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당신이 정말 존경스럽네요
황금당은 사람을 죽이는 장사를 하는 곳이었다. 자연히 그들이 양성해 낸 살수는 세도가에서 양성해 낸 사사보다 더 강했다.
노인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원래 재능을 타고난 최상급의 사사를 제외하면, 황실에서 양성해 낸 사사의 실력은 황금당 살수의 실력과 엇비슷하다고 했다.
월령안이 자신에게 묻는 것이 아님을 알았기에, 회색 옷차림의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가 또 말했다.
“월 낭자, 육 대장군께서 말을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장군께서는 부하들을 데리고 천명사에 가니 낭자도 조심하라고 말입니다. 만약 일찍 성안으로 돌아가게 되면, 관아에서 부르더라도 절대 가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장군께서 돌아와서 처리하신다고 했습니다.”
“천명사라고?”
‘야율제를 구하러 온 사사들이 천명사와 관련이 있는 건가?’
월령안이 재빨리 물었다.
“천명사의 주지는 누구인가요? 천명사에 어떤 특별한 사람이 자주 다니나요?”
“육 대장군 말로는, 잠 맹주가 수 맹주에게 천명사 뒷산에 있는 부모의 무덤을 이장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했습니다.”
그의 평온한 목소리에는 아무 기복도 없었다.
그 말을 들은 월령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알겠어요. 이 일은 당신들을 탓할 게 아니군요.”
잠한성은 청희 장공주에게 그야말로 지고지순했다. 야율제를 위해 사사까지 양성했으니 말이다.
육장봉이 수횡천과 잠한성의 만남을 허락한 건, 잠한성이 야율제를 위해 사사를 준비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수횡천을 이용해 사사들을 한발 앞서 찾아내려 한 모양이었다.
“월 낭자,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월령안에게 읍을 하고서 말을 이었다.
“월 낭자, 소인이 올 적에 소여방이 서북쪽 구석에 있는 옆뜰에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 안 돼서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습니다.”
“소여방?”
월령안은 눈썹을 찌푸리고 고개를 저었다.
“그자는 상관할 필요 없어요.”
조계안이 소여방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녀에게 대답을 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그 대답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또 서북쪽 구석에서 많은 폭죽과 공명등(孔明燈 - 열기구의 원리를 이용하여 만든 종이 등)도 보았습니다. 월 낭자, 그 물건들을 처리할까요?”
회색 옷차림의 남자가 계속 보고했다.
“폭죽과 공명등?”
월령안이 가볍게 피식 웃었다.
“누가 대낮에…….”
그녀가 반쯤 이야기했을 때,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잠시 굳어졌다. 가벼운 탄식이 뒤따랐다.
“신경을 많이 썼구나.”
“월 낭자,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낮아, 그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화신이 결정되면, 폭죽을 터트리고 공명등도 띄워 보내세요.”
월령안은 눈을 감아, 눈 속의 모든 감정을 감추었다.
대낮에 불꽃놀이를 하고, 공명등을 띄우고 싶다는 이야기를 유경장에게만 했었다. 예상대로라면, 그 폭죽과 공명등은 유경장이 준비한 것이리라.
다만 유경장의 계획은 육장봉 때문에 모두 틀어졌다. 그래서 폭죽과 공명등도 그곳에 버려진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월 낭자.”
그가 대답하고서 다시 말했다.
“월 낭자, 다른 일이 없으면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네.”
월령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회색 옷차림의 남자는 읍을 하고 몸을 돌리자마자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월령안은 서둘러 자리를 뜨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침향원 쪽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마음속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실망감과 슬픔이 차올랐다.
그녀의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아까 침향원에서 육장봉은 분명 단칼에 야율제를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끝끝내 손을 쓰지 않았다. 황금당의 사람들이 야율제와 천천히 싸우게 함으로써, 잠한성이 배치한 사사들을 끌어내려고 했다.
