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중요하지 않아요
“야율제가 비명횡사했으니 청희 장공주는 이 원한을 반드시 갚으려고 할 거예요. 오늘 밤 일이 청희 장공주의 작품이든 아니든, 저와는 이미 단단히 척을 졌어요. 이렇게 된 이상, 좋게 풀 필요가 없겠네요. 또 후환을 남겨 둘 필요도 없지요.”
무엇보다도, 그녀는 육장봉의 태도를 통해 황제가 영녕후부에 손을 쓰려 하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그녀는 이 기세를 빌어 청희 장공주라는 위험을 제거하고 싶었다.
육장봉이 말했다.
“그 사람은 청희 장공주요. 병사의 보호를 받는 공주란 말이오. 평범한 사람과는 다르오.”
‘청희 장공주가 정말 눈이 뒤집힌다면, 병사들에게 바로 월령안 당신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겠지.’
월령안이 말했다.
“자식을 죽인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죠. 청희 장공주는 저를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당할 게 아니라면 반격할 수밖에 없어요.”
그녀와 청희 장공주 사이의 원한은 풀릴 가능성이 없었다.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했다. 그녀는 물러서기 싫었고, 물러설 수도 없었다.
“그걸 진작 알았어야 했소. 나는 당신이 야율제의 출생의 비밀을 알면 그만두리라 여겼소.”
그러나 월령안은 전혀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육장봉도 그녀에게 교훈을 주고 싶은 생각에,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청희 장공주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청희 장공주가 황성사까지 움직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월령안은 씁쓸하고 처량한 얼굴로 말했다.
“저는 그만둘 수 없었어요. 제가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거든요. 이미 호랑이를 타고 있어 내리기 힘든 상황이었어요. 야율제는 반드시 죽어야 했어요.”
그녀도 사실 그만두고 싶었지만, 그만둘 수가 없었다.
“청주는 안전하지 못해요. 전 청주에 도착도 하기 전에 죽을까 두려웠죠. 전 청주의 사람들과 맞서서 기선제압을 해야 했어요. 야율제는 제법 괜찮은 본보기죠. 북요의 남원대왕이니까요. 제가 그놈을 죽인 건 다른 사람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이기도 해요. 저는 야율제를 반드시 죽여야 했어요.”
조계안은 누차 그녀를 청주로 가라고, 범씨 가문과 쟁탈전을 벌이라고 협박했다. 그녀는 청주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엿한 추밀원수가 연약한 여인 하나를 감시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조계안이 이렇게까지 그녀에게 강요하고, 심지어 억지에 가까운 세 가지 조건까지 들어주겠다고 했다. 반대로 말하면 청주의 상황이 심각하다는 의미였다.
그녀는 재산을 전부 처분하고도 여태껏 청주로 떠나지 않았다. 변경의 일에서 몸을 뺄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이대로는 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였다.
청주로 가기 전에 반드시 만반의 준비를 마쳐야 했다.
떠들썩하게 야율제를 죽인 일은 그 준비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지 상관하지 않고, 설령 크나큰 대가를 치르게 될지라도 야율제의 목숨을 빼앗아야 했다.
월령안은 고아여서 기댈 곳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강경한 자세를 보여야만 청주의 사람들에게 경고할 수 있었다.
상업상의 정상적인 경쟁이라면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누구라도 그녀를 은밀히 해치려고 한다면, 그녀 역시 무슨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에게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육장봉이 말했다.
“나는 당신이 오기로 그랬다고 생각했소.”
월령안이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청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월령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 큰일을 감정적으로 처리하지 않아요.”
그래서 그녀는 변경도, 육장봉도 좋아하지 않으면서 여전히 변경에 있고, 여전히 웃으며 육장봉과 왕래했다.
육장봉이 화제를 돌렸다.
“그러면 당신이 손수 빚은 술은…… 사소한 일이었소?”
이화백 천 동이와 상관없이 그녀와 장군왕부의 거래는 성사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굳이 이화백 천 동이까지 꺼냈다.
월령안은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바로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사소한 일이에요.”
굳이 입에 올릴 것까지도 없는, 미련하고 가소로운 사소한 일이었다.
