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낭자께 선물을 드리려고 왔어요
예전에 육씨 저택에 있을 때 월령안은 비슷한 초청장을 처리했던 경험이 있었다. 반 시진도 되지 않아 스무 개가 넘는 초대장에 모두 답장을 쓴 다음 분부했다.
“다 보내거라.”
고작 하루 만에 이렇게 초대장을 보낸 걸 보면, 아가씨들이 어지간히 조급했던 모양이었다. 한시라도 끌지 않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예, 아가씨.”
집사는 앞으로 다가와 책상 위에 쌓인 초대장과 그녀가 쓴 답신을 안아 들었다.
“아가씨, 오늘 오전에 정 장군부의 집사가 후한 선물을 보내왔습니다. 소인이 감히 받지 못하겠다고 했는데도, 예단과 선물을 남겨 두고는 가버렸습니다. 소인도 어쩔 수가 없어 우선 받아 두었습니다.”
“정씨 가문?”
월령안은 잠깐 생각하더니 그제야 알아차리고 웃으며 말했다.
“받아 두게. 손 신의가 도착하면, 나한테 정씨 가문 아가씨를 데리고 가서 손 신의를 찾아봐야 한다고 귀띔해 주게.”
정 장군의 일 처리는 뛰어났다. 그녀가 나중에 거절할 수 없게 만들었다.
“예, 아가씨.”
집사는 듣자마자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차렸다. 정씨 가문에서 보낸 후한 선물에 대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손 신의를 청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손 신의에게 거절당해 본 사람이라면, 정씨 가문에서 보내온 그 선물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님을 알 것이다.
똑똑.
“아가씨!”
시녀가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월령안의 허락을 받자,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가씨, 장군부에서 선물을 다섯 수레나 보내왔습니다. 그쪽에서는 아가씨께 직접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장군부라고?”
월령안이 물었다.
“네, 육십이 장군이 가져왔습니다. 대장군께서 꼭 아가씨한테 직접 전하라고 분부했다고 합니다.”
시녀가 다시 한번 반복했다.
“그럼 가 보자꾸나.”
육장봉이 갑자기 무슨 선물을 주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기도 귀찮았다.
‘어차피 사람도, 선물도 밖에 있으니 한번 들여다보면 그만이겠지.’
월령안은 시녀를 데리고 앞뜰로 나갔다. 그녀가 채 다가가기도 전에 육십이가 신이 나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기쁨에 겨워 말했다.
“월 낭자, 월 낭자……. 제가 낭자께 선물을 가져다드리려고 왔어요.”
“당신네 장군께서 분부하신 건가요?”
바보처럼 좋아하는 육십이를 보자, 월령안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좋은 기분은 전염된다. 육십이를 볼 때마다 그녀도 기분이 좋아지고는 했다.
“네, 네. 대장군께서는 군사들을 격려하러 갔어요. 그리고 저에게는 이 술 열 동이를 골라 월 낭자에게 보내 주라고 하셨어요.”
육십이는 자신이 나서서 월씨 저택에 선물을 전하는 심부름을 왔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술 열 동이요?”
월령안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물었다.
“아무 일도 없는데 왜 장군께서 군사들을 격려하시나요? 또 왜 제게는 술 열 동이를 주신 건데요?”
‘나한테 술을 보내는 건 도대체 무슨 뜻일까?’
게다가 선물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육장봉이 야율제를 죽인 데 감사하는 뜻에서 그녀 쪽에서 육장봉에게 선물을 보내야 했다.
육십이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릅니다. 아마 어제 우리가 잘해서 대장군께서 기뻐하시는 거겠죠?”
“어제 얼마나 잘했나요? 야율제가 주나라에서 길러낸 사사를 모두 잡았나요?”
월령안은 티를 내지 않으며 떠보았다.
육이가 야율제의 수급을 가져오기 전까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잠한성이 야율제를 위해 많은 사사를 양성했고, 야율제가 그대로 물려받아 아무도 모르는 수하를 그렇게 많이 두었을 줄이야.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절대 야율제와 정면으로 대적하지 않았을 것이다.
야율제는 주나라에서 중점적으로 경계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은 주나라에서 너무 큰 세력을 키울 수도, 너무 많은 사람을 심을 수도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날 밤, 야율제가 부하들을 이끌고 성안으로 들어와 그녀의 집에 쳐들어왔을 때, 변경에 심어 둔 그의 수하들을 모조리 동원했다고 여겼다. 전 무림맹주 잠한성이 그를 위해 암암리에 사사를 길러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육이가 그 일을 말해 주었을 때, 그녀가 얼마나 다행으로 여겼는지는 하늘만이 알리라.