갑자기 코끝이 시큰해 왔다. 그녀는 눈을 감고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야율제가 살아 있는 일분일초가 나에게 생명의 위협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뻔히 알잖아요. 언제든 제가 야율제의 칼에 죽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결국 이렇게 하는군요. 그러고도 당신이 있으면 제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요? 육 대장군, 저는 당신이 정말 존경스럽네요.”
그의 이성과 냉혹함은 존경스럽다 못해 감탄스러울 지경이었다.
‘육장봉, 정말 가증스러워!’
월령안은 주먹을 꼭 쥐고서 입술을 깨물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가 되어서야 겨우 마음속 한기와 분노를 억누를 수 있었다.
“화가 나서 사람을 죽이고 싶나요?”
갑자기 그녀의 귓가에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월령안은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순간 깜짝 놀랐다.
“최 대인?”
월령안은 한순간에 모든 감정을 억눌렀다. 살짝 붉어진 눈만이 아까의 감정 기복을 말해 주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방해했군요.”
최일은 온화하고 예의 바르게 월령안에게 사과하며, 뒤로 반 발짝 물러섰다.
“최 대인, 별말씀을요.”
월령안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최 대인께서는 언제 오셨죠?”
최일이 얼마나 보고 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최일은 군자답게 말했다.
“월 낭자께서 ‘육 대장군, 저는 당신이 정말 존경스럽네요’라고 할 때부터요.”
월령안은 최일에게 예를 올렸다. 그리고 씁쓸하고 자조적으로 말했다.
“최 대인께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네요. 제가 아직도…… 내려놓지 못했어요.”
월령안은 최일이 거짓말을 하는 걸 눈치챘다. 하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망신당할 만한 말은 하지 않았었다.
게다가 최일과 말을 나눠본 적은 없지만, 조정에서도 그를 아주 높이 평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관리 사회에서의 수완은 둘째치고, 도덕적인 면에서도 최일은 군자다웠다. 그런 그가 그 한마디만 들었다고 했으니, 전부 다 들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말을 지킬 것이다.
“육 대장군 같은 사람은 한 번 보기만 해도 잊기 어려운 사람이죠. 월 낭자가 단숨에 내려놓지 못하는 것은 정상적인 일입니다.”
최일은 이해할 수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였다.
월령안은 자조적으로 피식 웃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이를 본 최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으며 몰래 탄식했다.
‘육 대장군은 월령안이 변경의 여느 귀족 여인처럼 옷이나 장신구, 집안일에만 신경을 쓴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월령안이 여인의 몸으로 상업계에서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월씨 가문 사람이어서도, 장군부를 뒷배로 두어서도 아니었다. 본인이 충분히 영리하고 예리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영리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위험하게 만들다니. 육 대장군은 진짜 사람이 아니로구나.’
최일은 월령안을 보았다. 그녀는 짐짓 슬픈 척하며, ‘깊은 애정’으로 자신이 받은 상처를 감추려 하고 있었다. 다시 정원에서 웃음꽃을 활짝 피우고 있는 천진하고 예쁜 낭자들을 보았다.
그는 마음속으로 탄식하고 말았다.
월령안도 저 낭자들보다 기껏 한두 살 정도 많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더 힘들게 살고 있었다.
그 같은 목석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플 정도였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어린 아가씨가 살아가기란 정말 쉽지 않았다.
최일은 그녀를 위로할 방법이 없었다. 생각 끝에 품속에서 방금 완성한 그림을 꺼내어 건넸다.
“월 낭자, 이건 제가 방금 그린 그림입니다. 선물로 드릴 테니 조금이라도…… 기뻐하셨으면 좋겠군요.”
그녀를 도울 수는 없지만, 이런 상황에서 자그마한 위로 정도는 건넬 수 있었다.
그 나이의 어린 아가씨라면 활기차고 명랑해야 한다. 그는 월 낭자가 조금이라도 즐겁기를 바랐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즐겁기를 바랐다.
월령안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최일을 흘끔 보았다. 그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림을 건네받았다.
“최 대인, 감사합니다.”
