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모처럼 사람 구실을 했군
황성사에 주둔한 첫날, 육장봉은 아무것도 조사하지 않았고, 누구도 심문하지 않았다. 당장 황성사 전체를 봉쇄하라고 했을 뿐이다. 그리고 황성사의 황책(黃冊 - 호구를 정리한 책자)을 낱낱이 조사하기 시작했다.
황성사에는 사위만 있는 게 아니었다.
황성사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바로 각지에서 수십 년 동안 길러낸 정탐꾼이었다. 이들이야말로 황성사의 근본이었다.
육장봉이 황성사를 지키고 앉은 무렵, 청희 장공주는 영녕후의 협박과 설득을 이기지 못해 입궁해서 황제에게 사죄하는 데 동의했다. 그리고 영패, 봉지, 병사도 모두 황제에게 바치기로 했다.
영녕후는 이 일이 조금도 의외라고 여기지 않았다.
청희 장공주는 원래 주견이 없었다. 누가 두어 마디 설득하면 바로 흔들리곤 했다.
영녕후는 시간을 끌었다가 그녀의 마음이 바뀔까 봐 빠르고 철저하게 계획을 세웠다. 영녕후 세자에게도 청희 장공주와 함께 입궁하라고 했다.
그는 청희 장공주를 믿지 못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기껏 입궁해 놓고 후회할까 걱정이 되었다.
시아버지인 그가 며느리와 함께 황제를 알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지만 않았다면 자신이 청희 장공주와 함께 가고 싶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누구도 황제를 알현하러 갈 수 없었다.
지금의 영녕후부는 들어갈 수만 있고, 나갈 수는 없었다. 청희 장공주도 영녕후부의 사람으로서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내가 입궁해서 황제 폐하를 뵙는 것도 안 된다는 말이냐?”
청희 장공주는 간절한 얼굴로 두위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모습이 크나큰 서러움을 겪은 듯했다.
두위는 감히 청희 장공주를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애써 무시하며 말했다.
“황제 폐하의 명령 없이는 누구도 나가지 못합니다.”
그로서는 미인의 눈물을 누릴 복이 없었다.
어쩐지, 그가 오기 전 조부가 청희 장공주를 만나거든 바로 고개를 떨구고 최대한 쳐다보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었다.
청희 장공주의 외견은 그 정도로 힘이 있었다.
“세자, 이제는 어떡하죠?”
청희 장공주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영녕후 세자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가 없으면 안 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영녕후 세자는 청희 장공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선뜻 나섰다. 그녀를 품에 안고 부드럽게 위로했다.
“슬퍼하지 마시오. 우리 먼저 돌아갑시다. 이들에게 먼저 보고하게 하지요. 걱정하지 마시오. 폐하께서는 곧 당신을 불러들일 거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오.”
“네, 세자 말씀대로 할게요.”
청희 장공주는 영녕후 세자의 품에 기대 연약하지만 강인함을 잃지 않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두 사람이 돌아간 뒤, 두위는 그 자리에 서서 묵묵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나는 저 둘에게 보고하겠다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자기들끼리만 이야기했잖아. 영녕후부의 사람들은 다들 머리가 어떻게 됐나? 아니, 머리가 어떻게 된 사람은 청희 장공주겠지.’
두위는 청희 장공주가 주견이 없어 보이지만, 영녕후 세자가 계속 그녀에게 끌려다녔다는 사실을 퍼뜩 깨달았다.
‘참 대단한 여인이군!’
두위는 깜짝 놀라 식은땀이 났다. 그는 조금도 소홀히 여기지 않고, 바로 육장봉에게 이 소식을 전달했다.
육장봉은 영녕후부에서 벌어진 일은 아무리 사소해도 보고하라고 했었다.
* * *
황성사는 선황과 현 황제에게 줄곧 냉대를 받아, 근 이십 년간 발전이 없었다. 수도에 있는 사위는 줄어들기만 했을 뿐, 늘어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명부에 이름이 기록된 사위는 삼백여 명밖에 없었다. 툭하면 사위 삼천 명에서 오천 명이 온 거리를 뒤덮던 전성기에 비하면, 처량할 정도로 세력이 죽었다.
