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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243)화 (243/1,004)

243화 화신 투표

춘일연은 고상한 연회였다. 화신 선발은 기루에서 화괴를 뽑는 것처럼 여러 규수의 이름을 위에 쓰고 사람들이 꽃을 던지게 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천박하게 여겼다.

춘일연에서 화신을 뽑을 때 쓰는 꽃은 화전(花箋)이라 불렀는데, 종이를 꽃 모양으로 납작하게 만든 것이었다. 공자들은 춘일연에 입장할 때 한 사람당 하나씩의 화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춘일연이 절반 이상 진행된 다음에는 화전에다가 아가씨들이 연회에서 보여 주었던 장기를 쓰면 되었다.

그렇다. 춘일연에서 화신을 뽑을 때는 규수들의 이름을 직접 쓰지 않았다. 그저 그녀들이 연회에서 보여준 장기 이름을 적었을 뿐이다. 이렇게 하면 실례가 되지 않을뿐더러, 우아해 보이기도 했다.

규수의 이름은 남에게 함부로 알려 주는 것이 아니었다. 여기 참석한 아가씨들은 모두 신분이 고귀했다. 그러니 이름을 걸어 놓고 남들이 사사로이 평가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춘일연에서 화신이 되려면 반드시 독특한 장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 생겼다.

“검무! 역시 월 낭자의 공중 검무가 제일 기억에 남는군.”

공자들은 하나둘씩 본인의 화전에 무언가를 적어넣었다.

월령안이 아가씨들과 함께 걸어갔을 때, 미혼 공자 대부분은 벌써 자신의 화전을 낸 뒤였다.

소년들이 화전을 내면, 황궁에서 나온 궁녀들은 높은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표를 기록했다.

“정성(程星) 공자, 공중 검무.”

“제연(齊延) 공자, 공중 검무.”

“연청(宴淸) 공자, 공중 검무.”

“우독(于督) 공자, 공후곡 <화접(化蝶)>.”

“요도(姚度) 공자, 그림 <화중선(花中仙)>.”

궁녀들은 화전을 보며 높은 소리로 읽었다. 귀를 기울여 보면, 열 명 중 적어도 다섯 명은 월령안의 공중 검무를 선택한 걸 알 수 있었다.

월령안에게 화전을 준 사람은 무장 가문의 공자가 아니면 서생들이었다. 문관 가문의 공자들은 각자 취향이 달랐다. 그래도 다들 장기 자랑을 한 낭자를 선택했다.

그런데 유독 눈에 띄는 화전이 있었다.

“육 장군, 등, 등요 공주를…… 뽑았습니다.”

육 장군의 화전을 든 궁녀는 너무 당황해서 제대로 읽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뭐? 등요 공주를 뽑았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

모두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서로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옆의 사람을 쳐다보았다.

“등요 공주를 뽑았다고? 이렇게도 뽑을 수 있는 거였어? 등요 공주의 장기는 어, 어엄…… 괜찮지, 괜찮고말고.”

“육 장군께서 등요 공주를 뽑았다고? 저기, 육 장군…… 어, 육 장군은 어디 계시지?”

“아니, 육 장군이 왜 자리에 없지?”

“대장군은 어디 간 거야?”

사람들은 그제야 육 대장군이 자리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가 자리에 없었던 덕분에 감히 수군거릴 수 있었다.

그때 유명미가 나서서 말했다.

“됐어요. 춘일연에서 꼭 장기 자랑을 해야 한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육 장군이 등요 공주를 뽑은 게 뭐 어때서요? 제 생각에는 아주 좋은데요. 꼭 장기가 가장 뛰어난 사람이 화신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무도 하지 않았잖아요.

등요 공주께서는 오늘 남다른 풍모를 보이셨잖아요? 육 장군께서는 탁월한 안목을 가지고 계시니 아마 미담으로 전해지겠죠. 제 손에 화전이 있었으면, 저도 공주 마마를 뽑았을 거예요.”

유명미는 과연 누가 등요 공주를 뽑을지, 반나절이나 눈에 불을 켜고 기다렸다. 그런데 그 주인공이 뜻밖에도 육장봉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육 대장군에 대한 그녀의 호감도는 완전 바닥을 치다 못해 땅 밑으로 파고들어 갔다.

‘당당한 대장군이 참 역겹구나.’

유명미가 비웃음이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다른 아가씨들도 정신을 차리더니, 너도나도 맞장구를 쳤다.

