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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259)화 (259/1,004)

259화 날 내보내달라니까요

조계안의 수하는 다급한 나머지 문도 두드리지도 않고 담을 넘어 들어갔다. 그러나 그의 예상대로 한발 늦고 말았다.

장군왕 세자는 이미 술을 팔아넘겼다. 심지어 ‘날강도’에게 팔아넘기는 바람에, 되찾아 오기란 불가능했다.

한편, 육일은 계약서를 받자마자 한시도 쉬지 않고 성 밖 군영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장군, 일을 마쳤습니다.”

육일은 계약서를 육장봉 앞에 바치면서 말했다.

“소인이 떠날 때 조왕 전하의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래.”

육장봉은 계약서를 훑어보고 옆에 두었다.

이 계약서는 장군왕 세자를 단속하는 데 쓸 것이다.

“장군, 제가 성을 나서기 전에 장군왕부의 사람이 월 낭자를 도와서 형부(刑部)에 줄을 대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막아야 할까요?”

새내기들과 함께 훈련하는 처지가 되지 않도록, 육일은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는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쁘게 움직여야만, 장군은 그에게 다시 훈련하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육일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육 대장군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일은 네가 나설 필요가 없다. 내일부터…… 다시 훈련을 시작해라. 합격하거든 그때 돌아와.”

“……네, 장군!”

육일은 목구멍에 핏덩이가 걸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마터면 그 핏덩이를 그대로 토할 뻔했다.

하지만 더는 말하지 못하고 묵묵히 물러났다.

문을 나선 육일의 얼굴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어두운 곳에 몸을 숨기고 있던 암위를 끌어냈다.

“말해라.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냐? 장군께서 왜 저러시느냐?”

육이에게 벌을 준 다음에는 장군의 기분이 이렇게까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군영에서 군사들을 격려한 다음부터 장군의 기분이 점점 언짢아지고 있었다.

“대인, 오후에 십이가 월 낭자에게 술을 가져갔었습니다. 돌아올 때 답례를 다섯 수레나 가지고 왔어요. 그것도 모두 여인이 쓰는 물건으로 말입니다.”

이 암위는 육일의 수하였다. 육일이 다시 훈련하러 간다면, 그도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새내기들과 함께 훈련을 막 마친 참인데, 또 훈련을 다시 시작하게 될 줄이야. 군영에 있는 형제들이 어떻게 비웃을지 몰랐다.

육일은 어리둥절했다.

“여인이 쓰는 물건이라고?”

‘월 낭자는 무슨 생각이지? 우리 장군부에는 여인이 없는데. 설마…… 북요 사절과 함께 온 황녀 야율아한이 우리 장군을 좋아한다는 것을 안 건가? 아니면 장군께서 부승상 모친의 생신 잔치에 초대를 받아, 부승상의 따님과 선을 보는 걸 알게 된 건가?’

”이것 말고도, 월 낭자가 육십이에게 설옥고를 한 병 줬답니다. 육십이더러 쉬는 날에는 월씨 저택으로 와서 호위하라고도 했답니다.”

암위가 계속해서 보고했다.

육일은 또 어리둥절했다.

“설옥고라고?”

‘그건 월 낭자가 우리 장군만을 위해 구한 약이잖아. 그걸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사람에게 줬지? 월 낭자, 우리가 너무 편히 지내는 게 싫으시군요. 그래서 일부러 일을 만들어 주시는 겁니까?’

“아니, 월 낭자는 도대체 무슨 뜻이지? 왜 육십이더러 호위를 하라고 했지?”

월령안은 장군부의 사람들과 늘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관계를 유지하며 쉽게 왕래를 하지 않았다.

육장봉이 호위를 보내 주어도, 항상 그들을 멀리했다. 차라리 안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소육자를 쓰는 한이 있더라도, 장군부의 사람은 쓰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번에는 먼저 나서서 육십이를 쓰겠다고 했을까? 월 낭자는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

암위가 고개를 숙였다.

“소인은 모르겠습니다.”

육일도 암위가 대답할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다시 물었다.

“장군께서 이 이야기를 들으시고 기분이 안 좋아지신 거냐?”

“그리고…….”

