나, 황제가 그녀를 꺼리게 되는 것은 두려웠다.

육장봉이 먼저 나서서 그녀를 감싸 주었으니, 이 신세는 갚아야 했다.

그녀는 이치대로 따지는 사람이었다.

‘고작 밥 한 끼인데, 대접 못 할 것도 없지.’

육장봉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주객이 전도되어 그가 월령안을 불러 세웠다.

“서재로 갑시다. 할 말이 있소.”

월령안은 일어나 육장봉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여기가 육장봉 집인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육장봉은 그녀의 집에 있으면서도, 집주인보다 훨씬 자유로워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