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244)화 (244/1,004)

244화 조 대인이 점찍은 여인

궁녀가 조 대인이 공중 검무를 선택했다고 읊은 순간, 아가씨들이 수군거린 것과는 달리, 자리에 있던 공자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서로 옆에 있는 사람을 둘러보았다. 모두 아는 얼굴뿐, 황족은 없음을 확인하고 찍소리도 내지 않았다. 하나같이 표정을 엄숙히 하고 자세를 바르게 하더니 감히 웃고 떠들지 못했다. 더욱이 월령안에 대해서는 입에 올리지도 못했다.

‘다른 사정이 있는 게 아니라면, 이 조 대인은 아마도…….’

‘그분’이 점찍은 여인이었다. 심지어 신분을 드러내면서까지 그녀에게 화전을 던졌다. 그들이 아무리 간이 크더라도 꿈도 꿀 수 없게 되었다.

‘어쩐지, 육 대장군이 입성하기도 전에 사람을 시켜 이혼장부터 보내더라니.’

‘전에는 육 대장군이 공주를 맞아들이려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조 대인’을 위해 양보해 준 거였군.’

물론, 이런 말은 마음속으로만 했을 뿐, 누구도 입 밖으로 낼 엄두를 못 냈다.

월령안은 이미 사람들 뒤쪽으로 물러나 있었다. ‘조 대인’이라는 세 글자를 듣고도 그냥 미소를 지었을 뿐이다.

하지만 아가씨들의 귓속말을 듣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어쩔 수 없이 쓴웃음만 지었다.

‘아가씨들의 상상력이란 참…….’

‘조 대인’이 분별없이 제멋대로 군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어찌 보면 그녀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천자의 눈에 들었다는 소문이 있으면, 그녀는 더욱 안전해진다. 앞으로 변경에서 일할 때도 손발이 묶이지 않을 것이다.

“월 낭자, 이건 조 대인이 보낸 첫 번째 선물입니다.”

사람들 뒤로 물러선 월령안의 귀에 최일의 옅은 웃음이 섞인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 대인.”

이번에는 월령안도 민첩하게 반응했다. 몸을 돌려 최일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누가 봐도 무성의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최일은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지 못한 척, 부드럽게 말했다.

“두 번째 선물도 있는데, 월 낭자께서 직접 가서 보시겠습니까?”

“소여방, 아니면 소함연과 관련 있나요?”

월령안은 진작에 소씨 남매가 보이지 않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최일을 고개를 저었다.

“거기까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저는 조 대인을 도와 월 낭자에게 알려 주는 것만 책임졌을 뿐, 다른 건 모릅니다. 끼어들지도 않을 거고요.”

하지만 최일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조계안은 언제나 제멋대로 행동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번에 소여방은 죽지는 않더라도 된통 당할 게 뻔했다. 심지어 소씨 가문 전체가 연루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람?’

그는 불 난 집에 부채질하지도, 그렇다고 불을 끄려 하지도 않을 거다. 그는 그냥 구경꾼에 불과했다.

최일의 부드럽고 침착한 얼굴에는 줄곧 우호적이면서도 친절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어찌 보아도 군자다운, 단정하고 정직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월령안에게는 위험하게만 느껴졌다.

그녀는 경계하듯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반면 얼굴의 미소는 점점 더 화사해졌다.

“최 대인, 제가 가서 봤으면 하시나요?”

“월 낭자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최일이 되물었다.

월령안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대답했다.

“아니요.”

호기심을 가질 엄두가 안 났다. 조계안은 미치광이였다. 황제에게도 오명을 씌우는 사람인데, 그가 못 할 짓이 어디 있겠는가.

“아쉽네요.”

최일은 웃으며 말했다. 말과는 달리 전혀 안타깝지 않아 보였다.

‘이 사람은 조계안과 비슷한 부류야. 다루기가 힘든 사람이군.’

월령안은 그와 깊게 사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곧 예를 올렸다.

“최 대인, 실례하겠습니다.”

최일은 멍해졌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월 낭자, 편한 대로 하세요.”

‘월령안은 나를 아주 괴물 취급을 하는군?’

아까는 그나마 핑계라도 대더니, 이제는 둘러대는 말 한마디도 없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실례합니다’라는 말로 대답했다.

‘이렇게 할 정도로 내가 싫은가?’