“그리고 또 뭐가?”

“최 대인이 입궁하셔서 조왕 전하께 그림을 한 점 선물하셨습니다. 월 낭자를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암위는 말을 마치더니 고개를 더욱 푹 숙였다.

굳어졌던 육일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그는 온몸이 불편해졌다.

“이렇게 큰일을 왜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

육일은 지금 당장 가서 최일을 한바탕 두드려 패고 나면 만회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대인, 소인이 계속 대인께 손짓을 했는데도, 못 보셨잖습니까.”

암위는 더없이 억울했다.

오늘 육일이 서둘러 돌아오자마자 물도 마시지 않고 장군을 찾아갈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로서는 도저히 말을 붙일 기회를 찾을 수 없었다.

육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

춘일연 날, 최일은 그림 두 점을 그렸다. 하나는 월령안이 공중에서 검무를 추는 멋진 자태를 그린 것이었다. 다른 한 점에는 월령안이 사뿐사뿐 걷는 자태가 담겨 있었다.

그는 걷는 모습을 그린 그림을 월령안에게 선물로 주었다. 공중에서 검무를 추는 그림은 남겨 둘 셈이었다.

아무튼, 최일은 춘일연에서 돌아온 다음에도 조계안에게 그 그림을 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오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았던 조계안이 저녁이 되자 갑자기 소란을 피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

황제는 막을 수가 없었다. 또 육장봉은 찾지도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최일을 황궁으로 불러들였다.

최일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몰랐다. 그러나 조계안의 얼마 안 되는 친구 중 하나로서, 어떻게 그의 화를 잠재워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외출하기 전에 막 표구를 끝낸 그림을 이를 갈며 챙겼다.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난각에 가까이 가자마자 분노에 찬 조계안의 고함이 들렸다.

“황형, 제 상처는 이미 나았습니다! 더는 치료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 궁을 나갈 겁니다. 여기서 나가겠다고요. 제 말 들리십니까?잠한성이 야율제에게 만들어 준 사사는 고작 한둘이 아닙니다. 육장봉에게 무슨 능력이 있답니까?

그놈은 병사를 데리고 전쟁할 줄밖에 모릅니다. 이런 뒷일은 내가 전문이라고요. 날 보내지 않아서 야율제의 부하가 도망친다면, 이 일은 누가 책임질 겁니까? 황형, 억지를 부리지 말라고요! 제 수하가 하는 말 못 들으셨습니까? 그 노친네 몇몇이 이미 경성에 들어섰다잖아요. 그놈들이 키운 사람이 유경장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무슨 일을 벌일지 어떻게 압니까?

황형, 날 내보내달라니까요!

십 년입니다. 우리가 청주를 되찾지 못하면, 그 늙은이들을 제어할 수가 없어요. 황형, 황형은 황제잖아요. 대국을 보라니까요, 네?”

조계안은 훈계조의 말투에 어조마저 삐딱했다. 그리고 황제는 부드러운 말투로 달래고 있었다. 무슨 말로 달래는지는 듣지 못했다. 최일은 멀리 떨어져 있었고, 황제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하지만 최일은 조계안의 말이 전혀 틀린 데가 없다고 생각했다.

‘조 대인의 요구는 아주 타당한걸. 공무가 있는데, 그깟 작은 부상이 대수인가? 겨우 이까짓 일로 한밤중에 날 불러들이다니. 폐하께서 사소한 일을 너무 크게 만드시는 건 아닐까?’

최일은 손에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묵묵히 감추었다. 이 그림을 지켜 낼 가망이 보였다.

“폐하, 최 대인께서 오셨습니다.”

황제의 시중을 드는 내관이 한발 먼저 가서, 안에 있는 황제와 조계안에게 보고했다.

방 안의 다투던 소리가 순간 멎었다.

황제는 가볍게 기침을 하고 말했다.

“들라 하라.”

“최 대인, 드시지요.”

내관은 그제야 돌아섰다. 문어귀에서 몇 걸음 떨어져 있던 최일에게 앞으로 오라고 눈짓했다.

“이 공공, 수고가 많으십니다.”

최일은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관의 옆을 지날 때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최 대인, 별말씀을요.”

