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무슨 핑계로 찾아가지?
월령안이 물었다.
“그럼…… 청희 장공주는 더 큰 것을 바라는 걸까요?”
“멍청하기는.”
노인은 퉁명스럽게 월령안의 이마에 꿀밤을 안겼다.
“예전에는 큰 것을 바랐겠지. 하지만 희망이 사라진 뒤, 지금은 누군가를 끌어들여 함께 죽으려는 거야. 물론, 이건 단지 내 추측이다. 어쩌면 야심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난 청희 장공주가 아니니까, 그쪽이 뭘 생각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만.”
“청희 장공주는 예전에 혹시…… 아들을 주나라의 황제로 세우려고 했던 걸까요?”
월령안은 어렸을 때부터 노인에게 꿀밤을 맞는 데는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숨지도 않고 때리게 내버려 두었다.
노인은 최근 이 년 동안 정신 수양을 했다고 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성격이 더 사나웠다.
옛날 그녀가 노인에게서 배울 때, 그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에게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는 했다. 그녀가 당장 대답하지 못하거나, 대책을 세우지 못하면 노인은 사정없이 꿀밤을 먹였다. 그녀도 너무 당하다 보니 익숙해졌다.
“못할 게 뭐가 있겠느냐?”
노인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고종 황제가 귀비 위씨(魏氏)를 총애해서, 위씨가 황자들을 죽이도록 내버려 두었지. 위씨가 아들을 낳아 황위를 계승하기를 바랐단다. 하지만 하늘도 눈이 있는지, 위씨는 청희 장공주라는 딸 하나만 낳았을 뿐이야.”
노인의 얼굴에는 음험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한순간에 또 평소대로 돌아왔다.
“청희 장공주는 고종 황제가 금이야 옥이야 하며 키운 딸이다. 고종 황제는 청희 장공주가 가장 자기를 닮았다고, 사내아이로 태어났더라면 명군이 되었을 거라며 신하들에게 한두 번 말하고 다닌 게 아니야. 심지어 사적으로는 청희 장공주에게 사내아이로 태어났더라면, 주나라의 황위는 네 것이었을 거라고 말하기까지 했어.”
노인은 비웃듯이 말했다.
“생각해 봐라. 온갖 총애를 한 몸에 받은 사람이 매일같이 이런 말들을 듣다 보면, 야망이 커지지 않겠느냐? 하물며, 고종 황제는 임종 전에 청희 장공주에게 많은 세력을 남겨 주었지. 청희 장공주가 어찌 참을 수 있겠느냐?”
월령안은 이야기를 다 듣자, 노인을 바라보며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더니 조용하게 말했다.
“이걸 두고 세상의 이치는 돌고 돈다는 건가요?”
‘영감님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지? 이 많은 황실의 비밀을 어떻게 아는 거지? 고종 황제가 대신들에게 한 말을 아는 것은 그렇다 쳐도, 사적으로 청희 장공주에게 한 말까지 어떻게 아는 거야? 그리고 영감님은 고종 황제 얘기를 꺼낼 때마다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해. 혹시 영감님과 고종 황제가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영감님은 참 신비로운 사람이야.’
“그러니까 사람은 절대로 나쁜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거다. 사람 머리 꼭대기에는 신이 있다고 하지. 사람이 하는 일을 하늘이 지켜보고 있단다.”
노인은 사색에 잠겨, 월령안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노인의 부상은 좋아졌지만, 기력은 예전보다 훨씬 못했다. 월령안과 몇 마디 나누었을 뿐인데, 피곤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월령안은 눈치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영감님, 시간이 늦었어요. 전 아직 저녁도 안 먹었다고요. 배고프니까 그만 일어날게요.”
“그래.”
노인은 웃으면서 대답하더니, 무심하게 말했다.
“육장봉을 만나거든 할 말은 해. 뱀을 보고도 때리기만 하고 죽이지 않으면, 오히려 당하게 된다. 알겠느냐?”
월령안은 노인에게 이불을 덮어 주다가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노인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네, 하고 대답했다.
황제는 인자하고 성격이 부드러웠다. 노인은 청희 장공주가 황제 앞에서 울면, 그의 마음이 약해질까 걱정이 되었다.
황성사를 움직여서 한 일이 겨우 월령안을 체포하는 것이라니. 이것만 보면 청희 장공주는 전혀 총명해 보이지 않았다. 야망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사실은 어떠했는가. 그녀는 비상한 머리로 모든 사람을 속였다.