“그러면 그 일은 감정적으로 처리한 거였소?”
육장봉은 앞으로 다가가며 추궁했다.
그 모습은 뒤에서 보면 마치 육장봉이 월령안을 품에 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중요한가요?”
월령안의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녀는 숨을 들이쉬더니, 웃는 얼굴로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괴롭지는 않았다.
육장봉은 대답하는 대신 되물었다.
“중요하지 않소?”
‘당신 마음속에서는 나를 위해 직접 빚은 술이 이제 중요하지 않은 건가? 내가 더는 중요하지 않은 건가?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이제 나는 당신 마음속에서 더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여인의 마음이란 이토록 쉽게 변하는 거였나?’
“중요하지 않아요.”
월령안은 손을 등 뒤로 돌리더니 꽉 쥐었다. 그리고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중요하지 않은 거로군.”
육장봉은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의 마음속 한구석이 시큰하고 허전하게 느껴졌다.
“둘이 뭐하는 짓이냐?”
쾅!
월씨 저택의 대문이 발에 거칠게 차여 활짝 열렸다. 검은 옷차림에, 귀신 가면을 쓴 조계안이 저택 입구에 나타났다.
그는 월씨 저택에 들어오려다 육장봉과 월령안이 함께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들의 모습이 겹쳐져 마치 껴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일순 이성을 잃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문을 박차고 들어온 참이었다.
“둘이…… 그냥 말만 하고 있던 거였나?”
조계안은 그들 앞에 서고 나서야 육장봉과 월령안이 반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월령안의 옷매무새도 반듯했다.
두 사람이 껴안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순간 치밀었던 울화가 가라앉았다.
육장봉은 고개를 돌리고 조계안을 바라보더니 눈썹을 치켜세웠다.
“왜 왔는가?”
“조 대인.”
월령안은 뒤로 한걸음 물러서더니 조계안에게 예를 올렸다. 조계안의 분노는 못 본 척했다. 조계안은 원래 미치광이였으니, 변덕이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조계안은 육장봉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월령안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월령안, 괜찮으냐? 최일에게서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왔다. 걱정하지 마라. 이 일은 내가 책임지마. 황제 폐하라고 해도 널 건드리지 못할 거야!”
월령안은 어리둥절했다.
“최 대인이라고요?”
‘아까 지나가던 공자가 최일이었다는 건가? 이런 우연이?’
“그래. 최일이 너희 집을 지나갈 때 이상한 광경을 보고, 바로 입궁해 나를 찾았다. 월령안, 황성사는…….”
조계안은 사방을 훑어보고 나서야 황성사의 사람들이 전부 죽은 것을 알아차렸다. 살펴보니 다들 날카로운 병기에 당한 듯 했다.
‘이건 월씨 가문의 병기인가?’
조계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모두 네가 죽였느냐?”
“맞아요.”
월령안은 부인하지 않았다.
조계안은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말했다.
“이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다. 이 시체는 내가 가지고 가지. 황궁에서 말을 묻거든, 내가 죽였다고 해라. 내가 다 책임질 테니 너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야.”
“허!”
육장봉이 비꼬았다.
“조계안, 내가 죽은 사람으로 보이나?”
그가 있는데, 월령안에게 조계안의 도움이 필요하겠는가.
조계안과 육장봉은 날카로운 눈빛을 드러내며 서로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의 분위기에 노 의원과 월씨 가문의 호원들은 겁에 질려 벌벌 떨었다. 항상 무심했던 육십이도 겁이 나서 움츠러들었다.
월령안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뒤돌아서 육십이에게 말했다.
“십이, 소갑에게 가서 달구지를 다 개조했는지 물어보세요. 개조가 끝났으면 이 시체들을 서둘러 운반해 가세요.”
“월령안, 무얼 하려는 거냐? 시체를 옮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실종되면 황성사에서 밝혀내지 못할 리가 없다. 일단 조사에 들어가면 혐의를 벗지 못할 거다.”
월령안의 말을 들은 조계안은 육장봉과 기 싸움을 벌이던 것도 잊고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
육장봉도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고 담담하게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손을 뒷짐 진 채 월령안 옆에 섰다.
월령안이 말했다.