그가 허락하자마자 월령안은 그를 바로 무시했다. 바로 몸을 돌려 사람들 속으로 걸어갔다.

이제 곧 큰일이 터질 것이다. 그녀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있어야 그나마 안전할 수 있었다. 또한, 최일이 달라붙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더는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내 얼굴이 못생겨졌나?”

월령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최일을 저도 모르게 얼굴을 매만졌다.

그녀는 아가씨들 틈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를 피하느라 다시 그녀들 사이로 돌아가 버렸다.

‘내가 그 정도로 미움을 샀나? 아니야. 조계안 때문에 점수를 잃은 게 분명해.’

“조 대인, 앞으로는 조 대인을 좀 멀리해야겠습니다. 남들에게 제가 당신하고 한통속이 되어 나쁜 짓만 하고 다닌다고 오해받잖습니까. 괜히 내 고결한 명성만 더럽히게 되었군요.”

최일이 조 대인과 ‘선을 긋기’도 전에, 아가씨들의 기쁨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올해 화신이 결정됐어!”

“우리 월 언니야!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월 언니가 꼭 화신이 될 줄 알았어. 월 언니 같은 인재가 화신이 못 되면 뭔가 잘못된 거라니까.”

“월 낭자로군! 과연 월 낭자가 되었구나. 오늘 공후곡인 <화접>이나 <연심(蓮心)>, <동자기우(童子騎牛)> 같은 훌륭한 그림이 나왔지만 모두 월 낭자의 공중 검무만큼 놀랍지 않았어. 걸음마다 꽃이 피면서 공중에서 춤추던 모습은 꼭 구천현녀(九天玄女 – 중국 신화에 나오는 여신의 이름)가 인간 세상에 내려온 거 같았지 뭔가.”

“그게 뭐라고. 가장 놀라운 건 교묘한 구상이야. 난 처음에 육 대장군이 월 낭자를 위해 준비한 줄 알았어. 그런데 월 낭자가 직접 준비한 거라지 않나. 월 낭자는 육 장군과 함께 춤추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던 듯하네. 육 장군은 월 낭자의 덕을 보고, 월 낭자에게 갈 시선을 빼앗았던 거야.”

개표가 끝나고, 궁녀가 올해의 화신이 월령안이라고 선포했다. 많은 이가 손뼉을 치며 축하할 때였다.

갑자기 옆뜰 쪽에서 외마디 비명이 들려왔다.

“아악!”

“소 공자!”

“진비(臻妃)!”

최일이 예상했던 대로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궁녀의 어쩔 바를 몰라 하는 비명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 두 번의 호명 뒤에는 곧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두 마디 이후로 좌중은 침묵에 휩싸였다.

소여방과 황제의 진비라니, 그 두 사람이 함께 불릴 일이 무엇일지 사람들은 바쁘게 생각했다.

“큰일 났구나!”

소함연은 옷을 갈아입고 궁녀를 겨우 따돌린 다음 정원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그런데 오라버니를 찾기도 전에 궁녀의 비명이 들려왔다.

그 순간, 소함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몸이 휘청거리며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는 아둔한 사람이 아니었다. 궁녀의 그 두 마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월령안, 죽여 버릴 거야!”

소함연은 분노에 차 기어 일어나더니, 갑자기 월령안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미처 월령안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그녀를 따라다니며 시중들던 궁녀에게 가로막혔다.

“소 낭자, 함부로 행동하지 마세요.”

“월령안, 네가 오라버니에게 해코지를 한 거지! 우리 오라버니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소함연은 궁녀에게 잡히자, 달갑지 않아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나 옴짝달싹할 수 없자, 분노에 차서 고함을 질렀다.

그녀의 분노 중 삼 할은 진심이고, 칠 할은 연기였다. 큰 소리로 월령안을 부른 것은 덤터기를 씌우기 위해서였다. 소여방이 월령안의 계략에 당한 것처럼 보이도록 하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모두는 그 고함을 듣고 놀라 소함연의 의도와는 다른 것을 물어보았다.

“소 낭자, 그럼 저 소 공자가 당신의 오라버니인가요?”

“그럼 조 대인이 진짜 ‘그분’이신 거야?”

“어머나! 소여방, 소 공자가 그럼 진…….”

누군가 반쯤 말했을 때야 정신을 차리고, 가까스로 뒷말을 꿀꺽 삼켰다.

