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248)화 (248/1,004)

248화 원수가 너무 많아

조계안의 말에, 황제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럼 네 방법이 좋다는 말이냐?”

지난 몇 년 동안 소 승상 일파와의 기 싸움에서, 겉으로는 황제가 우세를 점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지금까지도 그 무리를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는 어쩌면 조계안의 의견대로 해 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봉이가 돌아오면서 무장의 위신이 높아졌습니다. 황형은 장봉이를 키워 그들과 대적하게 할 수 있습니다. 고양의 대 유학자를 불러낸다면, 대 유학자가 이끄는 무리에서도 자신들이 중시된다고 느낄 겁니다. 때가 되면, 황형은 그 두 파가 서로 다투게 놔두면 됩니다.”

제왕으로서 직접 신하와 다투는 것은 대단히 격조 없는 짓이었다.

제왕이라면 높이 올라앉아 중재자 역할만 해야 했다. 제왕을 기쁘게 하는 쪽의 손을 들어주면 그만이었다.

마치 월령안이 하듯, 기쁘게 하면 상을 주고 서운하게 하면 엄벌해야 했다.

* * *

월령안은 연회에 참가한 사람들을 배웅했다. 자신도 산장에 오래 머물지 않고, 떠날 때 무 선생과 소갑도 함께 데리고 갔다.

떠나기 전에는 산장의 집사에게 분부했다. 월씨 가문의 하인을 잘 단속하되, 저녁에 무슨 소리를 듣더라도 나오지도, 묻지도 말라고 했다.

나머지 일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았다.

산장 사람들의 생사여부는 그녀가 아닌, 황제가 결정할 일이었다.

그녀가 몇몇 조정 대신에게서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황제는 슬기롭고 인자한 분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산장의 하인들에게는 생명의 위험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기어코 제 발로 뛰쳐나와 죽으려 한다면, 그때는 아무도 구해 줄 수가 없었다.

돌아가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그 길 위에 성으로 돌아가는 마차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월령안의 마차는 뒤처져 있었다. 앞에서 마차 줄이 막고 있어 속도를 전혀 낼 수가 없었다. 그저 뒤를 따라 천천히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 것 같자 월령안은 좌석 왼쪽에 있는 숨겨진 상자를 꺼내 열었다. 그 안에서 나무 인형과 조각도를 꺼냈다.

“원수가 너무 많아. 빨리 너를 끝마쳐야 다음 것을 새길 수 있는데.”

월령안은 손에 든 인형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목각 인형은 이미 완성되었다. 맨 마지막 손질만 남겨두고 있었다.

예전에는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아 줄곧 내버려 둔 채 조각하지 않았다. 지금은 마음속이 평온해져서 마차에 타고 있어도 조각도를 안정적으로 쥘 수 있었다.

그녀는 손에 쥔 조각도로 인형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마차는 천천히 움직였다. 마차 내부는 아주 안정적이었지만, 월령안의 손만큼 흔들림이 없지는 않았다.

필요 없는 부분을 조금씩 깎아냈다. 그녀의 손놀림을 따라 사람의 모습이 점차 드러났다.

인형의 두 눈이 완성되자 월령안이 누구를 조각했는지 드러났다. 야율제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인형이 바로 그를 조각한 것임을 알아볼 것이다.

그녀는 조각도를 내려놓더니, 상자 속에서 주사(朱沙 – 붉은 안료, 부적을 그릴 때 쓰기도 함)를 묻힌 붓을 꺼내 인형 등에 ‘야율제’라고 핏빛 글자를 커다랗게 써 놓았다. 이젠 정말로 못 알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하루라도 빨리 널 태워 버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 네가 죽지 않는 한, 난 하루도 편하게 지낼 수 없으니까.”

월령안은 손에 든 인형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 인형은 상자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른 손바닥만 한 나무토막을 꺼내어 계속 조각했다.

지금 그녀의 표정은 엄숙했고, 눈빛은 음산했다. 손놀림은 매우 교묘했지만, 나무를 파내는 손길마다 힘이 가득했다. 과감하면서도 깔끔한 칼질에는 살벌한 기운을 띠고 있었다.