육장봉이 손을 써 주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가 야율제를 죽였다 하더라도 편안히 지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육십이는 천명사 포위 작전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했다. 월령안이 물어보자, 서둘러 대답했다.
“월 낭자, 물어볼 사람을 제대로 찾으셨네요. 제가 어제 육삼이랑 천명사를 온종일 지켰거든요. 천명사를 몇 시진이나 뒤져서야 야율제의 거점을 찾을 수 있었어요. 월 낭자는 모를 거예요. 야율제 그놈이 아주 꼭꼭 잘 숨더라고요. 제가 인내심이 있기에 망정이지, 만약 육삼 혼자서 지켰더라면, 분명 그놈을 찾지 못했을 거예요.”
육십이는 의기양양해서 우쭐거렸다. 자신의 인내심을 자랑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월령안도 장단을 맞춰 주며 엄지를 들고 칭찬했다.
“야율제가 몇 년을 애써 만든 거점을 여러분은 몇 시진 만에 찾았군요. 대단해요.”
“헤헤…… 별것 아니에요.”
육십이는 어제 거점을 찾던 과정을 떠올렸다. 늘 얼굴이 두꺼웠지만, 이번에는 조금 찔리는 느낌이 들었다.
어제 그들이 그렇게 순조롭게 야율제가 천명사에 만들어 둔 거점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수 맹주 덕분이었다.
‘수 맹주가 아니었더라면…… 흠흠, 이 일은 월 낭자에게 알리지 않는 게 좋겠다. 안 그러면 월 낭자가 우리를 쓸모 없다고 여길지도 몰라.’
육십이는 뜨끔한 기색을 감추려고, 일부러 과장하며 말했다.
“월 낭자, 야율제 그놈은 정말 미치광이예요. 저희가 거기서 뭘 발견했는지 아세요?”
“뭔데요?”
월령안이 물었다.
“시체요!”
육십이는 말을 마치고 분을 이기지 못한 듯 손을 내리쳤다.
“월 낭자, 그 거점의 지하에는 전부 어린애와 여인의 시체로 가득했어요. 무려 백여 구나 있었는데, 하나 같이 학대를 당해 죽었더라고요. 파낼 때, 다들 깜짝 놀랐다니까요! 야율제 그놈이 우리 주나라에서 끔찍한 짓을 얼마나 많이 저지른 걸까요! 정말이지 북요 병사를 하나라도 더 죽이지 못한 게 정말 후회돼요. 북요인은 죽어 마땅해요!”
“북요인은 죽어 마땅하죠.”
월령안은 눈을 감아 솟구치는 눈물을 감췄다.
그녀의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북요인의 칼끝에서 목숨을 잃었다.
백여 구의 시체라고 했다. 얼마나 많은 집안이 북요인 때문에 그녀의 집안처럼 풍비박산이 났을까?
“월 낭자,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장군님이 계시는 한, 북요인은 주나라에 한 발짝도 못 들어올 거예요.”
줄곧 눈치가 없던 육십이였지만, 월령안이 평소와 다른 것을 눈치챘다. 어색하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월령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전 대장군을 믿어요.”
과거가 떠오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게 아프고, 사무치게 한스러웠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이 감정에도 익숙해지고 무뎌졌다.
월령안은 크게 한숨을 들이쉬며 마음속의 슬픔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십이, 그 애들과 여인은 모두 북요인이 죽인 건가요? 야율제의 사사들은 잠한성이 몰래 키운 사람들 아닌가요? 그 사사들은 북요인이었어요?
“그 사사들은 우리 주나라 사람이었어요.”
줄곧 생각이 없던 육십이도 그 일을 떠올리자, 한숨을 금치 못했다.
“오작(仵作 - 검시관)이 부검한 결과, 아이들은 대다수 십여 년 전에 죽었어요. 아마도 잠한상이 사사로 키우려고 찾은 애들일 거예요. 혹독한 사사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죽은 것 같아요. 여인들은 대부분 반년 전에 죽었대요. 북요인들에게 겁탈을 당해서 죽은 거였어요.”
육십이는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울먹이며 말했다.