“알아요. 그래서 이 시체들을 영녕후부에 던져 버리려고요.”
많은 사람이 죽었다. 게다가 모두 관리들이었다. 이렇게 큰일을 쉽게 묻을 수는 없었다.
황제는 최소한 누가 황성사의 사람들을 동원했는지는 조사할 게 뻔했다.
“영녕후부에 던진다고?”
조계안은 눈을 부릅뜨고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월령안은 큰일을 벌이려고 하고 있었다.
육장봉의 차가운 얼굴에는 옅은 웃음기가 드러났다.
‘오는 정이 있으면 가는 정도 있다더니.’
월령안은 정말 조금도 손해를 보려 하지 않았다.
“이 많은 황성사 사위가 영녕후부에서 죽으면, 어찌 되었건 간에 폐하께서 이유를 조사하실 거예요. 진상을 밝혀내기 전까지, 폐하께서는 병사를 파견해 영녕후부를 보호하시겠지요. 그러면 영녕후부에는 아무도 들락거리지 못하게 되겠지요.”
월령안은 미소를 띠고 말했다.
“좋소. 내가 폐하께 건의를 드리겠소.”
육장봉이 칭찬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영녕후부에 병사를 파견하여 포위한다면, 일의 주도권은 그들의 손에 들어온다. 진실을 언제 밝힐지, 병사를 언제 철수할지는 그들의 의지에 달렸다.
“월령안, 소란 피우지 마라. 황성사 사람들의 시체가 영녕후부에 나타난다면 폐하께서도 골치 아프실 거다. 너 때문에 폐하가 번거로워지신다면, 그 뒷일은 생각해 보았느냐?”
조계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람들은 폐하께서 보내신 사람들이 아니에요. 청희 장공주가 보낸 거예요.”
월령안이 말했다.
조계안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이 일은…… 너무 심각하군. 월령안, 난 입궁해서 폐하께 보고해야겠다. 폐하께서 결정하시도록 하고, 너는 먼저 손을 쓰지 마라.”
조계안은 이들이 황형이 보낸 게 아니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황성사는 제왕의 손에 들린 칼이었다. 그의 부황도 임종 전, 황형에게 황성사를 쉽사리 중용하지 말되 폐하지도 말라고 거듭 당부했다.
그만큼 황성사의 존재는 문무백관에게 위협적이었다.
황성사는 반드시 황제의 손에 있어야 했다. 신하들이 너무 소란을 피우면 황성사가 나서서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신하들이 제왕의 손에 들린 권력을 뼈에 새기도록 했다. 그 중요성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월령안은 황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황성사를 움직였다고 했다. 이는 대단히 큰사건이었다.
“저희는 조 대인의 소식을 기다리겠습니다.”
월령안이 말했다. 날이 밝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날이 밝기 전까지만 시체를 처리하면 되니, 지금 당장 조급해할 필요가 없었다.
“난 지금 바로 입궁해야겠다.”
사건이 심각하다 보니 조계안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떠나기 전, 갑자기 독기 어린 시선으로 육장봉을 쏘아보며 말했다.
“육 대장군, 함께 가는 게 어떤가?”
절대로 육장봉에게 월령안과 단둘이 시간을 보낼 기회를 줄 수는 없었다.
육장봉은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계안, 이 망나니가 월령안을 위해 부상도 돌보지 않고 황궁을 뛰쳐나왔다. 그가 함께 가지 않는다면, 황제가 또 월령안을 원망할지도 몰랐다.
예전의 그였다면 이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월령안이 청주로 가서 겪을 험난함을 알고 있었다. 육장봉은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월령안이 홀로 맞설 미래를 생각하자, 자연히 그녀를 육씨 가문에서 쫓아냈던 육비우의 혼사가 떠올랐다.
육비우와 소함연은 너무 잘 어울렸다.
내일 그는 육비우를 소씨 저택으로 보내 혼사에 관해 상의하게 할 것이다.
소씨 가문에 큰일이 일어났으니 지금쯤이면 분명 서둘러 딸을 시집보내려고 할 것이다. 육비우가 소함연을 아내로 맞이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으리라.
육장봉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일이 있었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다. 그리고 담담한 표정으로 조계안과 함께 입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