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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260)화 (260/1,004)

260화 역시 진정한 친구였군

최일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대인, 저를 놓아주시면 안 됩니까? 그렇지 않아도 삼 년 동안 품급이 삼품까지 올라서, 저를 노려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갑자기 정이품(正二品)으로 승진시키겠다니, 제가 순탄하게 사는 게 싫으신가요?”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황족 형제를 만났을까? 하나같이 날 괴롭혀 죽이지 못해 안달이로군.’

“승진시켜 줘도 싫다는 거냐?”

조계안이 물었다.

최일이 대답했다.

“공로 없이는 상을 받을 수 없지요. 육 대장군께서는 오랫동안 병사를 거느리고 변방에서 큰 공을 세우고 나서야 겨우 일품까지 오르셨습니다. 절 승진시켜 주시려면 제가 공을 세울 기회는 주셔야지 않겠습니까?”

공로 하나 세우지 않고 바로 승진하는 것은 위험했다. 그에게 최씨 가문이라는 뒷배경이 있더라도,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명성만 억울하게 더럽혀질 것이 뻔했다.

그는 육 대장군이 아니었다. 문관이었고, 고결한 선비였다.

관리 노릇을 하려면 명성에 기대야 하는 법. 명성이 더럽혀지면, 간신 취급을 받을 게 뻔했다.

그때는 문관들이 그를 받아 주느냐가 문제가 아니었다. 최씨 가문에서도 그가 더는 벼슬을 하지 못하게 막을 것이다.

‘조계안은 정말이지 지독하군. 나는 그래도 당신을 반쯤은 지기라고 여겼는데.’

이런 작자가 과연 지기란 말인가. 조계안은 그를 골탕 먹일 줄만 알았다. 월 낭자에게 미움을 받게 만든 건 둘째치고, 그의 명성까지 망치려 들었다.

“쳇!”

조계안은 퉁명스럽게 혀를 찼다.

“나야말로 네가 공을 세웠으면 한다. 하지만 너는 대체 무슨 일을 했지? 너더러 춘일연에 참가해 육장봉이 허튼짓을 하지 못하게 지켜보라고 했잖느냐. 그런데 결과는 어땠느냐?”

“저는…….”

“변명할 것 없어. 지금은 네 변명 따위를 듣고 싶지 않다. 내가 아는 건 이것뿐이야.

너더러 육장봉을 지켜보라고 했더니, 그놈이 사람들 앞에서 월령안을 안고 공중에서 춤을 추는 것을 막지도 못했지. 또 육장봉이 야율제의 수급을 얻어서 월령안에게 잘 보이는 것도 눈뜨고 지켜만 보았지. 게다가 그놈이 한가하게 장군왕부에 가서 술까지 사게 놔뒀다! 최 자도, 말해 봐라……. 나를 위해 대체 무슨 일을 했느냐?”

조계안은 말할수록 화가 났다. 나중에는 아예 일어나 앉은 자세로 최일에게 한바탕 퍼부었다.

‘조계안 이 미친놈!’

최일은 깜짝 놀라 의자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그와 조계안은 오랫동안 알고 지냈다. 그러다 보니 조계안이 변덕이 심하고, 언제 돌아설지 모르는 성격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계안은 그와 왕래할 때만큼은 늘 군자다운 점잖은 모습만 보여줬다. 평소 일을 처리할 때도 선을 지켰다. 비록 오만하기는 했지만, 성격이 호쾌하고, 옹졸한 사람은 아니었다.

평소 그와 조계안은 제법 괜찮게 지내왔다. 덕분에 조계안이 발작할 때의 모습을 거의 잊고 살았다.

그래서 방금 조계안이 두 눈이 시뻘게져 미치광이 같은 모습으로 덤벼들자, 최일은 하마터면 그를 때릴 뻔했다.

그러지 않고 꾹 참은 이유는 그의 도량이 넓어서가 아니었다. 조계안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최일은 조계안의 얼굴을 뒤덮은 흉악한 가면과 짐승처럼 시뻘겋게 물든 눈을 무시했다. 그리고 매우 우아한 자세로 일어나더니 뒤로 물러섰다.

“조 대인, 부상이 너무 심합니다. 대인께서 공무를 위한 마음이 급하시더라도 자기 몸을 챙기셔야지요. 소인이 대인이 두어 달 더 요양하시도록 폐하께 주청을 드리겠습니다.”

최일은 고상하고 우아한 군자답게 웃었다.

