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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269)화 (269/1,004)

269화 사랑이라는 이름의 음모

월령안이 깨어났을 무렵에는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다.

방 밖의 어두컴컴한 하늘을 보니, 오늘이 무슨 날인지, 여기는 어디인지 순간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머리를 한참이나 두드려서 정신을 가다듬었다. 기지개를 켜더니 하녀를 불러 머리를 빗고 세수했다.

“아가씨, 어르신께서 아가씨께서 깨시거든 찾아와 달라고 하셨습니다.”

하녀는 따뜻한 물을 들고 들어와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

“어르신께서 아셨느냐? 누가 말했느냐?”

월령안은 나른한 잠기운을 확 지우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어린 하녀를 쏘아보았다.

노인은 어젯밤 수면제 성분이 든 약을 먹었다. 그녀가 노 의원을 불러왔을 때, 노인은 이미 잠이 들어 있다. 원래대로라면 앞뜰의 기척을 듣지 못했어야 했다.

어린 하녀는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서둘러 뒤로 한걸음 물러서며 황급하게 말했다.

“아가씨, 어르신께서 피비린내를 맡으시고 물으셨습니다. 도저히 숨길 수가 없어서, 어젯밤에 벌어진 일을 솔직히 말씀드렸습니다.”

“알겠다.”

월령안은 손을 들어 하녀를 내보냈다. 세수를 마친 뒤, 그녀는 등롱을 들고 노인의 거처로 갔다.

문을 밀자, 진한 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월령안은 코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았다. 이렇게 진한 약 냄새 속에서, 노인이 어떻게 피비린내를 맡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영감님이 피 냄새에 이렇게 예민하다니. 소싯적에 도대체 뭘 하셨던 걸까?’

월령안은 아주 궁금했다. 그러나 어린 월령안이 물었을 때, 노인은 그녀를 상단에 던져 버렸다. 그 상단을 따라 사막을 가로지르고 났더니, 묻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졌다.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하기 싫었다. 전갈이나 도마뱀 따위를 날로 먹기는 더욱 싫었다. 사막에서 돌아온 뒤, 아주 오랫동안 전갈을 날로 먹는 꿈을 꾸고는 했다.

그때의 경험을 떠올리자, 원래 약간 허기진 상태였는데도 입맛이 확 사라졌다.

그녀는 자기 얼굴색이 너무 안 좋아 보일까 봐 들어가기 전에 일부러 얼굴을 두드렸다. 볼에 아픔이 느껴질 때까지 찰싹거리고 나서야 계단을 올라가 문을 밀고 들어갔다.

노인은 침대의 머리맡에 기대 책을 읽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월령안은 다가가서 그의 손에 든 책을 빼앗았다.

“좀 잘 쉬면 어디 덧나요? 눈 상하게 이 한밤중에 무슨 책을 보고 그래요.”

촛불 아래 드러난 노인의 창백한 얼굴은, 금방이라도 훌쩍 떠나갈 것처럼 느껴졌다.

월령안은 속으로는 울컥했지만, 얼굴에는 미소를 띠었다.

“늦은 걸 이제야 알았느냐? 봐라, 얼마나 오래 잤는지, 벌써 일곱 시진이나 잤잖냐?”

노인은 느릿느릿 시선을 들어 월령안을 힐끔 보았다. 그녀의 뺨이 발그레한 것을 보더니, 마음속 근심을 내려놓았다.

‘놀라지 않은 것처럼 보이니 다행이군. 청희 그 계집애는 역시 잘못 키웠어. 나이를 먹을수록 철없이 구니, 원.’

“전 아직 어린애라고요. 어린애가 많이 자는 건 정상이잖아요.”

월령안은 당당하게 말했다. 그리고 침대 옆에 앉아 노인의 손을 잡았다. 이른 봄인데도, 노인의 손이 얼음장처럼 찬 것을 느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노인의 손을 꼭 움켜쥔 채 놓지 않았다. 자신의 체온으로 노인의 손을 녹여 주고 싶었다.

노인은 그런 월령안의 마음을 알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대신 자애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아이는 내가 잘 키워냈어.’

“청희 장공주 쪽은 황제가 어떻게 처리한다던?”

노인의 목소리가 제법 부드러워졌다.

따뜻한 불빛이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방 안에는 말할 수 없는 따뜻함이 흐르고 있었다.

월령안은 교활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사위들의 시체를 전부 영녕후부에 던져 버리라고 했어요. 황제는 이 틈을 타서 금군을 파견하여 영녕후부를 포위했고요. 나머지 일은 육장봉에게 맡겼어요. 영녕후부…… 아니, 청희 장공주는 끝났어요.”