월령안은 노인의 걱정을 알아차렸다. 만약 오늘 밤 노인이 이런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다면, 그녀도 청희 장공주에게 속아 쩔쩔매게 됐을지도 모른다.
월령안은 노인의 거처에서 나온 뒤, 어떻게 육장봉을 찾아가야 할지 계속 고민했다. 사실 그녀가 먼저 육장봉을 찾아가 본 적은 없었다. 마음이 많이 불편했다.
그녀는 아직 마음을 내려놓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만약 정말 내려놓았다면 마음이 불편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장군부의 문도 넘지 않겠다며 고집을 피울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정말이지 흘려 넘길 수가 없었다. 마음속에서는 계속 걸리적거렸다.
“어휴!”
월령안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너그럽지도, 냉정하지도 못했다.
“무슨 핑계로 육장봉을 찾아가지?”
월령안은 걷는 내내 이 문제를 계속 생각했다.
* * *
그 시각, 장군부.
육장봉은 육삼을 내보내고 의자에 기대어 앉아 두 눈을 살며시 감고 있었다. 오른손은 불규칙적으로 책상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는 월령안을 만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배가 고팠다.
* * *
월령안은 노인의 거처에서 나온 뒤에도, 무슨 핑계를 대서 육장봉을 찾아가야 할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배에서는 허기를 견디지 못한 듯 꼬르륵, 소리를 냈다.
“됐어. 일단 밥이나 배불리 먹고 생각하자.”
월령안은 배를 만지며 하인에게 음식을 준비하라고 일렀다.
평소 그녀는 고기라면 뭐든지 다 좋아했다. 자연히 그녀의 식사에는 반드시 고기 요리가 여러 가지 올라왔다.
그러나 월령안은 특별히 한마디 덧붙였다.
“채소 요리로 담백하게 차리거라. 고기는 필요 없어.”
지금은 고기가 전혀 당기지 않았다. 고기를 떠올리자, 전갈을 생으로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너무 역겨워서 하마터면 또 토할 뻔했다.
“아가씨, 지금 주방에는 준비해 놓은 것이 없습니다. 잠시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녀는 월령안의 분부를 듣자, 난감하다는 듯이 말했다.
월령안이 언제 깨어날지 몰라, 주방의 하인들은 그녀가 언제든지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부뚜막 위에서 음식을 데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음식은 평소 월령안의 식성대로 준비한 것이었다. 담백한 요리는 입가심용으로 준비한 한두 가지밖에 없었다.
“괜찮아. 부뚜막에서 죽 한 그릇이나 데워 오라고 해라. 그리고 부집사에게 서재로 날 보러 오라고 하렴.”
월령안은 손을 저어 하녀더러 가서 일을 보라고 했다. 그리고 등롱을 들고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월령안이 서재에 도착하자마자, 부집사가 총총히 뛰어왔다.
“아가씨.”
“밖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보게.”
온종일 세상 모르게 자고 깨났더니, 바깥세상과 동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아가씨, 오늘 가장 큰 사건은 금군이 영녕후부를 포위한 것입니다. 듣건대, 영녕후부의 사람이 입궁하여 폐하를 뵙겠다고 몇 번이나 소란을 피웠답니다. 하지만 지키는 사람들이 모두 허락하지 않았답니다. 황성사의 일을 밝혀내기 전까지, 영녕후부에서는 아무도 밖으로 나올 수 없다고 했답니다.
그리고 다음은 우리 집안일입니다. 아침에 신고한 다음, 관아에서 사람이 다녀갔습니다. 그때는 저희가 이미 현장을 말끔히 치워둔 뒤라서 관졸들이 아무것도 조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변 이웃들을 찾아가 상황을 물어보더군요.
어젯밤 큰 소란이 있었지만, 이웃들은 저번 일로 놀라서인지 나와서 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구체적인 것은 소인이 알아낼 수 없었지만, 듣기로는 관졸들도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알아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육 대장군께서는 병사를 거느리고 황성사에 주둔하셨습니다. 황성사의 사람은 전부 가두었습니다. 이 일로 많은 사람이 놀라서 집밖에 나가지도 못한답니다.
저녁 무렵에는 최일 공자가 다녀갔습니다. 아가씨께서 깨지 않으셨다는 말을 듣고는 돌아갔습니다.