“유 낭자 말이 맞네요. 육 장군께서 탁월한 안목이 있어서 공주를 선택한 것이 분명해요.”

“어쩐지 육 장군이 변경에 들어서기도 전에 이혼하려고 서두른다 싶더니. 알고 보니…….”

“월 낭자, 정말 딱하네요.”

“월 언니, 슬퍼하지 마세요. 제가 오라버니께 다 얘기했어요. 화신은 언니만 뽑아야 한다고요.”

“월 언니, 우리가 있잖아요. 우리가 함께 있어 줄게요.”

“네.”

월령안은 가볍게 대답했다. 그리고 적당히 서글프면서도 굳센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육장봉의 화전은 분명 그가 쓴 게 아니었다. 그러나 누가 육장봉을 골탕 먹이려고 했는지는 상관없이, 그녀는 마냥 기뻤다. 그리고 상처 입은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대수롭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언제나 약자를 동정하는 법. 특히 정의로우면서도 순진한 아가씨들은 더했다.

그녀는 오늘 너무 시선을 끌었다. 적당히 남에게 동정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사람들 무리에서 떨어져 있던 최일은 양손으로 뒷짐을 지고 있었다. 여러 사람의 입에 발린 평가를 듣고 있으려니 얼굴의 미소가 점점 더 환해졌다.

원래는 성공하지 못할 줄 알았었다. 그러나 예상외로, 결정적인 순간에 육장봉이 가 버렸다.

하늘이 준 기회였다. 이걸 놓쳤다가는 조 대인을 볼 낯이 없을 것이다.

그는 그림을 두 장밖에 그리지 않았다. 하나는 자기 소장용이었고, 다른 하나는 방금 월령안에게 선물했다. 그 바람에 조계안에게 줄 그림이 없었다.

그림이 없으니, 다른 일은 조 대인의 소원대로 해 줘야만 했다.

* * *

육 대장군이 자리에 없는 등요 공주를 뽑은 사건은, 화신 선발 과정에서 벌어진 소소한 소동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당사자인 등요 공주나 육 대장군 둘 다 자리에 없었다. 모두가 한참 떠들기는 했지만, 곧 화제가 바뀌었다.

화신 선발은 계속 진행되었다. 육장봉의 선택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서생들은 더 순수한 마음으로 투표를 했다. 원래는 이 기회를 틈타 황실 또는 다른 세도가들에게 좋은 인상을 얻으려고 생각했었지만, 육장봉이 등요 공주를 뽑은 걸 알자 포기한 것이다.

기개가 있는 서생으로서, 육장봉처럼 아첨을 일삼는 자와 똑같은 짓을 할 수는 없었다.

화신 투표는 여전히 진행되고 있었다. 육장봉에게 자극받은 탓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이 있는지는 몰라도, 월령안을 뽑는 화전이 점점 많아졌다. 열 명 가운데서 네 사람은 월령안의 공중 검무를 선택했다.

그 외에는 열 명 가운데서 한두 명이 전 낭자의 공후 곡을 뽑았다. 다른 사람은 더욱 적었다. 아주 가끔, 다른 낭자를 선택한 사람이 있었지만, 수십 명 중 하나였을 뿐이다.

하지만 낭자들은 자신의 득표가 적은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친한 사람이 자기한테 화전을 던진 걸 알게 되면, 그 자리에서 핀잔을 주었다.

전 낭자도 사촌 오라버니가 자신에게 화전을 던지자 바로 한마디 했다.

“어쩐지 아버지께서 사촌 오라버니는 글을 맹목적으로 읽는다고 하시더라니. 역시 맞는 말씀이었어요. 안목이라고는 전혀 없네요.”

정 낭자는 더 솔직했다. 궁녀가 그녀의 두 오라버니가 그녀에게 화전을 던졌다고 큰 소리로 읊자, 금세 얼굴을 감싸고 말했다.

“제 오라버니들은 아무래도 시집보내지 못할 것 같네요.”

“시집보낸다고?”

“시집을 보내?”

아가씨들은 정 낭자의 말을 듣고, 웃다가 까무러칠 뻔했다. 모두가 ‘시집’이라는 단어를 강조하자, 정 낭자는 그제야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닫고서는 한참 동안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지만 모두가 떠들며 놀리자, 그녀는 자포자기한 듯 넉살을 피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시집보내려고요! 안목이 저것밖에 안 되는데 누가 제 오라버니들에게 시집오겠어요? 시집보낼 수만 있어도 감지덕지죠.”

