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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238)화 (238/1,004)

238화 봉구황(鳳求凰)

그녀는 유경장과 사적으로 교분이 두터웠다. 하지만 두 사람이 친구 사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

글공부하는 사람이 고상하다면, 재자(才子)는 그 이상이었다. 고상한 사람이 어떻게 돈 냄새를 풍기는 상인과 어울릴 수 있겠는가.

처음 알게 되면서부터 월령안은 남들 앞에서는 일부러 유경장과 거리를 유지했다.

유경장은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했다. 나중에야 그녀의 마음 씀씀이를 알게 되었다. 그래도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녀의 호의를 묵묵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유경장은 그때 그랬던 것이 이제는 씁쓸하고 부끄럽기만 했다.

줄곧 월령안은 그를 위해 주었지만, 자신은 한 번도 그녀를 위했던 적이 없었다. 진정한 사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유경장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속은 여러 감정으로 뒤엉켜 있었다.

유경장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 마음속의 일렁이는 감정들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다시 단정하게 월령안에게 예를 올리며 사과했다.

“월 낭자, 내가 실례했소.”

“괜찮습니다. 유 공자, 무슨 일이신가요?”

월령안은 직감적으로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따라서 말투도 평소보다 더 거리감을 두었다.

그러나 유경장은 이 순간 너무 긴장하여 이러한 것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마음속의 물음을 묻고 싶을 뿐이었다.

“월 낭자, 육 장군과 함께 나타난 것은 육 장군을 용서한다는 말이오? 육 장군이 내쳤던 일을 개의치 않고, 다시 인연을 이어 가겠다는 뜻이오?”

유경장이 이 말을 묻는 순간, 모두 조용해졌다. 다들 호흡을 멈추고 월령안을 일제히 바라보았다.

정말 좋은 질문이었다. 그 질문의 답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궁금해하고 있었다.

육장봉과 월령안이 함께 공중에서 검무를 추는 모습을 보았을 때부터 이 질문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월령안이나 육장봉과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감히 묻지는 못하고 마음속에 묻어둔 채, 묵묵히 호기심만 느끼고 있었다.

이제 드디어 그들 대신해 묻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얼마나 기쁜지 몰랐다.

심지어 한쪽에서 열심히 그림을 그리면서 떠들썩한 판에 끼어들지 않던 최일마저 손에 든 붓을 내려놓고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도 아주 궁금한걸.’

모두가 월령안의 대답을 기다리는 가운데, 육 대장군이 월령안의 곁에서 걸어 나오더니 그녀의 앞을 막아 나섰다. 그러고는 눈을 살짝 들어 유경장을 훑어보았다.

“그게 그대와 무슨 상관인가. 유 대재자!”

육 대장군은 위엄이 대단했다. 보통 사람은 그가 한번 훑어보기만 해도, 다리가 풀리지는 않더라도 감히 그를 마주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유경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육장봉을 똑바로 마주 보며 예리한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그리고 날카롭고 냉정하게 말했다.

“이 일은 저와 상관없지만, 육 장군과는 상관이 있습니다. 육 장군, 소생이 감히 한마디 묻겠습니다. 장군께서는 월 낭자를 내친 것을 후회하여, 다시 월 낭자에게 구혼하는 것입니까?”

그가 대담하게 물어보자, 정원 안은 더욱 조용해졌다.

이 시각, 모두의 눈길이 일제히 유경장에게로 옮겨 갔다.

‘진정한 용사로구나!’

모두 앞에서 육 대장군과 맞서다니, 변경에서 이름난 대재자(大才子)로서 손색이 없었다. 대쪽 같은 기개와 늠름함에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유경장은 말을 마치고 다시 재촉했다.

“육 장군, 대답해 주십시오.”

‘대담하군!’

최일은 붓을 내려놓고, 육장봉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덕분에 나도 봉변을 면하겠군. 조 대인이 알면 무척이나 좋아할 거야.’

“유 공자…….”

월령안은 유경장이 일을 만들까 두려워, 경고를 담아 그를 불렀다. 그녀가 입을 열자, 유경장이 중단시켰다.