“황제는 청희 장공주의 목숨을 노리는 것이냐?”

노인이 웃었다.

‘황제가 모처럼 강경하게 나오는군.’

“황제가 어떻게 청희 장공주를 살려 둘 수 있겠어요? 황성사에 그 사위 몇백 명만 있는 게 아닐 거예요. 천하에서 정탐꾼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게 황성사잖아요. 청희 장공주가 황성사를 움직일 수 있다면, 그 정탐꾼들도 쓸 수 있다는 말이잖아요. 황제가 그녀를 살려두는 게 이상하죠.”

황성사의 정탐꾼은 각지에 분포되어 있었다. 황성사에서 조사하려고만 들면, 황제가 오늘 저녁 뭘 먹었는지, 어느 후궁과 밤을 보냈는지, 밤일을 얼마 동안 했는지도 알아낼 수 있었다.

그 정도의 정보를 다른 누군가가 알게 된다면 매우 위험하다. 황제의 체면은 둘째치고 그 목숨까지도 다른 이가 넘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황성사의 정탐꾼들을 청희 장공주가 부릴 수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지금, 황제는 반드시 그녀를 죽여야만 했다.

“네 말이 맞아. 황제는 청희 장공주를 놓아 주지 않을 게 분명해. 하지만…… 아무래도 일이 너무 이상하단 말이야. 우리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을 청희 장공주가 예상하지 못했을까?”

노인은 미간을 찌푸리고 엄숙하게 말했다.

“너는 청희 장공주를 겪어 봤으니, 보이는 것처럼 아둔한 사람이 아님을 알 게다. 청희 장공주라면 이 일의 심각성을 알 거야. 만약 너를 해치고 싶었다면, 굳이 비장의 패까지 꺼낼 필요가 전혀 없었어.”

그렇다. 노인이 볼 때, 황성사는 청희 장공주의 비장의 패였다. 이런 세력을 쥐고 있으면 청희 장공주가 못할 게 뭐가 있겠는가. 심지어 제대로 다루기만 한다면, 황권을 뒤엎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청희 장공주는 이러한 무기를 가지고 고작 월령안을 대적했다. 닭 한 마리 잡는데 요란하게 용 잡는 칼을 꺼내든 셈이었다.

“아마도 미쳤나 보죠. 야율제가 자기 아들인데 제가 죽였잖아요. 미치지 않고 배기겠나요?”

노인의 말을 듣고 보니, 월령안도 청희 장공주가 왜 그랬는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다른 가능성은 떠오르지 않았다.

“야율제! 북요의 그 새로운 남원대왕이 그녀의 아들이라고? 친아들?”

노인의 눈이 순간 날카롭게 반짝거렸다.

‘이건 내가 전혀 몰랐는데. 청희 이 계집애가 정말 단단히 감췄구나. 아무래도 더 큰 걸 바란 모양이군.’

“네.”

노인의 기세가 갑자기 날카로워지자 월령안은 깜짝 놀랐다.

“뭐, 뭔가 잘못됐나요?

“령안아. 넌…… 그때 청희 장공주의 치마폭에 휘감긴 남자 중에서 누가 가장 유명했는지 아느냐?”

노인의 눈에는 냉혹한 살기가 번뜩였다. 그 순간, 월령안은 노인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나 월령안은 여전히 단호한 태도로 노인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제가 아는 사람으로는 육장봉의 아버지, 전 무림맹주 잠한성, 야율제의 아버지인 북요의 전 남원대왕, 그리고 영녕후 세자가 있어요.”

“맞다. 또 이 사람들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있었지…….”

노인이 말했다.

“누군데요?”

월령안이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노인은 천천히 두 글자를 뱉어냈다.

“소희.”

“예? 소희요? 소 승상이말인가요? 그자와 청희 장공주가요? 저는 왜 전혀 들은 바가 없는 거죠?”

월령안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노인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놀랍지? 그때의 소 승상은 유명하지 않았거든. 둘이 아주 제대로 감췄지.”

“둘이요?”

월령안은 이상한 부분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둘이라고 하면 서로 사랑했단 말인가?’

“너는 그 남자들이 죄다 청희 장공주를 짝사랑하고 혼자 알아서 숭배했던 거라고 생각하느냐?”

노인은 비웃는 듯 웃음소리를 냈다.

“택도 없는 소리다. 청희는 깊은 규방에서 큰 공주잖느냐. 청희가 먼저 다가가지 않으면, 누가 그 존재를 알겠느냐? 또 고작 한 번 만났다고, 바로 사랑에 빠져 죽네 사네 했을까?