“아니, 아니…….”

소함연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굴빛이 순식간에 백지장같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연신 고개를 저으며 해명하려 했다.

월령안은 그녀의 말문을 막아 버렸다.

“소 낭자가 더위를 먹은 모양이군요. 머리가 멍해져서 그런지 허튼소리를 하네요. 오늘은 춘일연인데 여러분의 흥을 깨면 안 되죠. 너희가 소 낭자를 모셔가서 쉬시게 해라.”

“월령안, 너…….”

소함연은 당연히 순순히 따르려 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이 일에 끌어들여 함께 죽을 셈이었다.

월령안은 그녀에게 말할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다. 옆에 놓인 물 주전자를 들어 소함연에게 던졌다.

쨍그랑!

물 주전자는 소함연의 이마에 명중했다. 동시에 월령안의 손에서 투명하고 가느다란 침이 날아가더니 소함연의 미간을 파고들었다.

“너……!”

소함연은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곧 기절했다.

“어머, 미안해라. 손이 미끄러졌네요.”

월령안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손을 툭툭 털었다. 여전히 옅은 미소를 지은 채 궁녀에게 말했다.

“아까 누가 떡을 먹고 싶다고 하던 거 같더구나. 너희도 그렇게 들었느냐?”

“네, 네.”

궁녀는 놀라서 멍한 채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녀들도 이런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게 가장 좋았다.

“그럼 멍하니 뭐 하고 있느냐. 어서 떡을 가져오도록 하여라.”

월령안의 얼굴에 미소가 좀 더 짙어졌다.

사실 궁녀의 비명을 듣는 순간, 그녀도 깜짝 놀랐다. 조계안이 이렇게 크게 일을 벌일 줄은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었다.

‘소여방과 진비라니!’

소여방을 매장해 버리려고 조계안이 이런 일까지 저지를 줄 몰랐다. 소여방이 황제의 여인과 잠자리를 하게 해, 황제의 체면에 먹칠을 하다니.

‘조계안은 정말 미친 게 분명해.’

게다가 이 사건 때문에 사람들은 그 신비한 ‘조 대인’이 바로 천자라고 확신하게 될 것이다.

천자가 여기에 있으니, 진비가 여기에 있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황제와 관련된 일을 감히 확인하지 못했다. 다들 속으로 추측만 할 뿐이었다.

이런 일이 터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곤란했다. 여기서 일이 더 커졌다가는 감당할 수 없었다.

황실의 체면은 대단히 중요했다. 머릿수가 많으면 법으로도 다스릴 수 없다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누군가 이 일을 입에 올리면 작든 크든 황실의 위협을 받을 것이다.

월령안은 여기 있는 모두가 이 일을 없던 일처럼 넘어가는 데 협조하리라 믿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띤 채 대답을 기다렸다.

유명미의 얼굴빛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옷도 식은땀에 흠뻑 젖었다. 온몸에 힘이 쫙 빠져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그러나 월령안의 말을 듣는 순간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녀는 월령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가장 먼저 맞장구를 쳤다.

“령안, 또 뭔가 숨겨 두었군요. 우리가 말하지 않으면 내놓지 않으려고 했죠? 궁금해요. 빨리 보여 주세요!”

대숲 저편에 있던 공자들도 바로 정신을 차렸다.

한순간 하나같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즐겁게 말했다.

“간식만 먹어서는 안 되죠. 월 낭자, 올해의 화신이 되셨잖아요. 이렇게 쩨쩨하게 굴면 안 됩니다. 저희가 월 낭자를 화신으로 뽑았으니 따져 보면 저희도 낭자를 기쁘게 한 겁니다. 금산이나 은산 같은 것까진 바라지 않습니다. 아까 공중 검무에서 낭자가 머문 곳마다 피어났던 그 꽃을 저희도 몇 송이 주면 안 되겠습니까?”

“그렇지, 그게 좋겠습니다. 그 꽃들이 정말 정교했어요. 진짜보다 더 진짜 같더군요. 어머니께서 아주 좋아하실 겁니다. 화신 낭자, 인색하게 구시면 안 됩니다.”

“월 언니, 우리도 줘요. 우리도 갖고 싶어요.”

아가씨들도 정신을 차리고 떠들어 댔다.

그들은 반드시 아무것도 모르는 척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황실의 추문을 알게 되었다는 이유로 끝장날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