“월 낭자, 이건 나와 육 장군 사이의 일이오. 월 낭자께서는 잠시 물러나 주었으면 하오.”

유경장은 말을 끝내고 육장봉에게 읍을 하였다.

“육 장군, 어서 대답해 주십시오.”

유경장의 말투는 엄숙했다. 표정은 더욱 엄숙하고 진지했다. 거세게 몰아붙이는 느낌마저 들었다.

최일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얼굴에는 미소가 어렸다. 눈에는 찬사의 빛이 스쳤다.

그는 육장봉과 감히 기 싸움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높이 샀다.

“육 대재자, 여긴 기루가 아닐세. 풍류를 가장한 가식은 그만 두지.”

육장봉은 왼손 엄지에 낀 반지를 어루만졌다. 목소리는 맑고 차가웠다. 말 또한 빠르지도 늦지도 않아 냉정하고 침착했다. 유경장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듯이 보였다.

그러나 최일은 육장봉이 지금 불쾌해하고 있음을 알았다.

‘보아하니 재수에 옴 붙은 사람이 생기겠군. 불쌍한 유 대재자, 정말 시운이 따라 주지 않는구나.’

유경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몸이 눈에 띄지 않게 살짝 휘청거렸다. 그래도 여전히 꿋꿋하게 말했다.

“대장군께서 대답해 주십시오. 대장군의 대답은 저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반지를 어루만지던 육장봉의 동작이 느릿해졌다. 그는 담담하게 유경장을 힐끗 훑어보더니, 비웃으며 말했다.

“그대에게 중요한 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

“제가 앞으로 하려는 일은 장군의 대답과 관련이 있습니다.”

유경장은 한참이나 육장봉의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화를 내지 않았다.

육장봉이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태도를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육장봉의 대답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월령안에게 육장봉의 이 태도를 보여 주기만 하면 되었다.

“아……. 유 대재자께서 무얼 하시려고 그러나?”

육장봉은 입만 열면 그를 ‘유 대재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육장봉의 입에서 나온 그 호칭에는 비웃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

유경장은 기루에서 이름을 날렸다. 육장봉이 말할 때마다 ‘유 대재자’를 부르는 것은 그의 방탕함을 환기하려는 의도였다.

유경장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했던 일이 사실 남들의 생각과는 다르다 해도 반박할 방법이 없었다. 그저 쓴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유경장도 마찬가지로 육장봉의 물음에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육장봉과 월령안에게 읍을 하고서는 몸을 돌려 한쪽에 있는 아가씨들에게 말했다.

“여러분께 유씨 경장이 인사드립니다. 혹, 어느 낭자께서 금을 가져오셨는지요? 혹 저에게 잠깐 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 금을 빌려 드릴게요.”

유명미와 친한 친구가 된 전 낭자는 뺨이 빨갛게 물들었다. 줄곧 유경장의 재능을 흠모하고 있던 터였다. 유경장이 입을 열자 선뜻 자기 금을 빌려주었다.

“전 낭자, 감사합니다.”

유경장은 전 낭자에게 예를 올렸다.

월령안은 일이 걷잡을 수 없게 되자, 눈썹을 찌푸리고 설득했다.

“유 공자, 지금은 춘일연입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성 안으로 돌아가서 다시 이야기하지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일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 오늘 그녀는 충분히 주목을 받았다. 이제 더 주목을 받았다가는 올해 춘일연이 그녀 하나만을 위해 열린 것처럼 보일 터였다.

아무리 여기 있는 아가씨들을 달래 그녀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한다고 해도 소용 없었다. 그녀들의 부모와 형제가 소식을 전해 듣고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춘일연에 참석하는 모든 아가씨는 좋은 명성을 얻어 좋은 혼처를 구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 혼자서 주목을 받으면, 나머지 아가씨들은 빛을 잃게 된다. 나중에 혼담이 오갈 때 반드시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삼 년 전 그녀가 화신 칭호를 얻었을 때 왜 모두가 분노했을까.

정말로 그녀가 속임수를 써서였을까? 아니었다.