“월 낭자, 세상에 어쩜 이런 짐승 같은 놈들이 다 있을까요? 북요인이 우리 주나라 백성을 그렇게 많이 죽였는데 그걸 모르고…… 우리는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서 북요인이 주나라에 쳐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는데……. 정작 우리 나라 사람이 북요를 위해 우리 정보를 몰래 알아내고 있었어요. 전 정말 그놈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월령안이 말했다.
“사사들은 어려서부터 세뇌를 당해서 시비를 가리지 못해요. 혹독한 훈련을 거치다 보니 주인에게 충성하면서도 두려워해요. 그래서 배신할 엄두도 못 내죠. 이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에요. 잘못한 건 그들을 훈련해 북요인의 일을 돕게 한 사람이죠.”
잘못한 사람은 잠한성이었다.
무림에서의 지위가 얼마나 높았는지는 상관없다. 야율제가 이 사사들을 데리고 주나라를 대적할 것을 알았든지 몰랐든지 상관없다. 결과적으로 그는 북요를 도왔다. 잠한성 같은 사람은 죽어 마땅했다.
“월 낭자의 말이 맞아요. 잠한성 같은 인간쓰레기에게 추종자가 어쩜 그렇게 많을 수가 있죠?”
육십이는 잠한성의 이름이 나오자, 더 화가 치밀었다.
“월 낭자, 우리가 잠한성을 막 잡았을 때, 무림인들은 매일같이 장군부 밖에서 어슬렁거리며 그놈을 구해 내려고 꿍꿍이를 꾸미고 있었어요.
이런 인간쓰레기를 구해서 뭘 하려는 건지, 전 정말 모르겠어요. 야율제를 도와 우리 주나라를 대적하려는 건가요? 그 무림인들은 정말 무공을 익히느라 머리가 어떻게 돼서, 진실도 모르고 잘잘못도 제대로 못 가리는 걸까요? 게다가 수 맹주도…….”
“수 맹주가 왜요?”
월령안은 육십이의 넋두리를 잠자코 듣고 있다가, 적당한 때에 자신이 궁금해하는 일을 말하도록 유도했다.
“수 맹주 그 인간은요, 예전에는 정직해서 좋은 사람같이 느껴졌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됐나요?”
육십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실망한 표정이었다.
월령안은 잠시 기다렸지만, 육십이가 더는 말하지 않자 다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수 맹주가 뭘 했는데요?”
육십이는 월령안이 묻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묻자 바로 마음속의 말을 털어놓았다.
“수 맹주, 그 인간은 정말 생각할수록 화가 나요! 월 낭자, 수 맹주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요? 분명 야율제와 사사들의 은신처를 알고 있으면서, 우리에게 말해 주지도 않고 몰래 가서 야율제와 담판을 벌였어요.
우리 장군님이 대단하셔서 진작 지켜보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수 맹주는 야율제를 데리고 도망갔을지도 몰라요.”
육십이는 말을 마치자, 조금 득의양양해졌다.
“하지만 수 맹주든, 야율제든 우리 장군님의 손바닥을 벗어나지는 못할 거예요. 그래도 우리 장군님이 가장 대단하니까요.”
“그럼 여러분은 수 맹주를 따라가서 야율제를 찾은 거네요?”
월령안은 조금 전, 육십이가 말한 그 말들이 떠오르자 조금 우스워졌다.
그녀는 수 오라버니가 야율제와 공모했다는 육이의 말을 애초에 믿지 않았다.
“그런…… 셈이죠.”
육십이는 좀 어색해져 머리를 긁적였다.
어딘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이런 기분은 너무 찜찜했다.
월령안은 기회를 틈타서 물었다.
“수 맹주는 무슨 죄로 형부에 잡혀 들어간 거예요?”
그녀는 수횡천이 갇힌 뒤, 사람을 시켜 알아보았다. 그러나 수횡천은 중범이라 누구도 면회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나름 시도해 보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장군왕과 술 사업을 하기로 한 뒤, 이 일을 슬그머니 꺼내 보았다. 그러나 장군왕은 이 사건을 아예 모르고 있었다. 그녀 대신 알아봐 주겠다고는 했지만, 확신할 수 없다고 했다.
장군왕은 실권이 없는 종친이었다. 신분이 존귀했고, 평소 조정 관리가 그를 만날 때도 공손히 대하기는 했다. 하지만 정작 일을 처리할 때까지 장군왕의 체면을 봐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월령안도 장군왕의 난처함을 알았다. 그래서 알아봐 달라고만 부탁했을 뿐이다. 면회를 가는 일은 그녀가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