그러나 황성사가 수도와 여러 지방에 둔 정탐꾼의 숫자는 줄기는커녕 매년 끊임없이 늘고 있었다.
다만, 이십여 년이 지났으니 그들 중 얼마나 연락이 닿을지, 또 황제가 쓸 만한 이가 몇이나 될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대단하던 황성사가 이 정도로 몰락했군.”
육장봉은 황성사가 최근 삼 년 동안 한 일을 자세하게 조사해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황성사는 제대로 망했다. 최근 삼 년 동안 큰일 하나 조사해 내지 못했다. 보아하니, 예전에 심은 정탐꾼 중에서도 쓸 만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았다.
선황은 임종 전, 황제에게 황성사를 폐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 당부했다. 이 ‘폐하다’에는 ‘폐지해서는 안 된다’는 뜻도 있었지만, ‘버려두지 말라’는 뜻도 있었다.
선황은 말년이 되어서야 황성사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래서 황제를 간곡하게 타이르며 황성사를 다시 중용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황제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황성사를 방치하고 말았다.
그나마 이 몇 년 동안은 조계안의 손에 있는 정탐꾼들이 제 역할을 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황제는 눈앞이 가려져, 조정 대신들의 말을 모조리 믿었을 것이다.
“장군, 시간이 늦었습니다.”
육장봉이 손에 든 책자를 내려놓자, 육사가 앞으로 다가가 일깨워 주었다.
“돌아가자.”
육장봉도 하루 밤낮을 꼬박 새워서 피로를 느끼고, 침침해진 눈을 비볐다.
육사가 조용히 물러나더니 모든 것을 잘 정리했다. 향 한 대 탈 시간이 지난 뒤, 육장봉과 함께 출발했다.
때는 이미 술시(戌時 – 오후 7시~9시)였다. 온 성안은 야간 통행 금지가 시행되어,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다. 가끔 순찰하는 금군이 보일 뿐이었다.
금군은 장군부의 깃발을 보자, 감히 앞으로 다가가 묻지도, 예를 올리지도 못했다. 그저 한쪽으로 물러나 육 대장군에게 길을 내어 주었다.
육장봉도 길을 서두르지 않고 말이 천천히 달리게 내버려 두었다. 월씨 저택 근처의 거리를 지날 때,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송취 골목을 바라보았다.
‘월령안은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어젯밤, 그리고 새벽녘에 월령안이 그를 쌀쌀하게 대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미간을 문질렀다.
‘내가 요즘은 딱히 잘못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멀쩡하던 월령안이 왜 기분이 나빠졌을까? 혹시 수횡천의 일 때문인가? 여인이란 참, 알기가 힘들군.’
육장봉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각 뒤 육장봉은 장군부에 돌아왔다. 마침 육삼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에게 다가와서 보고했다.
“장군, 영녕후부는 그다지 조용하지 못하답니다. 청희 장공주 말로는 자신이 황성사를 움직였다고 했습니다. 입궁해서 폐하를 뵙고 이 일을 해명하고 싶다는 걸 두위가 막았습니다. 그런데 저녁 무렵, 청희 장공주가 영패를 가지고 와서 폐하께 전해 드리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폐하께 입궁해도 되는지 물어보라고 했다더군요. 폐하께서 만나 주지 않겠다고 하신다면, 죽어 버리겠답니다.”
“폐하께서 대단히 편찮으셔서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고 해라. 만약 청희 장공주가 죽는다면, 내가 주청해서 호국(護國) 대장공주로 추대하고, 고종 황제의 능묘 옆에 안장해 드린다고 전하거라.”
육장봉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런 때 육삼이 청희 장공주의 일을 꺼내는 것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었다.
그러나 육장봉도 충동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은 아니었다.
청희 장공주가 황성사를 움직였으니, 황제가 아무리 인자하더라도 그대로 놔둘 수는 없었다. 그러나 또 직접 손을 쓸 수도 없었다.
황제가 병사를 보내 영녕후부를 포위한 것은 영녕후가 먼저 손을 쓰기 기다리는 것이었다.
영녕후는 총명한 사람이니, 분명 황제의 근심을 덜어 줄 것이다.