“내일 대조회에서 소인이 육 대장군을 뵙거든 조 대인을 대신해 문안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조회가 끝난 뒤, 돌아가는 길에 월씨 저택도 지나갈 것 같습니다. 대인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들러서 대인을 대신해 월 낭자께 문안 인사를 드리지요.”

‘월령안 때문에 이 난리를 치면서, 폐하께는 솔직하게 말할 엄두가 안 나는 모양이군.’

“내일 아침, 너를 지추밀원사로 추천 하는 성지가 문무백관 앞에서 내려질 거다. 최 자도, 난 한다면 해!”

조계안도 일어나 맨발로 바닥을 딛고 섰다. 시뻘건 눈이 그의 가면과 어우러져 더욱 흉악해 보였다.

“좋습니다. 정이품으로 승진이라니, 큰 경사로군요. 그러면 조 대인의 발탁에 감사드리지요.”

최일은 조계안이 홧김에 하는 말임을 알고 있었다. 그의 협박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대인, 시간이 늦었군요. 소관은 내일 조회에 참석해야 하니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최일은 발작하는 조계안과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대충 읍을 하더니 돌아서서 떠나려고 했다.

그가 소매를 떨치며 떠나려는 순간이었다. 옷소매에 감춰진 두루마리가 쑥 빠져나왔다.

땅에 떨어진 두루마리가 천천히 펼쳐졌다.

“이건…….”

조계안은 최일의 대거리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상태였다. 그러나 땅에 떨어진 그림을 본 순간, 눈이 반짝였다. 재빨리 앞으로 다가가 그림을 집어 들더니 기뻐하며 크게 소리쳤다.

“월령안이잖아! 날 위해 월령안이 공중에서 검무를 추는 모습을 그려 오다니! 최 자도, 역시 내 진정한 친구였군!”

‘내 그림……! 이건 무슨 인연이지? 혹시, 이 그림은 조계안의 것이 될 운명이었나?’

최일은 자신의 불운을 한숨으로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겉으로는 점잖은 태도를 유지했다.

“맞습니다. 그 그림은 원래 조 대인을 위해 준비했던 겁니다. 하지만 지금 제 기분이 좋지 못하니 조 대인, 그림을 돌려주시지요.”

“내가 주웠으니 이제 내 거다. 안 줘.”

조계안은 어린애처럼 그림을 몸 뒤로 후다닥 숨겼다.

“전 대인을 도와 육 대장군을 제대로 지켜보지 못했습니다. 육 장군이 월 낭자를 안고 공중에서 검무를 추도록 내버려 두어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게 했지요. 또 육 대장군의 발목도 잡지 못했습니다. 육 장군이 야율제의 수급을 따내어 월 낭자의 환심을 사게 했지요. 게다가 유경장도 막지 못했습니다. 그자가 사람들 앞에서 월령안에게 구혼을 하게 했지요. 저는…….”

“제발 부탁이니까 그만 해하거라……. 내가 잘못했다. 잘못했다고. 너 같은 서생들은 하나같이 트집 잡기를 좋아하는군. 그건 도대체 무슨 병이야?”

조계안은 자신의 잘못을 깔끔하게 인정했지만, 말은 여전히 거칠었다.

최일은 조계안에게 하도 시달렸더니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그림이 조계안 손에 넘어간 이상, 다시 가져올 수는 없다는 것은 잘 알았다. 어쨌든 조계안의 화가 누그러졌으니, 이 그림도 제 역할을 한 셈이다.

만약 조계안이 작정하고 소란을 피우면 황제도 말릴 수가 없었다.

‘됐다, 이만하자.’

어차피 이 그림은 조계안의 것이 될 운명이었다. 최일은 그렇게 생각해서 억지로 뺏으려 들지는 않았다.

“육 대장군이 대인의 술을 빼앗았다고 했는데, 그건 어찌 된 일입니까?”

최일은 조계안이 앞서 말한 두 가지 일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술을 빼앗겼다는 일은 몰랐다.

조계안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말도 마라. 그 얘기만 하면…… 속이 답답해지니까. 내가 다쳐서 황궁 밖으로 나가지 못하니까 육장봉 그 소인배가 자기보다 소식이 느린 틈을 타서, 월령안이 손수 빚은 술을 선수 쳐서 강탈해 갔다.”

조계안은 화가 나서 또 눈이 시뻘게졌다. 손에 든 두루마리를 펼쳐 보는 것으로 치밀어 오른 화를 간신히 삭였다.

