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오늘은 대체 무슨 날이지?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월령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육이에게 읍했다.
“저를 대신해 대장군의 선물에 감사드린다고 전해 주세요. 그리고 제가 이 선물을 아주 마음에 들어 한다는 말도 함께요.”
만약 수 오라버니를 가두지 않았다면, 더 마음에 들었으리라.
‘육장봉은 사람이 참 옹졸하군!’
“월 낭자,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장군께서 제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월 낭자께서 북요에서 짜 둔 판은 거둘 필요가 없습니다. 야율제의 대역이 도망쳤습니다. 이변이 없다면, 그놈이 야율제를 대신해 사절단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놈이 사자라는 신분으로 사절단에 있으면, 우리는 암살이라는 방법은 쓸 수 없습니다. 북요 조정의 힘을 빌려 그놈을 압박해서, 신분과 권리를 잃게 해야 합니다.”
진짜는 죽었다. 그 일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주나라에 갇혀 있다. 그 대역은 어느 정도 야율제를 대체할 수 있었다. 단지, 그 대역이 얼마나 큰 야심을 가졌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것은 월령안이 신경 쓸 게 아니었다. 진짜 야율제는 미치광이로, 월령안이 죽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대역은 그렇지 않았다. 주인을 대체할 기회가 어렵사리 생겼다. 대역이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으면, 더는 월령안을 대적하지 않을 것이다. 황금당의 사람들 손에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다.
‘황금당 녀석들은 이번에 성공하지 못하는 바람에 체면을 완전히 구겼군.’
육이는 황금당 사람들의 난감해하던 표정을 떠올리자,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말았다.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나무 상자를 닫는 동작으로, 입꼬리의 웃음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육이는 말을 이었다.
“월 낭자, 장군께서는 또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야율제의 죽음에 대해 다른 사람은 속일 수는 있지만, 청희 장공주는 절대 속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장군께서는 본인이 영녕후부를 막겠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청희 장공주는 이성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무슨 미친 짓을 할지 모르니 월 낭자께서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일깨워 줘서 고맙습니다. 꼭 조심할게요.”
월령안이 청희 장공주와 야율제의 관계를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부터 청희 장공주에 대한 판을 준비하면 늦지는 않을 것이다.
청희 장공주가 제아무리 날뛰어도, 신분만 있고 실권은 없는 여인일 뿐이었다. 소 승상보다 상대하기 훨씬 쉬웠다.
월령안에게 이미 생각이 있는 듯하자, 육이는 더 말하지 않았다. 손에 든 나무 상자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이 수급은 월 낭자께서 갖고 계시겠습니까?”
월령안은 고개를 저었다.
“수고스럽겠지만 육이 장군이 처리해 주세요.”
원수가 죽으면 그만이지, 그 머리를 수집하는 취미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육이가 대답하고 월령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월 낭자,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육이는 성큼성큼 떠나갔다. 월령안도 두어 걸음 나와서 배웅했다.
“야율제가 결국 육장봉의 손에 죽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네.”
월령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곧 화청을 나서서 정원으로 돌아왔다.
간단히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월령안은 노인의 뜰로 향했다.
노인이 잠들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바로 돌아가지 않고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노인의 침대 앞에 쪼그리고 앉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영감님, 영감님을 다치게 한 야율제가 죽었어요. 드디어 영감님의 복수를 했어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도 서둘러 떠나가지 않았다. 노인을 등지고 바닥에 주저앉아,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영감님, 야율제를 죽인 사람은 육장봉이에요.
제가 너무 무능한 걸까요? 그렇게 많은 황금을 내걸었는데도 야율제의 머리를 사지 못했어요. 그런데 육장봉은 손을 쓴 지 얼마 안 되어서 야율제의 수급을 보냈어요. 제가 너무 못난 것 같아요.
육이는 수 오라버니가 야율제와의 관계가 범상치 않다고 암시했어요. 심지어 야율제의 은신처까지 알고 있었다고 하네요. 이간질하는 줄 뻔히 알지만, 여전히 마음이 언짢아요.