얘야, 줄곧 청희가 그들을 유혹했고, 슬그머니 호의를 보인 거란다. 심지어 자기 몸까지도 내주었을 게다. 내가 알기로, 그들 중에서도 몇몇은 청희 장공주와 정을 통했을 거다.”

이 세상에 아무것도 받지 않고 남을 위해 목숨을 거는 멍청이가 그렇게 많겠는가.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곳에서, 청희 장공주가 얼마나 많은 꿍꿍이를 꾸몄는지, 또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월령안은 깜짝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그 멍청한 모습을 보자, 노인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얘가 평소에는 야무진 것 같아도, 실제로 경험한 건 얼마 안 되는구나. 그러니 이런 일로 호들갑을 떨지.’

그는 이제 늙었다. 앞으로의 인생은 월령안이 홀로 싸워서 헤쳐나가야 했다. 그런 더러운 일들은 노인도 막아 줄 수가 없었다.

햇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구석에서 암울한 일이 얼마나 많이 벌어지는가. 이제는 그녀도 알아야 할 때가 왔다.

노인은 웃으면서 한담을 하듯 말했다.

“얘야, 헛된 명성에 현혹되지 말고, 사람과 일을 보아야 한다. 육속, 잠한성 같은 이들은 하나같이 명성은 뛰어났다만, 그걸 보면 안 돼. 남녀 사이의 일에 관해서 그들은 돼지처럼 멍청했지. 보통 사람들보다도 못했단다. 음모에 당하고도 까맣게 몰랐으니까.

육장봉의 아버지는 청희 장공주의 덫에 걸려들었단다. 자신이 청희 공주의 순결을 더럽힌 줄 알고, 죄책감을 느꼈어. 그 바람에 황명을 어기고 혼사를 거부하기까지 했다. 정작 청희 장공주가 자신을 속이는 바람에 두 사람 사이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몰랐지. 물론, 청희 장공주가 그때 순결했는지는 나도 몰라. 항상 몸을 무기로 삼았으니 말이야.

그리고 잠한성도 청희 장공주가 먼저 유혹했지. 생각해 봐라. 미인이, 그것도 공주나 되는 귀한 사람이 일개 강호 망나니에게 순결을 빼앗겼어. 그런데 일이 벌어진 뒤, 청희 장공주는 그 강호 망나니를 위해 일을 덮어 줬을 뿐만 아니라 공주라는 신분마저 버릴 뻔했지. 네 생각에는 그 강호의 망나니가 감동하지 않을 것 같으냐? 그 여자를 위해 목숨을 걸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나는 굳이 조사하지 않아도 그 무렵의 청희 장공주는 이미 순결하지 않았다는 걸 알겠구나.

소희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가난한 서생이 공주의 호의와 애정을 받았는데, 공주를 여신으로 보지 않고 배기겠느냐? 나중에 소희 그 노친네와 청희 장공주가 어쨌는지는 나도 모른단다. 이런 잡다한 일들은 내 눈을 더럽히면서까지 알아보고 싶지 않았거든.”

노인에게 이깟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것보다 더 암울하고 역겨운 일들도 많이 봐 왔다.

‘얘야, 네가 경험이 없으니 이런 일에도 놀라는 거야. 앞으로 많은 걸 겪다 보면 괜찮아질 거다.’

노인의 가벼운 말투는 밥을 먹고 물을 마시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들렸다. 그러나 월령안은 한참이 지나서야 떡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있었다.

“영웅에 대한 환멸이 느껴지네요.”

이는 그녀가 알던 것과 달랐다.

“아니, 영웅과 미인의 사랑 이야기가 아닌가요? 왜 음모의 느낌만 나는 거죠?”

모든 게 사랑 때문이라더니,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영웅과 미인은 무슨, 세상 어디에 순수한 사랑이 그렇게 많다는 말이냐? 이건 처음부터 음모였단다. 청희 장공주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꾸민 음모 말이다.”

노인은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으며 말했다.

“그녀가 찾은 이 남자들을 봐라. 육속은 무장이었고, 잠한성은 강호 호걸, 야율제의 아버지는 북요의 귀족이었지. 소희는 문관이었다. 이 넷은 접점도 없고, 서로를 적으로 여기고 있어. 청희 장공주는 그들 사이를 왔다 갔다 했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남에게 들킬 일도 없거든. 봐라, 이렇게 영리한 여인이 아들이 죽었다고, 어찌 경솔하게 황성사를 움직여 너를 상대하려 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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