“이 일은 따지고 보면 황형 탓도 있어. 황형이 가장 먼저 알고서도 나한테 알려 주지 않고, 육장봉에게 사람을 보내 알렸으니까. 흥, 두고 보자고……. 나중에 청주에서 미인계라도 쓰면, 난 절대 막아주지 않을 거다. 복상사하게 내버려 두지, 뭐.”

‘또 월령안과 연관된 일이었군.’

최일은 말도 하기 싫어졌다.

* * *

최일은 조계안의 푸념을 한바탕 들어주고, 또 식사까지 함께했다. 그러고 나서도 상냥하게 조계안과 함께 한참이나 월령안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밤이 되어서야 겨우 궁을 나설 수 있었다.

“용로(踊路) 대로로 가자.”

최일은 마차에 올라 마부에게 말했다.

아까 조계안에게 월령안의 저택에 들르겠다고 한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가 입궁하는 길에 월씨 저택이 있는 골목 밖의 그 거리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평소에는 그 길로 다니는 때가 드물었다. 비록 지름길이기는 했지만, 낮에는 마차나 행인이 너무 많았다.

그는 북적대는 게 싫어서, 평소에는 조금 돌아서 가더라도 그 길은 잘 다니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밤이었다. 성안에는 야간 통행이 금지되었으니,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지름길로 가기 아주 좋은 시간이었다.

“네, 공자.”

마부가 대답하고 나서, 채찍을 휘둘러 용로 대로로 마차를 몰았다.

다그닥, 다그닥…….

마차는 밤길을 순조롭게 달렸다. 일각 뒤, 마차는 용로 대로에 도착했다.

그런데 조용하던 용로 대로에 갑자기 규칙적인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들어보니 사람 수도 적지 않은 듯했다.

“공자, 앞쪽에 관졸이 있습니다. 송취(松翠) 골목 쪽으로 갔는데, 사람을 잡아들이려는 것 같습니다.”

마부는 앞쪽에 불빛이 늘어선 모습을 보자, 급히 마차를 세웠다.

“송취 골목?”

최일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마차 문을 열어 내다보았다.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관졸 무리는 그들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게다가 횃불까지 들고 있었다. 덕분에 그들이 든 깃발과 몸에 걸친 관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최일은 경악에 휩싸였다.

“황성사(皇城司) 사람들이잖아?”

황성사는 조정 대신을 감찰하는 기관이었다. 사람을 잡아들일 수 있는 독립적인 권력이 있었고, 육부(六部)에 보고할 필요가 없었다. 죄인의 죄명을 확정할 때도 대리시(大理寺)나 형부에 보고할 필요가 없었다.

황성사는 조정의 기관이었지만, 삼성육부(三省六部)가 아닌, 황제 직속 관할이었다. 황제의 명령만 따랐으며, 황제만이 움직일 수 있었다.

쉽게 말해, 황성사는 황제의 사냥개였다. 그들의 존재는 황제의 일을 처리하고, 황제의 의지를 집행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황성사의 사람이 송취 골목, 즉 월령안의 저택 부근에 나타났다.

이 사실은 최일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혹시 폐하께서 나와 조계안의 대화를 들으셨나? 그래서 조계안이 월령안 때문에 발작했다는 걸 아시고, 황성사의 사람들에게 잡아가라고 바로 명령하신 것은 아니겠지?’

* * *

현재 상황은 최일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황성사의 사람이 송취 골목에 나타난 이유는 월령안을 잡아들이기 위해서였다.

황성사에서 나온 사람들은 월씨 저택 대문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말 한마디 없이 바로 문을 부수고 굶주린 늑대처럼 쳐들어갔다.

사위(司衛 – 보안을 책임지는 직책)는 칼을 빼 들고 월씨 저택으로 들어가더니 닥치는 대로 베어 넘겼다. 그 요란한 기세는 야율제가 사람을 거느리고 월씨 저택에 쳐들어왔던 날에 뒤지지 않았다.

소리를 들은 이웃들은 살그머니 문을 열고 훔쳐보았다. 그러나 누구도 감히 나서지 못했다. 관아에 신고하러 가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그들도 이번에 문 앞까지 들이닥친 무리가 외국의 사사 따위가 아니라, 황성사에서 나온 사람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황성사는 제왕의 사냥개였다.

고종 황제 이후로는 유명무실한 기관이 되었다지만, 변경 토박이라면 과거 황성사의 잔혹함을 잊을 수가 없었다.

황성사를 떠올리자, 사람들은 몸을 덜덜 떨었다.

“죄인 월령안은 어디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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