말씀해 보세요. 저한테 문제가 있어서, 아무도 못 믿는 게 아닐까요? 분명 수 오라버니의 됨됨이를 알고 있고, 육이가 이간질하는 것도 알지만, 저는 여전히 마음이 편치 않아요.
영감님, 저는 늘…… 이 세상에서 영감님을 제외하면, 저를 진심으로 위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아요.”
월령안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어느새 흐른 눈물로 뺨이 축축했지만, 그녀는 쉬지 않고 중얼거렸다.
“영감님, 육장봉이 직접 야율제의 목을 벤 건 어째서일까요? 이렇게 하면 북요의 분노를 불러일으킨다는 걸 모르는 걸까요? 북요에서는 이를 빌미로 삼아 주나라에 따져 물을 게 뻔해요.
육장봉이 직접 야율제를 죽이면 그 자신에게는 이로울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했을까요?
저는 사람 마음이 너무나 복잡하다고 느껴져요. ……도무지 알 수가 없네요. 어떨 땐 제가 진짜 멍청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어요. 영감님, 저 너무 힘들어요. 영감님…….”
* * *
황궁의 난각.
육장봉의 보고를 들은 황제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다시 한번 말해 보아라! 짐이 방금 환청을 들은 것이 분명하구나!”
황제는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또 믿으려 하지도 않았다.
‘이건 너무 황당하지 않은가!’
“폐하, 환청이 아닙니다. 신이 야율제를 죽였습니다.”
육장봉은 산처럼 꿈쩍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다시 한번 반복했다.
“너…… 네가 미친 게로구나!”
황제는 한 차례 놀라고 나자 되려 평정심을 되찾았다.
“장봉아, 넌 이렇게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잖느냐. 야율제를 죽인 뒤에 어떻게 될지, 알고 말하는 것이냐?"
“알고 있습니다.”
북요의 남원대왕이 주나라에서, 육장봉의 손에 죽었다. 북요는 이를 꼬투리 잡을 게 분명했다. 심지어 양국 간의 전란이 발발할 수도 있었다.
설령 북요가 자제하고 출병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국가 협상의 자리에서 이 일을 패로 내세워 이득을 얻으려 할 것이다.
이런 것은 대외적인 문제였다. 대내적으로는 야율제가 없으면, 영녕후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워진다. 아니, 영원히 해결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알면서도 죽였다는 말이냐.”
황제는 씩씩거리며 육장봉을 노려보았다. 가까스로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짐에게 이유를 말해 봐라.”
사람은 이미 죽었다. 그러니 조정 대신과 북요에 해명을 해야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육장봉이 그에게 제대로 해명해야 했다.
야율제를 이용해 영녕후에게 타격을 입히려고 황제가 얼마나 많은 굴욕을 참았던가.
심지어 야율제 이 미친놈이 성안에 들어와 활개 치며 사람을 죽이고, 변경에 숨어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손을 쓰지 않았다.
황제는 이미 오랫동안 참고 있었다. 그런데 육장봉이 이렇게 죽여버리다니, 황제의 심정을 생각해 보기는 한 걸까.
“야율제는 아직 북요의 사절단에 있습니다.”
육장봉은 괜히 뜸을 들이지 않고 바로 말했다.
“야율제에게는 완벽한 대역이 있고, 그자는 살아 있습니다. 그의 죽음은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을 겁니다.”
“대역이라고?”
황제는 어리둥절해졌다.
“뭐라고 했느냐? 야율제에게 대역이 있다고?”
“네.”
육장봉은 대답만 하고, 쓸데없는 설명은 덧붙이지 않았다.
“아니, 대역이 있었다니? 어디서 온 것이냐? 북요에서는 모르고 있느냐?”
황제가 다급히 물었다.
육장봉은 사실대로 대답했다.
“북요에서는 모를 겁니다. 야율제의 대역은 청희 장공주가 준비해 준 사람으로, 줄곧 천명사에 숨어 있다가 오늘 처음으로 월령안을 죽이려고 나타났습니다. 또한, 잠한성은 야율제를 위해 많은 사람을 훈련했는데, 신이 부하들을 데리고 가서 일부분은 제거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잠한성이 숨겨 두었습니다. 잠한성의 고향에 가서 단서를 찾아보라고, 사람을 파견해 두었습니다.”