그녀의 조각 솜씨는 능숙했다. 사각사각,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토막에서는 궁장을 차려입은 여인의 모습이 점차 드러났다. 어렴풋이 드러나는 인형의 옷차림새가 청희 장공주가 낮에 입었던 복장과 비슷했다..

조각은 섬세함이 필요한 작업이라, 단숨에 끝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녀의 솜씨가 아무리 능숙해도, 성문 앞에 갈 때까지 형태만 잡았을 뿐이다. 얼굴 부분도 희미한 윤곽만 드러나 있었다.

월령안도 무리하지 않았다. 인형을 뒤덮은 톱밥을 불어 버리고, 부드러운 천으로 싸서 상자에 도로 넣었다.

‘조급해하지 말자. 원수가 많으니까 하나하나 차근차근 처리해야지.’

청주에 가기 전까지 이 일을 모두 해결한다면, 나중에 다시 변경으로 돌아왔을 때 남의 손에 당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나무 상자를 제자리에 놓았다. 그다음 손뼉을 쳐서 마부를 부르더니 분부했다.

“장군왕부로 가자.”

“예, 아가씨.”

마부는 채찍을 휘두르던 손을 잠깐 멈칫했지만, 곧 대답했다.

다그닥 다그닥…….

마차는 앞으로 달려나갔다. 속도는 빠르지도, 늦지도 않았다.

* * *

길가의 다루.

유경장은 창문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한쪽 발은 창턱에 얹어 놓아 술 주전자를 든 손을 받치고 있었다. 다른 한쪽 발은 창문 밖으로 드리웠다.

푸른 유포를 씌워 평범해 보이는 월씨 가문의 마차가 눈앞에서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끝내 눈을 감았다.

그도 온 하늘을 장식한 불꽃과 하늘로 날아오르는 공명등을 보았다. 불꽃도, 공명등도 모두 아름다웠지만, 안타깝게도 찰나의 아름다움일 뿐이다.

“유 공자, 잘 생각해 보셨습니까?”

갑자기 부드럽고 맑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때 월씨 가문의 마차는 이미 큰길을 지나간 뒤였다. 유경장은 눈길을 거두고 고개를 돌려 방 안에 앉아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른하고 제멋대로인 표정으로 말했다.

“거절하겠소.”

“저희가 낸 패가 공자의 마음을 움직일 만큼 충분하지 않았나요?”

여인은 고개를 들어 아름다운 얼굴을 드러내었다. 눈꺼풀이 가볍게 열렸다. 기다란 속눈썹도 따라서 떨리는 모습이 마치 나비의 날갯짓 같았다.

뭇 사내들이 한 번 보기만 해도 마음을 빼앗길 만한 미인이었다.

“그대 주인은 나를 너무 우습게 보는군. 나 유경장에게 미인이 모자랄 것 같소?”

유경장은 술 주전자를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코웃음을 쳤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절세가인은 화를 내지 않았다. 앞에 놓인 찻잔을 들고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

“남자가 평생 추구하는 게 권세와 미인 말고, 뭐가 더 있습니까. 유 공자께 미인이 모자라지 않으시다니, 그러면 권세는요?”

"공명과 이익은 뜬구름에 지나지 않소. 낭자가 삼 년 전, 아니, 일 년 전에만 나를 찾아왔다면, 마음이 움직였을지 모르오. 하지만 지금은…….”

유경장은 가볍게 피식 웃더니 창턱에서 내려왔다. 손에 들고 있던 술 주전자를 여인 앞에 탁 내려놓더니,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나지막하지만 침착하게 말했다.

“나는 지금, 내가 사랑하는 아가씨를 기다려야 하오.”

유경장의 눈은 매우 맑았다. 그 눈 속에 은근하고 깊은 정이 넘쳐흘렀다. 그는 사람을 볼 때면, 마치 눈앞의 사람이 그의 전부처럼 느껴지도록, 깊은 정이 실린 눈빛으로 집중하며 바라보고는 했다.

아름다운 여인은 유경장의 준수하고 출중한 얼굴, 애틋한 눈빛을 보았다. 저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유경장은 호탕하게 웃더니 깔끔하게 떠나갔다.