“장군, 오늘 낮에 월 낭자 댁에 있는 소갑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일 년 전 천궁각에서는 정안현 현령에게 투석기를 개조한 도면을 바쳤답니다. 개조를 거친 투석기는 어린애도 조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새벽, 소갑이 개조한 달구지를 소인이 직접 보았습니다. 몇 장 밖에서도 전혀 힘을 들이지 않고 성인 남자의 시체 두 구를 영녕후부 안에 손쉽게 던질 수 있었습니다.”
육장봉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육삼을 바라보았다.
“잘 조사해라. 만약 사실이면 이 일을 크게 벌여야 한다.”
이 일을 터트리면, 배부르게 먹고 하는 일 없는 그 문관들도 온종일 그만을 공격하지는 못할 것이다.
“네, 장군.”
육삼이 대답했다. 그리고 육장봉이 계속 앞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자, 다급히 따라가서 계속 보고했다.
“장군, 십이가 월씨 저택…….”
육장봉이 손을 저으며 육삼의 말을 잘라 버렸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해라.”
육삼은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몰라, 황급히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네, 장군.”
평소 각지에서 알아낸 정보를 보고하는 일은 육일이나 육이가 해 왔었다. 그가 보고하는 때는 극히 드물었다. 그래서 장군의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장군의 표정을 보면 딱히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육삼은 불안해져서 쉬러 가지도 못했다. 아예 일찌감치 서재 밖에서 대기하며 육 대장군의 부름을 기다렸다.
정작 육장봉은 육삼을 불러들여 보고를 듣지 않았다. 목욕을 마친 뒤, 식당으로 식사를 하러 갔다.
식탁 위의 맛있어 보이는 요리 세 접시를 보더니, 육장봉은 막 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며 집사에게 말했다.
“내일부터는 양고기를 추가해라.”
집사는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곧 알았다고 대답했다. 육장봉이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자 서둘러 쫓아갔다.
“장군, 저녁 식사는…….”
육장봉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안 먹겠다.”
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집사는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고개를 돌려 식탁 위의 요리를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양고기 하나 때문에 식사도 안 하시겠다고? 따로 다른 음식을 드신 것도 아니실 텐데…….”
육장봉은 서재로 갔다. 육삼이 서재 밖에서 대기하는 모습을 보자, 엉망이었던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들어오너라.”
“네, 장군.”
육삼은 그의 어조가 부드러워진 것을 분명히 느꼈다. 덕분에 마음속의 불안감도 좀 줄어들었다.
육사의 말로는, 오늘 장군의 기분이 무서울 정도로 변덕스럽다고 했다.
“월씨 저택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봐라.”
육장봉은 자리에 앉아 팔걸이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불규칙적으로 팔걸이를 두드렸다.
육삼의 기분은 평온했었다. 그러나 육장봉이 팔걸이를 두드리는 소리를 듣자, 육삼은 어쩔 수 없이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몰래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장군, 월 낭자는 오늘 피곤하셨는지 온종일 주무시다가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깨어났습니다. 오늘, 총 열여섯 집안에서 월 낭자를 위문하느라 사람을 보냈습니다. 장군왕부에서 세자께서 직접 오신 것을 제외하면, 다른 집에서는 하인을 보내왔습니다. 십이가 그들을 전부 막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십이가 한 말 때문에 장군과 월 낭자 사이를 오해한 모양입니다. 지금 밖에 소, 소문이 났는데…….”
“십이가 뭐라고 말했느냐? 밖에 또 무슨 소문이 도느냐?”
육장봉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원래 좋지 못했던 기분이 더욱 나빠졌다. 육십이를 월씨 저택에 남겨 두지 말았어야 했다.
“십이가 말하기를, 장군께서 어젯밤에 월씨 저택에서 밤을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월씨 가문의 일은 장군께서 처리하신다고 했고요.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십이의 말을 듣고, 장군과 월 낭자의 사이가…… 보통이 아니라고 소문내고 있습니다.”
육삼은 말을 마치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장군,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바로…….”
“육십이, 그 녀석이 모처럼 사람 구실을 했군.”
육장봉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차갑던 얼굴에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가 바로 사라졌다.
“흠!”
육장봉은 가볍게 기침을 하고 차갑게 말했다.
“육십이에게 월씨 저택 대문을 며칠 더 지키라고 해라.”
육삼은 고개를 들고 망연한 얼굴로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자기가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