정 낭자의 자조적인 말에 모두는 한참 동안 웃고 떠들었다. 정씨 가문 두 공자는 이런 말을 듣고도 마냥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누이동생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기만 했을 뿐, 전혀 화내지 않았다. 자리에 있던 아가씨들은 그것이 부럽기만 했다.

그녀들에게도 오라버니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정 낭자의 오라버니들처럼 누이동생을 총애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가씨 몇몇은 저도 몰래 정씨 가문의 두 공자를 가늠해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 둘이 저토록 누이동생을 아끼니, 혼인한 뒤에는 아내도 저렇게 아끼지 않을까?’

그녀들도 들은 바가 있었다. 정 장군은 아내를 목숨처럼 아끼고, 부부간 금실이 좋다고 했다. 첩을 두기는커녕, 기루에 출입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변경에는 풍류가 성행했다. 수도의 고관과 귀인들은 기녀를 부르는 것을 고상한 일로 여겼다. 사내 중에는 기루에 다니지 않는 이가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정 장군은 세속에 물들지 않고 몸가짐을 바르게 했다. 자연히 변경의 많은 부인이 정 부인을 부러워했다.

지금 적지 않은 아가씨가 눈빛을 반짝이며 정씨 가문의 두 공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곧이어 기회를 틈타 정 낭자의 곁으로 다가가더니, 그녀를 언니, 동생하며 불렀다. 또 얼굴을 붉히면서 정씨 가문 두 공자의 상황에 대해 떠보기 시작했다.

월령안은 한쪽에 서서 정 낭자를 바라보았다.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인 정 낭자는 기쁜 나머지 눈에서 빛을 내며 뺨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나이가 어려서 걱정이라는 걸 모르니, 정말 좋구나.’

그녀는 몰래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이때 마침 궁녀가 화전을 읽었다.

“최일 공자, 공중 검무.”

“조 대인, 공중 검무.”

“최 공자도 공중 검무를 선택했구나! 내 이럴 줄 알았지. 안목이 있는 사람이면 모두 월 언니를 선택할 거야.”

최일의 명성은 변경에서도 드높았다. 하지만 그의 명성은 유경장의 명성과는 다른 종류였다. 유경장의 명성이 누구나 다 아는 대중적인 것이라면, 최일의 명성은 저 위에 높이 떠 있어 고상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설령 최일의 이름을 알고 있더라도 쉽게 입에 올리지 못할 정도였다.

최일의 이름을 아무 데나 가져다 대는 것은 그에 대한 모독이었다.

“그런데 조 대인은 누구야? 왜 관직만 있고 이름은 없지?”

“올해 어느 조 대인을 초청했지? 내 기억으로는 조씨 성을 가진 대인은 없었는데. 올해 조씨 성을 가진 참가자는 장군왕 세자 전하뿐이잖아. 그분은 아직 관직이 없어.”

“혹시 추밀원의 그분이 아닐까?”

“아닐 거예요. 그분은 안 왔어요. 왔다고 하더라도 신분을 숨길 필요는 없잖아요.”

“조씨는 국성(國姓 – 황족의 성씨)이잖아요. 아마 황족 중 한 분이신데, 남에게 신분을 알리고 싶지 않으신 모양이로군요. 이젠 그만하죠.”

“황족 중 어떤 분일까요? 어찌 대인이란 호칭으로…….”

“그만 해요!”

상대적으로 나이가 좀 있는 아가씨가, 말하는 사람을 잡아당긴 다음 하늘을 가리켰다.

그 아가씨는 순간 깜짝 놀라 눈도 깜빡하지 못했다.

“아니, 그건 아니겠죠?”

“그분을 제외하면, 어떤 분이 신분을 숨길 필요가 있겠어요?”

나이 든 아가씨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럼…… 누가 감히 월 언니를 맞아들일 수 있겠어요?”

아가씨는 안타까워했다.

“난 우리 오라버니더러 구혼하라고 하려 했는데. 우리 오라버니는 문무(文武)로는 다 안 되지만, 얼굴은 잘생겼거든요. 월 언니를 맞아들이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만 말해요. 월 낭자는 그분이 점찍었잖아요. 앞으로 이런 말은 하지 말아요.”

나이 든 아가씨가 긴장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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