내시 총관의 얼굴에 걸린 미소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최일을 바라보는 시선은 찬사로 가득 차 있었다.

‘최씨 가문 공자답군. 아주 예의가 발라.’

“폐하, 전하.”

최일은 안으로 들어가 황제와 조계안에게 예를 올렸다.

황제는 손을 내저으며 최일에게 예를 올릴 필요가 없다는 신호를 보냈다.

“자도, 마침 잘 왔구나. 짐 대신 계안이를 좀 타일러 봐라. 계안이더러 몸조리 잘하고, 어떻게 해서든 황궁 밖에 나가서 고생을 사서 하는 일이 없도록 해라. 그, 저기…… 짐은 머리가 아프니 먼저 돌아가마.”

황제는 마치 뒤에서 흉악한 짐승이라도 쫓아오는 듯, 말을 마치자마자 재빨리 떠났다.

최일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황제가 떠나간 다음, 최일은 조계안을 바라보았다.

조계안은 최일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추악하고 사나운 귀신 모양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는 침대에 누워서 다리를 꼬고 있었다. 그 모습이 한없이 한량 같기만 했다. 공무를 위해 자신의 안위도 내던지는 위대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쩐 일로 왔느냐?”

조계안은 눈을 흘기며 싫은 티를 확 냈다.

최일은 말을 이어받으며 슬그머니 트집을 잡았다.

“대인께서는 누가 오기를 기대하셨는데요?”

최일은 아직 저녁 식사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황제에게 불리는 바람에 입궁했는데, 조계안은 싫은 티를 내고 있었다.

‘누구는 오고 싶어 왔나?’

조계안은 손깍지를 껴서 뒤통수를 받쳤다.

“육장봉이지!”

“그래서, 제가 잘못 왔다는 말씀이십니까?”

최일은 조계안에게 휘둘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가 아니라 황제가 조계안에게 휘둘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 대인은 아무리 봐도 아픈 몸을 이끌고 공무를 집행하겠다는 모습은 아니었다. 이 기세등등한 모양새를 보아하니, 한바탕 싸울 사람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기왕 왔으니 나 대신 황형 좀 설득해서 날 황궁 밖으로 나가게 해 줘.”

조계안은 발을 까닥거리더니 발끝으로 최일을 가리켰다.

“그래야 하는 이유를 하나라도 대 보시죠?”

최일은 의자를 끌어와 조계안 옆에 앉았다. 물론, 조계안의 발과는 멀찍이 떨어진 자리였다.

“난 나가서 육장봉과 싸워야겠어. 그놈이 오지 않으니 내가 갈 수밖에.”

조계안은 최일 앞에서는 숨길 필요가 없었다.

최일도 조계안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바로 질문했다.

“육 대장군이 대인께 어떻게 하셨는데요?”

“내 술을 빼앗고, 내 수급을 빼앗았어. 이 이유면 충분한가?”

조계안은 울분에 가득 차 있었다. 만약 황궁 안팎으로 황제의 수하들이 지키고 있지 않았고, 그 사람들에게 자신의 힘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뛰쳐나갔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이렇게 소란을 피울 필요가 없었을…… 아니지!’

조계안은 원래 육장봉을 불러들이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황형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최일을 불러들였다.

“자세히 말씀해 보시지요?”

황제는 이미 최일을 불러들였다. 다시 육장봉을 불러들이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조계안을 황궁 밖으로 나가게 도와줘? 그건 안 되지.’

그는 신하로서, 황제의 고충을 함께 나누어야 했다. 황제가 조계안을 설득하는 임무를 준 이상, 아무리 힘들어도 잘 해내야 했다.

“설명할 게 뭐가 있느냐. 황형이 널 불러들인 걸 보니, 내가 뭘 하려는 생각인지 알고 있는 게 분명해. 황형은 절대 나를 황궁 밖으로 내보내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너도 내 앞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할 일이나 해. 아, 참. 나는 이따가 황형을 찾아가서, 너를 추밀원의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추천할 생각이다. 내 부장(副將)이 되는 거야, 어때?”

조계안은 잔뜩 악의를 품은 표정이었다. 눈에도 사악함이 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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