삼 년 전 춘일연에 참석했던 모든 낭자들이 일개 상인 집안 출신 여인보다 못하다는 평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그녀들의 혼삿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삼 년 전의 낭자들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 그녀가 속임수를 썼다고 소문을 내야만 했다. 만약 그녀가 육장봉에게 시집가지 않았다면, 더욱 험한 욕을 들었을 것이다.

올해는 어떤가. 올해 그녀는 여전히 잔꾀를 부렸다. 하지만 육장봉의 전 부인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게다가 육장봉이 있는 힘껏 도와주었다. 설령 화신의 칭호를 얻어내더라도, 남들은 육장봉이 도와준 덕이지 그녀의 실력으로 따낸 게 아니라고 할 것이다.

이게 바로 그녀가 싫음을 감수하고, 육장봉을 강경하게 거절하지 않은 이유였다. 육장봉이 있으면 그녀가 고스란히 당해야 하는 공격을 나눠 받을 수 있었다.

그녀의 목표는 오로지 화신이었다. 그 밖의 일로 시선을 끌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유경장이 나타나는 바람에 일이 꼬였다.

유경장이 고집을 부리면, 그녀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유경장은 월령안의 권고를 무시하고 그녀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리고 전 낭자가 건네주는 금을 받았다.

그는 자리를 따로 고르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옷자락을 걷고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금을 다리 위에 올려놓더니, 가볍게 현을 뜯기 시작했다.

“월 낭자, 지난 한 달 동안 줄곧 이 곡 하나만을 되풀이해서 연습했소. 춘일연에서 가장 훌륭한 모습으로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었소.”

유경장은 월령안에게 말해 주지 않았다. 이 곡은 삼 년 전부터 들려주고 싶었던 곡이었다. 그러나 그때의 그는 나약하고 무능했다.

그는 이 곡을 무려 삼 년이나 연주했다.

삼 년간, 천여 일의 밤낮이 흐르는 동안 천여 번을 연주했다. 정작 이 곡을 그렇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오늘 드디어 월령안의 앞에서 이 곡을 연주하게 되었다. 그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분명히 알릴 수 있게 되었다.

유경장이 가볍게 현을 뜯자, 금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금 소리와 함께 유경장의 나지막하고 깊은 정이 담긴 노래가 들려왔다.

한 미녀가 있었네,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었지(有一美人兮, 見之不忘).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그리워 미칠 것 같았네(一日不見兮, 思之如狂).

수컷 봉이 날아 천하에서 암컷 황을 구하는데(鳳飛翺翔兮, 四海求凰)

가인이 동쪽 담벼락에 없으니 어찌할 방법이 없네(無奈佳人兮, 不在東墻).

금 소리로 말을 대신해 내 마음을 읊어보네(將琴代語兮, 聊寫衷腸).

언제쯤 만남을 허락받아 내 방황을 위로해 주려나(何日見許兮, 慰我彷徨).

내 덕행이 당신에게 어울리기를, 손잡고 함께할 수 있기를 바라네(愿言配德兮, 携手相將).

당신과 함께 날 수 없어 나를 절망으로 몰아넣네(不得於飛兮, 使我淪亡).

봉아, 봉아, 고향에 돌아가거들랑 천하를 누비어 황을 구하거라(鳳兮鳳兮歸故鄕, 遨遊四海求其凰).

<봉구황(鳳求凰)>이 유경장의 손끝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눈을 감고 현을 뜯으며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 곡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있어, 눈을 감고서도 연주할 수 있는 게 분명했다.

“한 미녀가 있었네,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었지.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그리워 미칠 것 같았네…….

봉아, 봉아, 고향에 돌아가거들랑 천하를 누비어 황을 구하거라…….”

유경장이 낮게 읊조리는 소리는 애절하기만 했다. 금 소리가 멎는 순간, 그의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 되었다. 그러나 입으로는 여전히 중얼중얼 읊조리고 있었다.

“한 미녀가 있었네,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었지.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그리워 미칠 것 같았네…….”

유경장이 월령안을 바라보는 눈길에는 떨쳐 버릴 수 없는 깊이 정이 담겨 있었다.

‘내가 놓쳤던 미녀, 지금도…… 기회가 있을까?’

그는 정말로 월령안을 좋아했다. 아주 많이 좋아했다.

하지만 그 마음을 스스로 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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