“북요가 모른다니 다행이군. 그러면 되었다!”
황제는 한시름을 놓았다.
북요에서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그들은 야율제가 죽지 않은 것으로 할 수 있었다. 그러면 북요에서도 야율제의 죽음을 빌미로 말썽을 일으킬 수도, 전쟁에서 얻지 못한 이익을 국가 협상에서 챙길 수도 없을 것이다.
주나라에서는 이 전쟁을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심지어 황제는 육장봉의 혼인마저 국익(國益)을 위해 이용했다. 만약 전쟁에서 이겼는데도 결국 북요에게 이익을 양보해야 한다면, 황제는 문관들에게 욕을 먹을 게 뻔했다. 육장봉도 편히 지내지는 못할 것이다.
문관들은 때때로 육장봉을 탄핵했다. 그가 잔혹하고,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데다가, 병권이 너무 커 제왕의 위엄을 위협한다는 이유였다.
만약 육장봉이 야율제를 죽인 사실이 알려지면, 문관들은 황제인 자신과 육장봉을 모두 죽이려 들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황제는 영녕후에 대해서는 이미 포기했다.
육장봉은 그 자리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제의 타협은 예상대로였다.
그는 황제를 알고 지낸 지 오래되었다. 황제의 됨됨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일단 날벼락부터 떨어트려야 한다. 최악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좋은 상황으로 흘러가게 이야기를 이끌면, 황제가 제아무리 노여워하더라도 태반은 가라앉힐 수 있었다.
황제는 결단력이 부족했다. 냉혹하지도, 강압적이지도 못했다. 그러나 너그럽고 포용력이 있었다.
신하로서 이런 제왕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잠한성, 그놈은 죽어 마땅하다!”
북요의 위기가 해결되자, 황제는 긴장을 풀었다.
오늘은 참 파란만장한 하루였다.
가장 먼저 등요 공주의 일 때문에 장군왕의 앞에서 완전히 체면을 구겼다. 하는 수 없이 이익을 양보하여 장군왕의 분노를 가라앉혀야 했다.
곧이어 진비와 소여방의 일이 터졌다.
어쩌면 다행스럽게 여겨야 할지도 몰랐다. 조계안이 사고를 치기는 했어도 선은 지켰다. 모두 알 정도로 일을 벌이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참으려고 해도 참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한 나라의 제왕이 되어 신하에게 여자를 뺏기다니. 이 일이 알려졌다가는 무슨 낯으로 조정의 대신을 마주하며, 제왕의 위엄을 어떻게 지킬 수 있겠는가.
육장봉은 황제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자를 아직 죽여서는 안 됩니다. 신은 그를 남겨 무림의 문파들을 끌어들일 것입니다.”
잠한성은 아주 좋은 미끼였다. 잠한성을 최대한 이용해먹지 못한다면, 수횡천을 희생시킨 보람이 없었다.
“네가 알아서 잘 처리해라. 도망가지 못하게 잘 지켜야 한다.”
잠한성의 무예가 얼마나 뛰어난지를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육장봉도 수횡천과 손을 잡고서야 잠한성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황제는 여전히 잠한성이 신경 쓰였다.
만약 그가 도망친다면, 황궁에 쳐들어와 암살을 감행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폐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은 그자를 산 채로 내보내지는 않을 겁니다.”
육장봉은 머리를 끄덕여 약속했다. 그리고 손을 올려 읍하면서 물러가겠다고 아뢰려다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물었다.
“폐하, 영녕후부에서 청희 장공주의 일로 간청하기 위해 입궁하지 않았습니까?”
“청희 장공주의 일로 간청해? 왜 간청한단 말이냐?”
황제는 깜짝 놀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육장봉은 미간을 찌푸렸다.
“신이 낮에 사람을 시켜 청희 장공주를 가두었습니다.”
“청희 장공주를 가두었다고? 청희 장공주가 너를 건드리더냐?”
황제는 또다시 두통을 느꼈다.
‘오늘은 대체 무슨 날이지? 어찌 한시도 편할 새가 없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