화류가 골목에 단청 병풍을 두른 집이 있지(烟花巷陌, 依約丹靑屛障).

마음에 둔 이가 그곳에 있어 찾아갈 만하다네(幸有意中人, 堪尋訪).

그들과 벗하며 앉아 풍류를 즐기는 게 내 평생 가장 큰 기쁨일세(且恁偎紅倚翠, 風流事, 平生暢).

청춘도 잠깐이거늘, 뜬구름 같은 공명은 한 잔 술과 귓가의 노래와 바꾸리라靑春都一餉, 忍把浮名, 換了淺斟低唱).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얼굴에도 아무 표정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저 찻잔을 쥔 섬섬옥수가 파르르 떨렸을 뿐이다.

“……뜬구름 같은 공명, 수중의 한잔 술, 귓가의 노래와 바꾸리라.”

멀리서도 유경장의 활달하고 자유분방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풍류재자 유경장, 역시 명성 그대로군.’

여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말했다.

“주인께 전해 주십시오. 임무에 실패했습니다.”

“주인께서는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신다.”

텅 빈 별실이었지만, 어디선가 나지막하고 괴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보셨겠지요. 저자에게는 미인계가 소용없습니다. 월령안을 기다리기 위해 권세와 공명도 마다하는데, 제가 또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다른 사람에게 손을 써라.”

괴상하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그 목소리에는 아무 감정 없이, 냉담함만 가득했다.

“월령안은 경계심이 매우 강합니다. 접근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심민은 괜찮겠습니까?”

여인은 고개를 돌려 병풍 뒤를 바라보았다.

“된다. 네게 좋은 신분을 마련해 줄 테니 심민에게 접근하도록 해라.”

병풍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지막하고 괴상한 목소리는 병풍 뒤에서 들려온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여인은 병풍 뒤쪽을 향해 머리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만 꼭 성공한다고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주인께서는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신다.”

낮고 괴이한 목소리가 또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음산하고 차가운 살의를 띠고 있었다.

여인은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는 감정의 기복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주인을 위해 오랫동안 일을 해왔다. 임무가 실패하는 바람에 비참하게 죽은 사람을 수도 없이 보았다.

그녀는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 * *

월령안이 장군왕부에 도착하자마자, 하인이 당장 안으로 안내했다. 앉은 자리가 데워지기도 전이었는데 장군왕 세자가 나왔다. 일각도 기다리지 않게 한걸 보니 귀빈으로 대접해 준 셈이었다.

“월령안, 어떻게 왔느냐? 명월산장에 무슨 일이 생겼느냐?”

장군왕 세자의 표정은 풀이 죽어 있었다. 다소 난감해하는 기색도 엿보였다. 그러나 월령안을 보자, 애써 친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찌 되었든 간에, 낮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서는 월령안에게 감사해야 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어떤 꼴을 당했을지 모른다.

“명월산장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는 등요 공주의 일을 어떻게 처리하셨는지 여쭤보려고 왔어요. 그런데 보아하니 여쭤볼 필요는 없겠군요.”

등요 공주가 저지른 잘못은 황실이 덮었으리라는 것쯤은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등요 공주가 월령안과 장군왕 세자를 납치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두 사람 다 무사했다. 황실의 관례대로, 이런 종류의 일은 큰 것은 작게, 작은 것은 없는 걸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조홍후의 표정을 보아하니 역시 예상대로인 듯했다.

“등요는 황궁에서 데려갔어. 황궁에서 나온 사람이 아버지께 말하길, 등요가 나쁜 사람에게 꼬드김을 당해서 바보짓을 한 거라고 하더군. 그리고 나더러는 등요가 아직 어리니까 진심으로 따지지 말라고 하더구나. 그다음 황제 폐하께서 아버지께 종령(宗令)이라는 직급을 내려 주는 것으로 일이 마무리되었다.”

장군왕 세자는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말했다.

“그만하면 아주 괜찮은 결과예요.”

월령안이 조홍후를 달랬다.

“뭐가 괜찮단 말이냐.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그리고 내가 다쳤는데, 그냥 넘어가야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장군왕 세자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월령안을 노려보았다.

‘월령안은 도대체 누구를 편드는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