최일이 그린 그림을 펼쳐 보니, 그녀가 사뿐사뿐 앞으로 걷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림 속의 그녀는 선녀처럼 아름답고 총기가 있어 보였다.
월령안은 언짢았었지만, 그림과 그림 속의 자신을 보고 나니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정말 마음에 들어요. 최 대인, 감사합니다.”
이 한마디 ‘감사’에는 아까보다 훨씬 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최일은 입을 다물고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나중에는 더 큰 기쁨과 놀라움이 있을 겁니다.”
월령안은 그림을 챙기더니, 엄숙한 표정으로 최일을 바라보았다.
“최 대인, 우리 예전에 알고 지냈던가요?”
그녀는 최일과 한 번도 왕래한 적이 없었다. 아무 접점도 없었다.
최일은 호부(戶部)의 관리이지만, 백 년간 이어온 명문 최씨 가문의 적장자였다. 일개 상인인 그녀로서는 알고 지낼 자격도 없었다.
그런 최일이 자신을 아주 잘 아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최일은 뭐 하려는 거지?’
“제 소개를 하는 걸 잊어버렸군요.”
최일은 표정의 변화 없이 부드럽게 말했다.
“최일, 자는 자도이고 조계안, 조 대인과는 반쯤 지기(知己)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월 낭자가 조 대인과 친구 사이니, 저와도 당연히 친구죠. 저를 자도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그럼 최 대인은 오늘 조 대인 때문에 오셨군요?”
월령안은 최일의 자기소개를 듣고 그를 더욱 경계했다.
조계안은 미치광이였다. 그런 그의 지기라니, 비록 반쪽짜리 지기라 해도 좋은 사람은 아닐 터였다.
“아니요. 저는 조 대인을 대신해 온 게 아닙니다.”
최일은 월령안이 자신을 아까보다 더 경계하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아까 월령안의 태도는 나름 괜찮았다. 그러나 조왕을 내세우니, 오히려 더 경계했다. 아무래도 조왕 때문에 그까지 인상이 안 좋아진 듯했다.
“알겠습니다. 최 대인께서 의문을 해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월령안은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고 말했다.
“최 대인, 연회에 돌아가 봐야 해서요. 먼저 가 보겠습니다.”
월령안은 한 걸음 물러서더니 몸을 돌려 가 버렸다. 최일과 오래 함께 있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이런, 내가 남들 앞에서 무안을 당한 건가?”
최일은 그 자리에 서서 월령안의 멀어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코를 매만졌다.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그를 싫어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이것 참……. 신기한 노릇이군.’
* * *
“월 언니, 어디 갔었어요? 여기저기 찾으러 다녔잖아요. 화신 선발이 곧 시작돼요. 우리 어서 가요.”
월령안이 나타나자마자, 그녀를 찾아 헤매던 낭자들이 몰려들었다.
“월 낭자, 어서요……. 우리 얼른 가 봐요. 벌써 화신을 뽑기 시작했어요.”
“왜 이제야 오세요? 이길 게 뻔하니 전혀 급할 게 없다는 거예요?”
전 낭자도 앞으로 다가왔다. 입으로는 불만을 토로하지만, 다른 이들을 슬그머니 밀어내고 월령안의 팔을 안았다.
“령안, 우리 같이 가서 보자고요. 올해 화신이 누구인지는 확실하지만, 그래도 봐야죠. 누가 안목이 없어서 당신을 안 골랐는지를 확인해 봐야겠네요.”
유명미는 일이 커질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방그레 웃으며 말했다.
‘태후 마마께서 나더러 등요 공주와 겨뤄서는 안 된다고 하셨지? 등요 공주가 오늘 이렇게 큰 망신을 당했는데, 누가 철면피를 깔고 공주를 뽑았는지 어디 한 번 봐야겠군.’
“맞아, 맞아. 얼른 가 봐요……. 누가 그리 안목이 없을까.”
유명미의 말은 곧 낭자들의 동조를 얻었다. 그녀들은 웃음꽃을 피우며 월령안을 에워싸고 대숲 앞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