또 낮에 장군왕 세자, 유씨 가문, 정씨 가문 등등…… 열몇 집안에서 모두 사람을 보내 아가씨를 위문하러 왔었습니다. 낮에는 육십이 장군이 대문을 지키고 있어 그들을 모두 막았습니다. 그래서 다들 선물만 남기고 떠났습니다.”
월령안은 미간을 찌푸리고 불쾌하다는 듯이 말했다.
“왜 육십이더러 대문을 지키라고 했는가? 관직에 오른 사람인데. 그런 관리에게 문을 지키게 하다니. 사람들에게 트집 잡힐 거리가 부족한가?”
“아가씨, 용서하십시오. 소인이 육십이 장군에게 문을 지키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육십이 장군이 굳이 문을 지키겠다고 고집했습니다. 육 대장군께서 그분에게 문을 잘 지키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남들이 아가씨를 절대 방해하지 못하게 하라고 신신당부하셨다고요. 소인이 다른 사람을 시켜 함께 지키게 했지만, 육십이 장군에게 쫓겨났습니다. 소인도 도저히 다른 수가 없었습니다.”
부집사는 급히 해명했다.
월령안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됐어, 알겠네.”
‘육십이, 이 녀석이 진짜……. 됐다. 아직 어려서 경중을 가리지 못하는 거겠지.’
게다가 육장봉이 시킨 일이니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월령안이 물었다.
“또 다른 일이 있느냐? 참, 강남의 술 상인에게 편지는 보냈느냐? 그들더러 하루빨리 술을 보내라고 해라. 필요한 곡식도 준비하고. 내년에 쓸 거니까.”
그녀는 명월산장에서 돌아온 뒤에도 조금도 쉬지 못했다. 처리해야 할 일이 끊이지 않았다. 정말이지 골치가 아팠다.
“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일은 이미 잘 마쳤습니다. 장군왕부 그쪽에서도 잘 인계했습니다. 장군왕부의 집사가 오후에 저희를 찾아왔는데, 중요한 가게 두 곳이 매씨 가문 손에 있답니다. 높은 가격을 불렀지만, 매씨 가문에서는 팔지 않겠다고 했답니다.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지 묻더군요.”
부집사는 평소 집사의 뒤를 따라다녔다. 단독으로 월령안에게 일을 보고하는 것은 좀처럼 없는 일이라, 조금 불안해졌다.
“되고말고. 소개비로 삼 할을 떼게.”
거래를 할 때 서로 돕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었다. 월령안은 장군왕부를 기꺼이 도와줄 수 있었다. 하지만 돈은 벌어야 했다. 요즘 돈을 많이 썼더니, 또 돈이 부족해졌다.
월령안은 그 일을 승낙하고 부집사에게 분부했다.
“매 부인과 약속을 잡거라. 편하실 때, 함께 명월산장을 둘러보지 않겠느냐고 전해라.”
매씨 가문은 돈이 부족하지 않았다. 그러나 명성은 부족했다.
명월산장은 황실 산장이었다. 보통 사람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매씨 가문 출신의 태비(太妃) 하나가 황궁에 있기는 했다. 그래서 그들 가문은 변경에서도 체면이 좀 서는 편이기는 했다. 그러나 신분의 벽이 있다 보니, 명월산장 같은 곳은 매씨 가문의 여인들이 드나들 수 없었다.
매 부인이 명월산장에 한 번 가 볼 수만 있다면, 상인 집안 출신의 다른 부인들에게 일 년은 너끈히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부집사는 속으로 묵묵히 기억해 두고, 다음 건을 보고했다.
“아가씨, 하곡의 말 상인들과 장군부의 첫 번째 거래가 끝났습니다. 양쪽 모두 아주 만족스러워하더군요. 말 상인들이 아가씨께 무척이나 고마워했습니다. 앞으로 이런 거래가 있다면 소개해 달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이번에 황표마(黃驃馬) 한 필을 가지고 왔는데, 아가씨께서 원하시는지 물었습니다. 필요하사다면 아가씨 몫으로 빼 두겠답니다.”
“황표마?”
월령안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빼 두라고 하게.”
‘수 오라버니에게는 아직 말이 없으니까, 황표마가 어울리겠군. 그나저나 수 오라버니는 언제면 형부에서 풀려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